서백의 사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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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77 - 팔영산 능가사

徐白(서백) 2012. 4. 19. 20:49

 

따뜻한 봄햇살에 피어난 앙증맞은 봄꽃들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손짓하는 4월 세째

일요일(15일). 사단법인 미소원 문화유적답사회가 찾아간 사찰은 팔영산 능가사이다. 

자연과 함께 어울어진 고즈넉한 산사는 속세에 찌든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 안아주는 듯했다. 

 

능가사를 품고 있는 팔영산은 중국 위왕시대에 위왕이 세수하려던 관수에 여덟 산봉우리 그림자가

비치었는데, 신기하게 생각한 위왕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팔봉의 산이 어느 곳에 있는가를 찾아보게 

하였더니, 동방의 나라 조선국 최남단에 있는 팔영산(八影山)을 발견했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

 

위왕의 관수에 팔봉이 비치었다 하여 그때부터 '그림자 影'자를 붙여 팔영산(八影山)으로 불리게 됐다.

임진왜란 때는 왜놈들이 침입하여 팔영산의 팔봉에다 큰 대못을 박아야 민족의 정기가 끊어지고

조선을 정복할 수 있다하여 칠봉까지 못을 박았으나 무슨 연유에서 인지는 몰라도 팔영봉에 대못을

박지 못함으로 인해 팔응장군이 나왔다는 전설도 있다.

 

또한 조선 중기 송팔응 장군이 젊은 시절 팔영산에서 무예를 닦을 때의 일이다.

송 장군은 자신의 백마와 화살 중 누가 더 빠른가를 시험하기 위해 팔응봉에서 점암면 신안리

각마을 뒤쪽 야산의 고인돌을 향해 활 시위를 당긴 후, 백마를 채찍질해 고인돌에 도착했으나

살이 보이지 않자 말의 목을 벴으나 뒤늦게 화살이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는 팔영산이다.

 

팔영산 자락에 있는 능가사(楞伽寺)는 행정구역상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371-1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며 비구니 도량이다.

능가사(楞伽寺)는 신라 417년(눌지왕 원년)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지만

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모르는 보현사(普賢寺)가 능가사로 되었다고

"능가사사적비(楞伽寺事蹟碑)"에서는 밝히고 있으나 지리지(地理志) 등에는 서로 다른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능가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불확실하나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버려

폐사찰(廢寺刹)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644년(仁祖 22)에 정현대사(正玄大師)가

하안거(夏安居)를 하다가 꿈을 꾸게 되었고, 산 자락에서 옛 절터를 발견하여 불사를 함으로써

사찰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690년(肅宗 16년)에는 <능가사사적비>를 건립하였고, 

그뒤 1768년(영조 44)과 1863년(철종 14)에 중수하였다.

 

▲ 능가사 뒤쪽으로 보이는 여덟 봉우리의 팔영산 모습 

 

▲ 중국 위왕시대에 위왕의 관수에 팔봉이 비치었다 하여 그때부터 '그림자 影'자를

붙여 팔영산(八影山)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팔영산이 천왕문 좌측으로  멀리 보인다.    

 

천왕문은 1995년 천왕문 복원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현종 7년(1666년)

건립되어서 순조 24년(1824)과 1931년에 보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문으로 어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양 협칸에는 목조사천왕상을 2분씩 모시고 있다.

 

                  

▲ 천왕문의 위쪽에는 '天王門(천왕문)'이라고 씌여진 현판이 걸려있고

아래에는 '八影山 楞伽寺(팔영산 능가사)'라고 적혀있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관지(款誌)는 '丙子小春 曹溪山人 龍隱(병자소춘 조계산인 용은)'라 적혀 있다.

천왕문의 통로를 통해 보이는 대웅전이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천왕문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경호실장)이 되었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224호로 지정되어있는 능가사 목조사천왕상이다.

비파를 손에 들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은 인간의 기쁜 감정과 봄을 관장하며,

선한 자에게는 복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린다.

손에 칼을 들고 있는 남방 증장천왕은 인간의 사랑 감정과 여름을 관장하며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푼다고 한다.

 

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는 서방 광목천왕은 인간의 노여움의 감정과 가을을 관장하며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구도심을 일으키게 한다.

 

손에 보탑(사리기)을 들고 있는 북방 다문천왕은 인간의 즐거움의 감정과 겨울을 관장하며

어둠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한다. 그리고 사천왕 중의 가장 우두머리 천왕이기도 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잘 듣는다하여 多聞이라 한다.

 

▲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겹처마에 모임지붕을 한 종각의 모습

 

 보물 제1557호 "능가사명동종"은 조선시대의 동종(銅鐘)으로 종신에

"康熙三十七年戊寅三月日 興陽八影山楞伽寺…"의 주종명이 있어

‘능가사 강희명 동종(楞伽寺 康熙銘 銅鐘)’이라고도 하며, 1698년(숙종24)에

만들어진 범종임을 알 수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에

헌병대로 가져가서 종을 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보물 제1557호 "능가사명동종"의 용뉴는 쌍용으로 정상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음통은 없고 천판은 이중의 연화문을 표현하였다. 상대에 원형으로 자리를 마련해

12자의 범자문을 차례로 돌렸다.  유곽 안에는 9개의 유두를 표현하고 있다.

 

종신의 중앙부에는 주역에서 나타나는 乾(건)에서 坤(곤)에 이르기까지 팔괘를 양각으로 둘렀는데,

이는 조선 범종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예는 같은 경내의 능가사 사적비

이수에서도 표현되고 있어 주목된다. 하대로 내려와서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그 안에 화판과

당초문을 돌렸다. 특히 화판은 각각 그 문양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여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 종신에는 사각의 띠 안에 양각으로 "主上三展下壽萬歲(주상삼전하수만세)"라는

문구를 새겨 숙종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다.

 

▲ 인고의 오랜 세월을 견뎌 오면서 능가사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을 벚나무가 지금도 말없이 대웅전 앞마당을 지키고 있다. 벚나무 밑둥치 주변으로는 고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장지(徒長枝)들이 제멋대로 솟아올라 크고 있다.

 

▲ 능가사 대웅전 편액(扁額)은 염제(念齊) 송태회(宋泰會, 1873~1943)가 쓴 글씨이다.

염제(念齊) 송태회(宋泰會)는 전라남도 화순  동북면 사평리 출신으로 구한말에 태어나

동몽진사에 합격하여 최연소로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시작(詩作)경연이 있을 때는 맡아 놓고

장원을 하였고, 또한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리거나 글을 짓고 쓰는 일은 염재가 도맡았다고 한다.

 

구한말 염재는 책을 덮어 버리고 붓과 벼루를 벗삼아 아픈 심경을 달래기 위하여

낙향해 고창고보에서 한문과 서예를 가르치면서 민족정신을 일깨운 선각자이다.

고창 문수사, 월출산 도갑사, 선암사 장경각. 방장산 천은사 등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

 

 

 

 

 

▲ 보물 제1307호 "능가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건물이지만 규모가 크고 건축양식이 우수하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건물양식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로

비교적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창호는 어칸은 4분합의 빗살문, 협칸은 쌍여닫이, 퇴문은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약한 배흘림의 두리기둥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올렸으며,

공포는 외3출목(外三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의 다포양식으로 되어 있다.  

 

▲ 대웅전의 본존불은 나발의 머리이고 상호(相好)는 원만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이다. 좌우 협시는 입상의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며, 기존의 보살상을 도난 당하여 다시 조성한 불상이다. 본존불 좌우에 모셔져 있는

연등불과 미륵불은 아미타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 송월요(送月寮) 편액과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 맞배지붕의 송월료 건물

 

▲ 송월료 옆에 뒹굴고 있는 각종 유구들의 모습

 

 

▲  염제(念齊) 송태회(宋泰會)가 쓴 원음료(圓音寮) 편액과 원음료 건물의 모습

 

 

▲ 능가사 응진당 편액(扁額)도 대웅전 편액, 원음료 편액과 함께 염제(念齊) 송태회(宋泰會)가 쓴 글씨이다.

 

▲ 응진당은 나한전(羅漢殿)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석가모니 삼존불을 모시고,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들인 16나한(아라한의 줄인 말)을 봉안한 법당이다. 원래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고승을 지칭하는 말이였으나, 아라한(阿羅漢)과를 증득하여 마땅히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큰 성인이라는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으로부터 미륵불이 출현할때까지

중생을 교화하라는 수기를 받은 분들이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와 16나한상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하며, 석가삼존불과 500나한을

모신 전각은 나한전이라고 한다. 여기서 500이란 숫자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마하가섭이

부처님 생전에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제1차 경전결집을 위한 회의를 진행했을 때 칠엽굴에

모인 비구(아라한)가 500명인데서 유래하였다.

 

▲ 응진당 측벽에 봉안되어 있는 산신탱은 화기에 의해1858년(철종 9)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응진당 산신탱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있으며

하얀 수염도 인상적이다.

 

▲ 전남 유형문화재 제70호 "능가사사적비"는 방형의 좌대 위에 귀부를 올리고 그 위로 비신과

이수를 갖춘 완벽한 사적비이다. 이 비는 비신 전면 상단에 전서체로 '興陽八影山楞伽寺事蹟碑

(흥양팔영산능가사적비)'라 쓰고, 비명은 ‘朝鮮國全羅道興陽縣 八影山楞伽寺事蹟碑銘幷序

(조선국전라도흥양현 팔영산능가사적비명병서)’이다. 말미의 ‘숭정기원후재경오월일립

(崇禎紀元後再庚午月日立)’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1690년(숙종 16)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세부양식을 보면 귀부의 머리는 용두화되었으나 목이 짧아 웅크린 모습이다.

입안에 여의주를 머금고 있다. 귀부 전면에는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양편에 8괘를 시문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는 경우이다. 귀갑은 하단에 6각문을, 상단에는 파상문을 조출하였는데

비늘이 말려져 올라있는 듯이 표현되었다. 이하 유사한 예로는 조선후기에 세운 영암 도갑사의

도선수미비(1653년)의 귀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사자의 모습을 새겨 놓아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비는 원래 탑 앞에 있었는데 ‘덕목’이 도술을 부려서 절 뒤로 옮겼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 팔영산 능가사사적비 앞에서 문화유적해설을 경청하고 있는 사단법인 미소원

회원들의진지한 모습에서 미소원의 희망찬 미래를 볼 수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