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74 - 모후산 유마사 본문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74 - 모후산 유마사

徐白(서백) 2012. 2. 11. 15:13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엄동설한의 겨울, 정이 넘치는 칠불산악회 사람들과 함께 함으로 추운 겨울이지만 따뜻한 하루였던 것 같다. 언젠가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했던 유마사(維摩寺)였는데, 칠불산악회에서 유마사를 품고 있는 모후산(母后山)을 가게 되어 오랜만에 동참을 하였다. 오직 유마사를 가야한다는 욕심으로 말이다. 왜 모후산은 '임금의 어머니(母后)'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알고 보니 고려 공민왕의 이야기가 전설 속에 숨어 있었다. 원래 산이름은 나복산이었지만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왕비와 태후를 모시고 이곳으로 내려와 가궁을 짓고 환궁할 때까지 1년 가까이 머물렀기 때문에 모후산(母后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유마리 모후산(母后山) 기슭에 위치한 유마사(維摩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며, 627년(백제 무왕 28)에 당나라에서 온 유마운(維摩雲) 스님과 그의 딸 보안(普安)이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이다. 창건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고려 초기로 추정되는 해련(海蓮) 스님의 부도로 인해 고려시대에도 그 법맥이 꾸준히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문현에 의한 조선중기 이후의 연혁을 살펴보면, 1656년(효종 7)과 1670년(현종 11)에 각각 중건하였으며, 1879년(고종 16)에는 김경담(金景潭)과 김규홍(金奎弘)이 향당(香堂)을 신축하고 당우들을 중수하였다. 1910년 이전까지만 해도 귀정암(貴靜庵), 금릉암(金陵庵), 운성암(雲城庵), 사자암(獅子庵), 오미암(五味庵), 은적암(隱寂庵), 남굴암(南窟庵), 동암(東庵) 등의 암자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였는 듯하다.  

 

이후 1919년 주지 김영운(金榮雲) 스님이 봉향각(奉香閣)을 설립하였으며, 1928년 오호연 스님의 불사가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다시 완전 소실되었다가 10여년 전에 일장(日藏) 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오시면서 인재양성과 수행도량을 목표로 중창불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호남지역 유일의 비구니 승가대학과 대학원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일주문 옆에 있는 이다리는 보안교(普安橋)이며, 현재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3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다리의 윗면(상판) 왼쪽에 ‘유마동천보안교(維摩洞天普安橋)’라 쓰여 있어, 예전에는 이 계곡을 절이름에서 빌어 ‘유마동천’이라 하였으며 다리의 이름이 보안교임을 알 수 있다. 다리의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량련호(觀世音菩薩梁蓮浩)'라 쓰여 있고, 그 아래 시주자의 이름이라 생각되는 ‘백운거사서(白雲居士書)’를 새겨 놓았다.

 

보안교 옆의 유마사 일주문

 

 보물 제1116호 '화순 유마사 해련탑(海蓮塔)' 해련스님의 부도이다. 이 부도는 통일신라 9세기경에 발달한 8각 원당형의 전형양식을 그대로 고수한 예로서, 인근에 있는 쌍봉사 철감선사부도와 함께 나말여초의 석조물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전반기로 추정되고 있다.

 

 석종형 부도인 탑신부의 중앙에는 '경헌장로지탑(敬軒丈老之塔)'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방형의 지대석과 하대석은 단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석의 4면에는 복련(伏蓮)이 2엽씩 새겨져 있으며, 네 모서리의 서쪽에는 멧돼지, 남쪽과 북쪽은 사자, 동쪽에는 호랑이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는 대구 부인사 입구의 부도나 광주 원효사 동부도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가안선자(可安禪子)의 사리를 모신 부도로 가안선자탑(可安禪子塔)이라고 한다. 탑의 옥개석을 부도의 지대석과 옥개석으로 삼았다. 지대석은 층급 받침이 3단인 옥개석(屋蓋石)을 뒤집어 이용하였고 그 위에는 11엽의 앙련(仰蓮)을 양각한 원형의 탑신(塔身) 괴임이 받치고 있다. 부도의 옥개석도 층급 받침이 3단인 옥개석을 올리고 그 위로 층급 받침이 3단인 작은 옥개석을 거꾸로 올렸다. 부도의 석재로 이용된 옥개석은 모두 3매이다.

 

해련탑에서 본 유마사 전경이다. 앞쪽 좌우로 가안선자탑과 경헌선사탑이 보인다.

 

 

 

 

 

 

 

대웅전에는 근래에 조성된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본존불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아미타 수인을 취하고 있으며, 법의(法衣)는 통견이다. 좌우 협시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관음보살의 보관(寶冠)에는 화불(化佛)이 표현되어 있다.

 

 

 

 

대웅전 한 단 아래의 대지 양쪽에 2개씩 1조를 이루어 괘불지주가 있다. 상부는 각을 없애고 호형으로 다듬어 모나지 않게 마무리하였다. 각각 상하에 구멍이 뚫려 있고 문양이나 명문은 없으며 면이 매우 거친 편이다. 조성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되며, 이를 통해 유마사에도 괘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괘불석주(掛佛石柱)는 사찰에서 행해지는 큰행사에는 많은 불자(佛子)들이 참석하게 되면 비좁은 대웅전 안에서 법회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대웅전 안에 모셔진 부처님을 대신하여 두루말이 그림 형태의 괘불을 대웅전 앞 마당에 두개의 깃대를 세워 걸고, 더 많은 신도들이 부처님을 볼 수 있게 하였던 깃대를 고정하는 석주(石柱)이다. 외형은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즉 야외에 부처님을 모시는 단을 설치하여 불법(佛法)을 설(說)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 많은 사람이 모임으로 인해 시끄럽고 떠들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야단법석(野檀法席)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경내에 자리잡은 제월천(濟月泉)이라는 샘에는 욕정에 불타는 젊은이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 아름다운 전설이 전한다. 승려가 되기 위해 유마사를 찾은 한 젊은이가 유마운(維摩雲)의 외동딸인 보안(普安)에게 반해 사랑에 빠졌을 때, 보안은 샘물에 떠 있는 달을 체로 건져 올리면 그 사랑을 받아주겠노라 하였다.

 

젊은이가 번번이 실패하자 보안은 체로 달을 떠올림으로써 비범한 경지를 보였으나, 사랑에 눈이 먼 젊은이는 여전히 보안을 탐하였다. 이에 몸을 허락하기로 하고 대웅전으로 간 다음, 자신을 껴안는 젊은이에게 “저 부처님이 보이지 않느냐! 저 부처님만 부처님인 줄 아느냐!” 라고 호통친 뒤 불상이 되었고, 그 순간 젊은이는 큰 깨달음을 얻어 후일 고승이 되었다. 그 뒤부터 이 샘은 달[月]을 건진[濟] 샘이라 하여 ‘제월천(濟月泉)’이라 부르게 되었다.

 

 

 

 

 

 보안교에 얽힌 전설

 전남 화순군 남면 유마리 유마사 입구 일주문 옆에 있는 이다리의 윗면 왼쪽에 ‘유마동천보안교(維摩洞天普安橋)’라 쓰여 있어, 예전에는 이 계곡을 절이름에서 빌어 ‘유마동천’이라 하였으며 다리의 이름이 보안교임을 알 수 있다. 다리의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량련호(觀世音菩薩梁蓮浩)'라 쓰여 있고, 그 아래 시주자의 이름이라 생각되는 ‘백운거사 양연법(白雲居士 梁蓮法)’을 새겨 놓았다.

 

이 보안교는 유마사의 창건주인 유마운의 딸 보안(普安)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보안은 불교에 귀의한 도통한 비구니로, 적벽 근처에 보안사를 창건하였으며 유마사에 있는 제월천(濟月泉)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또한 이 다리를 놓기 위해 모후산 중턱에서 많은 인부를 동원해 석재를 운반하였으나 험한 산길이라 작업의 진척이 느려지자, 보안이 치마폭에 바위를 담아와서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