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73 - 중조산 쌍봉사 본문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73 - 중조산 쌍봉사

徐白(서백) 2012. 2. 2. 15:34

 

  쌍봉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741번지, 중조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다. 쌍봉사 창건설화에는 철감선사의 이야기가 전한다. 쌍봉사 절터에는 만금의 부자가 살고 있었다. 철감선사가 이곳을 관망해 보니 뒷산은 사자가 누워 있는 형상이요 집터는 범선의 형상이었다.

철감선사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리고 집터를 잡아주고 그곳에 절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이 지역의 형국이 배(범선) 모양을 하고 있어서 당간(幢竿) 대신 높은 삼층 목탑을 세워 범선에 돛을 단 형상을 하게 만들고, 뒷산에 우물을 파 선객들의 수도처로 정하니 스님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신라 경문왕 때 중국에서 귀국한 철감선사(澈鑒禪師)가 창건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철감선사가 중국에서 귀국한 해는 847년(문성왕 9)이고, 태안사에 있는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徹ㆍ慧哲 785~861)의 부도비에는 혜철스님이 839년(신무왕 원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관내의 쌍봉사에서 처음으로 하안거(夏安居)를 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쌍봉사는 839년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다만 철감선사가 주석하던 때에 사세가 크게 일어났을 것이라 여겨진다.


쌍봉사의 절이름에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하는데, 하나는 중조산의 한 갈래가 왼쪽으로 돌아 에워싸면서 절을 향해 우뚝 솟아 있어, 마치 남북의 두 봉우리가 서로 읍(揖)하고 있는 듯하여 ‘쌍봉’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철감선사가 중국에 머무를 당시 소주(蘇州)에 있는 쌍봉사에서 도를 깨쳤다 하여 그의 도호(道號)를 ‘쌍봉’이라 하였는데, 철감선사가 이 사찰에 머무름으로 인해 선사와의 인연을 되새기고자 쌍봉사라 불렀다고 한다. 847년에 귀국한 철감선사가 855년(문성왕 17) 무렵 쌍봉사로 와서 10여 년간 머물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선사의 선풍을 이어받은 제자 징효선사(澄曉禪師)가 강원도 영월 홍녕사에서 사자산문을 개창하게 되니, 결국 쌍봉사는 사자산문의 시초로서 기틀을 잡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창건 이후 퇴락해 버린 쌍봉사는 1081년(문종 35)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창불사 하였고, 조선 세종 때에 전라도관찰사로 있던 김방(金倣)이 3창불사를 하였다. 세조 대에 이르러 나라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게 되어, 1468년(세조 14)에는 세조(世祖)의 원당으로 나라의 보살핌을 받게 되어, 세조는 즉위 초에 “전라도 능성의 쌍봉사에 대해서는 감사와 수령에게 이미 전지를 내려보낸 바 있으나, 다시 잘 살펴 더욱 보호를 두텁게 하여 모든 잡역을 면제하라”는 교지를 내리기도 하였는데, 사방 30리에 달하는 불량답(佛糧畓, 부처님의 공양미을 짓는 논)이 있었다. 이때의 가람은 전각ㆍ누각ㆍ암자ㆍ승방ㆍ요사 등이 모두 400여 칸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이후 1579년(선조 30)에 정유재란으로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1628년(인조 6)에 요의(了誼) 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한 후 여러 전각이 건립되고 1690년에 대웅전 중건과 1694년에 대웅전 석가삼존불 및 극락전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는 등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꾸준한 사세를 유지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6.25 때 대웅전과 극락전만을 남긴 채 대부분의 당우들이 소실되었고, 보물 제163호로서 우리나라 3층 목탑건물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대웅전이 198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대웅전은 1986년에 복원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3층의 목조 대웅전으로 쌍봉사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한 유서깊은 고찰 쌍봉사와 함께 마을사람들에게는 중조산을 사자산(獅子山)으로 불러지고 있기에 일주문에 '雙峰獅子門(쌍봉사자문)'이란 편액을 걸었지 않을까 추측된다.

'雙峰獅子門(쌍봉사자문)'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일주문

 

 

건물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맛배지붕의 건물이다. 천왕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두번째문으로 하늘의 왕인 천왕들이 모셔져 있는 문을 천왕문 또는 사천왕문이라고 한다. 즉 천왕문은 佛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천왕문 뒤편에는 1990년에 쓴 '해탈문(解脫門) 편액이 걸려 있다. 해탈문이란 온갖 번뇌와 괴로움을 여의고 윤회의 얽매임에서 벗어난다는 뜻의 문이다.

 

천왕문 안에는 동방 지국천왕을 비롯해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이 함께 모셔져 있다.

 

쌍봉사 대웅전은 1690년(숙종16)의 두번째 중건에 이어 1724년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上樑文)이 나왔다. 즉, 이 건물이 숙종16(1690)에 중창되고 경종4년(1724)에 3창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초창의 시기는 언제인지 확실치 않다. 최근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3층의 건물은 원래 대웅전 건물이 아닌 탑이었다고 전한다. 총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로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으나, 1984년 4월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전소되면서 보물 제163호에서 지정해제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에서 희귀한 문화재의 인멸을 방지하기 위하여 1985년 8월5일 복원 공사에 착공, 1986년 12월30일 준공하였다. 소실 이전의 모습은 3층으로 지붕이 팔작형식이었는데, 현재는 사모지붕의 목탑 지붕형식으로 바뀌었고 상륜부까지 보완하였다. 그리고 처마 밑의 공포는 초층은 3출목(三出目)이며, 2ㆍ3층은 2출목(二出目)이다. 공간포(空間包)는 초층과 2층이 2개씩, 3층은 1개를 배치하였다.

내부 1층에는 마루를 깔고 불단(佛壇)을 안치하였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2ㆍ3층은 하나로 튼 통층(通層)이며 중심에 심주(心柱)가 하나 있는데, 각층 지붕의 춘설(春舌, 합각지붕과 모임지붕의 귀에 대각선 방향으로 거는 경사진 부재)은 모두 그 뒤끝이 이 심주에 연결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에 봉안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인 목조석가모니삼존불좌상은 다행히 화재를 면해 옛 모습 그대로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협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입상의 가섭과 아난존자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합장한 모습이다.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의 나발은 촘촘하고 육계는 작은 원통형으로 처리하였으며 머리 중간에 계주가 있다.

 

귀는 크고 두툼하며,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를 나타내었다. 양 어깨를 감싼 법의(法衣)는 통견이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여 오른손은 손바닥을 펴서 자연스럽게 무릎 안쪽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오른발바닥 위에 놓았다. 불상 조성 발원문에 의하면 이 석가불은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가섭과 아난존자와 함께 1694년(조선 숙종 20)에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화재시에 대웅전이 불타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현판과 목조삼존불상은 무사할 수 있었다. 특히 불상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임에도 이웃 농부가 등에 업고 나왔다고 한다. 앉아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양쪽에서 제자인 아난존자와 가섭존자가 호위하고 있는 단아한 모습의 이 삼존불은 지금도 대웅전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대웅전 앞 마당에 있는 괘불석주는 상부와 하부의 두께가 거의 일정하며 각각 상하에 구멍이 뚫려 있으며, 조성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丁’자형을 이루고 있는 호성전은 2000년에 옛 모습을 고증하여 새롭게 복원한 건물이다.

 

최근에 지어진 나한전(羅漢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아난ㆍ가섭존자입상을 포함하여 16나한상이 봉안되었다. 또한 인왕상 2구, 사자상 2구, 동자상 4구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나한은 범어(梵語)의 아라한에서 온 말로 응공(應供), 응진(應眞) 등으로 의역되고 불러진다. 나한은 열반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다시 미혹의 세계에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가섭, 아난 등 부처님의 10대 제자와 빈두로파라타 등 16명의 제자, 부처님 설법을 듣고 항상 따르는 1250명의 제자, "법화경" '오백제자수기품'에 기록된 500명의 제자 등을 나한이라고 일컫는다.

 

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柱心包) 건물이다.

 

 

 

내부 중앙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로 목조도명존자입상과 무독귀왕입상 및 목조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전에 봉안된 목조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한 목조시왕상 등은 기록에 따르면 1667년(현종 8)에 조성된 것으로, 빼어난 조각솜씨로 예술성이 뛰어나며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일괄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는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6.25로 대부분의 당우들이 소실될 때 대웅전과 함께 소실되지 않은 건물로, 쌍봉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건물형태는 높은 축대 위에 커다란 덤벙주초를 놓은 뒤 배흘림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끼워 넣고 평방을 올린 다포식 건물이다. 천정은 우물천정에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창문은 2분합 띠살문이다. 앞쪽의 처마는 부연을 내달은 겹처마이고 뒤쪽 처마는 흩처마이며, 처마 양측에 풍판을 달았다
 

극락전 내부에는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협시 관음과 대세지보살상은 1989년에 도난 당함)을 비롯하여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극락전의 왼편 단 위에는 석조지장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소형의 보살상으로, 두건을 쓰고 있는 피모지장보살이다. 좌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재료는 석고처럼 보이지만 ‘불석’이라 불리는 돌로 만든 석조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측된다.

 

쌍봉사 경내에서 뒤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이 탑은 8각 원당형(圓堂型)의 기본형을 잘 나타낸 신라 최고의 우수한 부도(浮屠)이다. 신라의 여러 부도 중 각부(各部)의 조각이 가장 화려하고 우수한 걸작품이다. 높이는 2.3m이며 하대석 1매, 중대석과 상대석이 1매, 몸돌 1매, 지붕돌 1매의 모두 4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 위에는 둥근 철주구멍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세부 조각수법에서는 목조 건축양식을 본뜨고 있어, 그 무렵 건축기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빼내기 위해 쓰러뜨려 놓은 것을 1975년에 다시 짜 맞추었다고 한다. 그 탓인지 지붕돌의 추녀 여러 곳이 파손되어 있다.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같은 돌로 2단의 팔각형 굄을 둔 후 두 단으로 이루어진 하대석을 놓았다. 하대석 하단은  둥근데, 옆면은 구름무늬를 가득 새겼다. 구름무늬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고 정면에서 두 용머리가 마주보며 그 가운데 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다. 하대석 상단은 팔각이며 여덟 귀퉁이에 연잎을 말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 각 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안에 사자를 한 마리씩 양각했다. 여덟 마리의 사자는 엎드려 있거나 고개를 젖혀 뒤를 돌아보거나 뒷발을 물고 있는 등 저마다 생생한 모습이다.
 
중대석과 하대석의 연결부위는 하대석 윗부분을 안으로 파서 그 안에 중대석 아랫면이 끼도록 되어 있다. 팔각을 이룬 중대석의 각 모서리에는 아래위로 날개처럼 펼쳐진 연잎으로 기둥을 조각하고, 그 사이 각 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가운데에 얼굴이 매우 큰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다
.

 

상대석은 둥근 연화대와 팔각의 몸돌 굄대로 이루어졌는데, 굄대가 매우 높다. 연화대 측면에는 16장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꽃잎 뒷부분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몸돌 굄대의 각 모서리에는 상다리 모양의 기둥을 돋을새김하고 그 사이에 안상을 깊게 판 후, 비파ㆍ나팔ㆍ장구ㆍ바라 등 저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가릉빈가를 하나씩 새겼다. 굄대 윗부분은 갑석처럼 두드러져 나왔는데, 그 각 측면도 그대로 두지 않고 가느다란 선무늬를 넣었다. 아래의 상다리 기둥 표면에도 같은 무늬가 있다. 몸돌 바로 아래에는 팔각으로 둥그스름한 굄과 각진 굄이 있다. 둥그스름한 굄에는 자잘한 연꽃잎을 한 변마다 7장씩 엎어 새겼다.

 

팔각 몸돌의 각 귀퉁이에는 배흘림된 둥근 기둥을 세웠고, 기둥 윗부분에 목조건축의 짜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몸돌 앞뒤에는 자물통이 달린 문이 새겨져 있고, 앞뒷문 좌우에 사천왕상이 있으며 나머지 두 면에는 옷자락을 날리며 내려오는 비천상이 한 쌍씩 새겨져 있다. 지붕돌 또한 팔각을 이루어 낙수면이 묵직하게 흘러내렸고 기왓골이 정연한데, 기와 끝에는 암막새와 수막새 기와가 표현되어 있다. 특히 수막새 기와에는 8엽의 연꽃무늬를 하나하나 새겨 넣었다. 처마 밑에는 실제 목조건축에서와 마찬가지로 연목과 부연이 표현되어 있고, 처마 아랫면에는 5곳에 비천상, 2곳에 향로, 나머지 2곳에 꽃무늬가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각 부분의 조각은 정교하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모든 모서리와 구석은 단호하게 각이 졌고 몸돌의 사천왕상은 옷매듭까지 여실하며, 지름이 2cm 남짓한 막새기와 안의 연꽃무늬는 정교하기 그지없다. 건립연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철감선사가 입적한 868년(경문왕 8)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9세기 말 작품으로 추정되며, 현재 국보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170호로 지정된 이 탑비는 현재 귀부(龜趺)와 이수만 남아 있으며 비신은 유실되었다. 신라 868년(경문왕 8)에 입적한 철감선사(澈鑒禪師)의 행장을 기록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마을에 전하는 구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비신이 없어졌는데, 탑비 부근의 땅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한다.
 

비신(碑身)이 없어 철감선사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조당집』이나 사자산문을 개창한 징효대사(折中, 825~900) 보인탑비 등에 부분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선사는 신라 원성왕 14년에 태어나 18세에 출가한 뒤 김제 귀신사(歸信寺)에서 화엄경을 읽으며 수학하다가 헌덕왕 17년(825)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남전보원(748~834)의 심인을 전승받은 후 문성왕 9년(847)에 굴산사를 개창했던 범일선사와 함께 귀국하였다. 풍악 장담사에 머무르면서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케 하고 징효대사에게 불법을 잇게 하여 강원도 영월지역에서 개창한 사자산문의 개조로 추앙되었다. 또한 선사는 말년에 주석한 쌍봉사를 중창하였으며 이곳에서 868년(경문왕 8) 4월 18일에 입적하였다. 경문왕은 시호를 철감(澈鑒), 탑명을 징소(澄昭)라 하사하였다.

 

귀부는 방형의 대좌 위에 있으며 높이가 아주 낮고 깨진 부분 없이 완전히 잘 남아 있다. 용두(龍頭)화된 귀부의 머리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입에는 둥근 여의주를 물고 있다. 머리 위에는 하나의 뿔이 돋아나 있으며 입가에는 활짝 펼친 날개 같은 것이 있다. 거북은 중앙에 복갑(腹甲) 형식의 중첩문이 정연하고 등에는 중곽의 육각구갑문(六角龜甲紋)이 선명하다. 갑(甲)의 바깥 선에는 귀갑문이 반으로 자른 듯 옆으로 선명하게 돌려져 있으며, 등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만들고 연문을 돌린 후 그 윗면에 3단의 각호(角弧) 괴임을 조각하였다. 귀부의 네 발은 발가락이 3개씩인데 오른쪽 앞발만 발가락을 위로 들고 있어 마치 귀부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수는 비신을 덮고 있는 밑면을 제외한 5면에 운룡문(雲龍紋)을 가득히 조각하였다. 전면에는 세 마리의 용이 좌우와 중앙 상단에 꿈틀거리고 있으며, 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몸을 뒤틀며 허공을 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수 정상부에는 보주형 귀꽃이 3개 솟아 있었으나 향 좌측의 것은 유실되고 없으며 그 자리에 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나머지 2개는 원석에 조각하였는데 유실된 부분만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별조하여 끼운 것으로 보인다. 이수 전면에 위패형의 액을 만들고 그 안에 '쌍봉산고철감선사비명(雙峰山故澈鑒禪師碑銘)'이라는 명문(銘文)을 서종(書縱)으로 2줄 음각하였다. 다행히 이 두 줄의 10자 명문이 남아 있어 탑비와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고, 조성연대도 철감선사 도윤(道允)이 입적한 868년 후로 추정하고 있다.

 

 철감선사(澈鑒禪師)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 798~868년)은 성은 박씨이고 호는 쌍봉, 현 황해도 봉산군 사람이었다. 여러 대를 호족으로 지내온 집안으로 원성왕(元聖王) 14년(798년)에 태어났다. 어머니 고씨가 꿈에 이상한 광채가 방안에 가득 비치는 것을 보고 놀라 깨니 태기를 느꼈다. 부부가 서로 말하기를 ‘꿈이 예사롭지 않으니 아들을 낳으면 승려가 되도록 합시다’라고 하였다. 태기가 있은 뒤 16개월 만에 탄생한 철감은 일취월장하여 그 모습이 학과 같이 빼어났고, 봉황의 자태와 기동(몸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고 풍채가 남달랐다. 그의 나이 18세 때에 양진에게 승려가 되기를 간절히 청하여 마침내 귀신사에서 출가, 10년간 화엄학을 익혔다. 이후 28세 때에 헌덕왕 17년(825년)에 사신행차하는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남전보원 선사를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니 첫눈에 도가 있음을 알고 말하였다. ‘우리 종의 법인이 몽땅 동국으로 가는구나.’(조당집 권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