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70 - 함월산 기림사 본문
메마른 나뭇가지에 마지막까지 가지 끝에 매달려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노라니 12월이 왠지 아쉽게 느껴지는 주말 저녁이다.
고교시절에 인연이 닿아 기림사 뒷계곡에 캠핑 갔던 때가 엇그제 같은데
다시 찾아간 기림사는 옛모습 그대로였으면 좋으련만 너무도 많이 변한 모습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젊은 시절의 나를 되돌아보며,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함월산 자락에 안겨있는 기림사를 거닐어 본다.
함월산(含月山) 기림사(祇林寺)는 동해에서 신라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였는데,
오랜 옛적에 이 길을 통해서 석탈해가 경주에 들어가 탈해왕이 되기도 하였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에 위치한 기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본사 불국사의 말사로서,
사적기에 따르면 기림사는 천축국(天竺國, 인도)에서 온 광유선사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로 불렀으며,
신라 선덕왕 12년(643)에 원효대사가 사찰을 크게 확장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기림사(祇林寺)라는 이름의 유래는 석가모니가 제자들과 함께 기원정사(祇園精舍)와 죽림정사에서
주로 수행을 하셨다. 특히 기원정사는 부처님께서 23번의 하안거를 하셨던 의미있는 곳이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이라 하는데, 경주 함월산 기림사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
붙여진 사찰이름이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681~692)이 만파식적을
감은사 앞 바다에서 얻어서 경주로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쉬었는데
이 때 용에게 받은 옥대의 고리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 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바람에 용이 날아간 자리에 용연(龍淵)이 생겼다고 한다.
감은사는 신문왕이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한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세운 절로
동해 바다에서 만파식적을 얻었어 서라벌로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에서 용이 승천하였다는 데서
이 곳 기림사가 감은사와 더불어 동해바다를 지키는 호국사찰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낙산이대성"조에 의하면 기림사 주지 각유(覺猷)가 몽고 침략 때,
낙산사에서 보관해오던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궁중에 보관할 것을 건의하고 있고,
"전후소장사리"조에 의하면 고려 예종 때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 치아를
몽고 침락시 강화로 수도를 옮길 때 잃어버렸는데 이를 다시 찾아 전각에 모셨다는
사건의 전말을 대선사 각유가 그대로 적어 두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정책하에서도 기림사는 세종 임금 대(재위기간:1418~1450)에 와서는
해인사, 단속사, 견암사와 더불어 경상도의 4대사찰로 130결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홍치(弘治) 14년(연산군 7년, 1501)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건칠보상좌상(보물 제415호)
좌대에서 기림사가 여전히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시에는 신라 때의
호국사찰의 성격을 이어받아 경주지역의 승병과 의병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대적광전 봉안된 비로자나불상은 임진왜란 직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1986년 이 불상의 복장에서 고려시대 사경을 비롯한 많은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기림사는 조선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31본산의 하나였으며,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대찰이였으나 교통이 불편할뿐 아니라 불국사의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은 사세가 역전되어 불국사의 말사가 되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위 내용 출처 : 전통사찰종합정보 자료 인용)
기림사 주차장 끝에 새로 세워진 일주문(一柱門)에는 산명과 사찰명을 밝힌
"含月山 祇林寺(함월산 기림사)" 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머금을 함(含)의 含月山(함월산)이란 명칭은
"달을 머금고 있는 산"이란 뜻이다. 반면에 토할 토(吐)을 쓴 토함산(吐含山)은 '머금었던 달을 토해내는 산'으로
가까이에 마주하고 있는 토함산과 함월산은 서로 달을 토해내고 머금는 관계의 산으로 지금까지
옛 신라의 서울 서라벌을 지켜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절집을 찾아갔을 떄 제일 먼저 만나는 일주문은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문이다.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 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며,
정면 1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한 다포식의 건물이다.
기림사(祇林寺)의 천왕문은 1987년에 중건하였으며 안에는 소조의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사찰로 들어가는 2번째 문으로서 천왕문 또는 사천왕문이라고도 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천왕문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즉 사천왕은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닌 일념(一念)이 숱한 역경에 의해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구도자에게
다시 한번 힘을 내서 해탈의 경지인 수미산 정상까지 오를 것을 독려하는 것이다.
문화재자료 제251호로 지정되어 있는 진남루(鎭南樓)이며, 건물양식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또한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진남루의 측벽은 판장벽으로 마감하였고 천왕문에서 보이는 배면에는 각 칸마다 두짝의 여닫이 판문을 달았다.
'남쪽(南, 왜구)을 진압하는 누각'이라는 뜻의 이 건물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무렵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당시 진남루는 동해를 통해 진입하는 왜군을 차단하기 위해 구국의 승병 군영이 설치된 곳이라는
기록도 전해 온다. 기림사는 전략적인 위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군사상의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석탑은 응진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는
비교적 완전한 탑이다. 하층기단은 갑석(甲石)부터 남아 있고,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우주(隅柱)가 있고
탱주(撑柱)는 한 개이고, 그 위에 놓여 있는 상대갑석의 밑면에는 부연이 있다.
또한 상층기단의 갑석 위에는 3단의 층급괴임이 있다. 각층의 탑신(塔身)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고
1층 탑신은 높지만, 2층과 3층의 체감률이 크기 때문에 탑 전체가 고준한 느낌이 든다.
각층의 옥개석(屋蓋石)의 층급받침은 4단이고, 추녀는 수평으로 끝부분의 전각만 약간 반전되었으며,
낙수면(落水面)은 완만하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가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탱주가 2개에서 1개로 줄어들고,
지붕돌받침이 4단인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1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응진전은 정면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장방형의 자연석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올려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전각의 앞뒤기둥은 배흘림기둥을 세웠는데 측면의 기둥은 네모기둥을 세웠다.
공포의 짜임은 외2출목 내2출목이다. 응진전 건물로서는 다소 규모가 큰편에 속하는 기림사 응진전은
5량집으로 정면의 각 칸마다 창호는 이분합문을 달았다.
기림사 응진전은 18세기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갖추고 수평적 느낌이 강한 단아한 집이다.
법당 내부의 앞면에 만들어진 계단식 불단의 중앙에는 석가삼존불을 봉안했다.
좌우에 16나한상을 두어 석가모니불의 설법광경을 나타냈고 그 주변으로 오백나한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좌정해 있다. 나한상들은 석재인데도 상호는 무척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맞배지붕에 다포식 건물인 약사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방형의 외벌대
기단위에 자연석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공포의 짜임은 외2출목 내3출목이다.
약사전 내부 불단 중앙에는 약사여래불을 봉안했다. 이 약사불은 일반적인 양식과는 달리 약합을
들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좌우협시보살도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아니다.
이것은18세기 이후 대웅전이 대적광전으로 바뀌는 변화를 겪으면서 약사전의 불상과 불화 등에도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보물 제833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정면5칸, 측면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장방형의 낮은 기단위에 자연석 막돌의 초석을 놓고 배흘림이 약간 있는 기둥을 세웠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 내4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끝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내부 공포에는
연봉(連峰)을 초각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공포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 어간과 협간은 사분합 소슬빗살꽃창살을 달았고 측간창호는 삼분합문을 단 조선후기 건물이다.
1997년, 기림사 대적광전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4점의 상량묵서에서 1629년, 1755년 1785년 1978년에
대적광전 건물을 중창하거나 중수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건륭이십년명(乾隆二十年銘) 상량묵서로 볼 때, 건륭(乾隆) 연호는 청나라 연호로 1735~1795년 사이에
쓴 연호이므로 건륭이십년은 1735 + 20 = 1755년에 중수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적광전의 내부에는 장방형의 거대한 불단이 후불벽 앞에 있고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석가모니불을 협시한 소조삼신불을 봉안했다.
닫집은 생략되고 빗반자에 운룡을 장엄하게 채색하여 그려넣었다.
관음전 건물은 앞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불교의 자비사상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을 부속전각에 모셔놓은 법당을 관음전이라고 하는데
이곳 관음전에는 천수관음보살입상을 봉안하였다.
천수관음보살은 천개의 팔과 천개의 눈을 갖추고 있으며, 육도 중에서 주로 지옥을 관장하고 있고,
관음 중에서도 가장 힘있는 구제자로 신봉되고 있는 관음보살이기도 하다.
삼천불전은 앞면 7칸, 옆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중앙의 불단에 석가삼존상을 주불로
모시고, 그 주위에 청자로 조성한 삼천불을 봉안하였다.
기림사의 명부전은 유서 깊은 전각이다. 처음 조성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799년(정조 23)에 명부전을
이전했던 사실이 있고, 1802년(순조 2)에는 단청을 새롭게 하기도 하였다.
한편 기림사 함월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명부 시왕도는 회화적으로나 양식적으로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서
이 무렵에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에서 말미암아 기림사는 지장보살의 영험이 뛰어난 곳으로
유명하였으며 지금도 지장예참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삼성각은 1987년에 불상없이 불화만으로 삼성을 봉안했다.
중앙의 칠성탱화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독성탱을, 오른쪽에는 산신탱화를 모셨다.
요사채
범종각
보물 제415호인 조선시대의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이다.
건칠불은 진흙으로 형체를 만들고 그 위에 삼베를 감은 다음, 다시 진흙을 단단하게 발라 고정한 후
속을 빼내는 방법으로 조성한다. 이 위에 도금을 입히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상호는 둥근 편인데, 지그시 감은 눈은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고, 오뚝한 코와 자연스럽게 다문 입이
단단한 인상을 준다. 또한 둥근 꽃 모양의 귀걸이와 가슴에 길게 늘어뜨린 세 가닥 장식의 목걸이는
보살상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한다.
체구에 비해 자그마한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왼손은 왼쪽 무릎에 편안하게 얹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어깨에서 넓게 펼쳐 가슴을 보이도록 하였다.
군의(裙衣)는 가슴까지 올려 목걸이의 장식과 맞닿았고, 띠매듭으로 마감하였다.
아래쪽은 길게 내려 발목까지 덮었고, 옷주름을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보살상과 함께 전하는 목조대좌에서 1501년(연산군 7)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성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보살상과 대좌가 동시에 제작된 것인지 알 수 없고,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때가 조성시기인지,
혹은 보수한 시기인지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다만 비례가 부족하고 조선초기의 다른 불상에 비해 풍만한 신체를 지녔다는 점에서 원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므로 조성시기는 1501년보다 앞설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간결함과 생략의 조형미를 주조로 하면서도 보살의 화려함을 아울러 지닌 관음보살상이다.
이 건물은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년)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경주시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 곳이라고 한다.
1670년(현종 11) 경주 남산의 용장골에 창건되었던 매월당사를 1878년(고종15)에 이곳으로 옮겨와
다시 지었으나 그 후 퇴락되어 1998년 경주시에서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선생은 세종 17년(1435년) 한양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단종 3년(1455년)에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여 전국을 유람하다가
세조 10년(1465년)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
그 후 성종 2년(1471년) 경주를 떠나 일시적으로 환속하였으나 성종 24년(1493년) 충청도 홍산(鴻山)의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의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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