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79 - 경주 분황사 본문
온 대지에 봄내음 물씬 풍겨오는 향기 가득한 계절! 유채꽃 향기 그윽한 꽃길을 걸으며 자연이 베풀어 주는 축복에 감사함을 느낀다. 오랜만에 영천에 계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대구 여동생 부부와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가족들과 함께 찾은 경주의 유채꽃밭과 분황사의 정경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분위기로 다가왔다. 코 끝을 스치는 유채꽃 향기를 맡으며 가족과 함께한 나들이는 정말 행복한 하루였다.
경주시 구황동 312번지에 자리한 분황사(芬皇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황룡의 출현으로 궁궐을 짓다 황룡사를 세웠던 황룡사지(皇龍寺址)와 잇닿아 있는 분황사에는 국보 제30호 모전석탑(模塼石塔)과 화쟁국사비적(和諍國師碑蹟),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8각 석정)이라는 우물, 경북 문화재자료 제319호 약사여래입상 등이 있으며, 탑의 부재를 비롯한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이 한켠에 쌓여 있다.
『속고승전(續高僧傳)』을 보면 한 때 왕분사(王芬寺)라고도 불렀던 분황사는 634년(선덕여왕 3)에 건립된 신라 최고(最古)의 사격(寺格)을 갖는 사찰 중의 하나였다. 『삼국유사』에는 분황사가 이른바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칠처가람(七處伽藍) 중의 하나로서 창건연대와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조성된 탑 가운데 하나인 모전석탑이 세워졌다.
선덕여왕은 중국 당(唐)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慈藏) 스님을 주석 하도록 하였으며, 원효(元曉) 스님도 이곳에 머무르며 『화엄경』의 내용에 대해 주석을 단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1101년(숙종 6)에 원효 스님을 기리는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세워졌다. 이 화쟁국사비는 비석은 없어지고, 지금은 비석을 꽂았던 대좌인 비좌(碑座)만 남아 있다.
1998년 3월 24일 보광전 개축을 위한 천장부 조사 중 『분황사상량기』 및 『분황사중창문』을 발견하면서 조선시대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분황사상량기』는 종도리에 먹글씨로 씌어진 것으로서 1616년(광해군 8)에, 『분황사중창문」은 1680년(숙종 6)에 각각 작성되었다. 특히 『분황사중창문』은 종이에 먹글씨로 쓴 것인데 1916년에 보광전을 중수할 때 종도리 한 쪽을 파내고 그 안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6년 중수 당시에 종이에 써서 종도리에 넣은 『분황사보광전중건상량문』도 연혁을 살피는데 있어 도움을 준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石塔)은 돌을 흙으로 구워 만든 전돌(塼石)처럼 깎아 만들어 쌓은 석탑으로, 전돌로 쌓은 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부른다. 첨성대(瞻星臺)와 같이 석오원(昔五源)이 감독하여 9층으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3층만 남아 있으며, 구조가 특이하여 우리나라에서 다른 예가 없어 현재 국보 제30호 "분황사 석탑"으로 지정되었다.
탑의 전체 높이는 930m이며, 기단은 약130cm,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이다. 밑에는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 밑이 약 36cm 높아져 경사를 이루고 있다. 기단 네 귀퉁이에는 사자(獅子)와 물개 등의 석상을 배치했고 제 1층의 서쪽면에는 두 짝으로 된 석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감실(龕室)이 있다. 감실의 좌우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세워져 있는데, 삼국시대 조각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분황사 석탑은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 1915년의 석탑 수리시에 2층 탑신부와 3층 탑신부 사이에서 석제 사리함(舍利函)이 출토되었고, 사리함 안에서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과 숭녕통보(崇寧通寶) 등의 고려시대 동전이 출토되어 고려 중엽에 개축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석함에서는 여인의 소지품인 가위, 금 또는 은으로 만든 바늘, 실패, 금으로 만든 방울, 향목(香木) 등이 나왔다. 이는 분황사가 선덕여왕 때 건립되었기에 여왕의 소지품을 간직한 것이라고도 한다.
모전석탑의 네 모퉁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석수상들이 사방을 지키고 있다. 그 중에 어느 한쪽 방향을 응시하고 있는 사자상의 모습이다. 이 사자상의 뒤쪽에는 동쪽 바다를 바라보는 물개상을 조각하여 놓았는데, 어떤 의미로 물개상을 조성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탑의 1층 각 면에는 감실(龕室)을 만들고 두 짝의 석문을 달았다. 각 면의 감실 좌우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세워져 있는데, 삼국시대 조각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보광전(普光殿)의 건축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에 측면에 풍판을 단 주심포식 건물이다. 1680년에 불국사를 포함한 주변의 8개 사찰에서 힘을 모아 중창하였다. 보광전 안에는 약사여래입상과 후불탱, 칠성탱, 신중탱, 산신탱, 원효 스님의 영정 등이 봉안되어 있다.
경북 문화재자료 제319호 "분황사 약사여래입상"은 보광전에 모셔져 있으며 왼손 위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삼십구년을미사월이십오일조성야(乾隆三十九年乙未四月二十五日造成也)라는 붉은 글씨가 남아 있어 조선 영조 50년(1774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육감적이어서 세속적인 느낌을 주며, 때로는 어린이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옷은 양 어깨를 걸친 통견이며, 옷주름의 표현은 두껍게 처리하여 장대한 신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알 수 있다. 불상 앞에 놓인 석재 불단은 사천왕상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탑신석(塔身石)을 받침으로 삼고 있다. 전체적인 조형기법과 보광전 보수시 발견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불산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분황사 석정(石井)은 신라시대에 만든 화강암 우물로, 현재도 물이 나와 사용되고 있다. 우물의 겉모양은 높이 70cm의 팔각이고 내부는 원형인데, 팔각은 부처님이 가르친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하며 원형은 원융(圓融)의 진리를 상징하며, 우물 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를 뜻한다. 현재 남아 있는 신라시대 우물 가운데에서 가장 크고 우수한 것으로 손꼽힌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護國) 용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 11)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서 빼앗아 왔다고 한다. 그 뒤로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芬皇寺 和諍國師碑趺) -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이 남아있는데,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분황사 경내 한켠에 모아 놓은 각종 유물 잔재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분황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당간지주가 서 있는데, 바로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慶州 九黃洞 幢竿支柱)"이다. 현재 경북 유형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이며 높이는 360cm이다.
분황사의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기둥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이 특이하게도 거북모양이다. 기둥 안쪽면의 아래·중간·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양 기둥 사이에 거북받침돌이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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