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81 - 금수산 정방사 본문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81 - 금수산 정방사

徐白(서백) 2012. 5. 14. 14:53

 

신록이 우거진 5월의 둘째 일요일. 상쾌하고 싱그러운 오월의 아침에 사단법인 미소원 문화유적답사회를 인솔하여 충북 제천의 정방사를 찾아 떠났다. 맑은 마음으로 처음 찾아가는 아름다운 정방사를 상상하며 금수산을 오르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정방사가 위치하고 있는 이 산은 원래  백운산(白雲山), 백야산, 백암산 등으로 불리었는데, 단양군수로 부임해온 퇴계 이황 선생께서 가을단풍이 든 이 산의 아름다움에 반해 '비단 錦' '수놓을 繡'자를 써서 錦繡山(금수산)으로 고쳐 부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금수산 남쪽 마을이름이 백운동인 것은 옛 산이름의 흔적이다.

 

정방사(淨芳寺)는 충북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52번지의 금수산(錦繡山, 1,016m) 자락 신선봉(845m)에서 청풍방면 도화리로 흘러 내린 능선상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깨끗할 淨’은 ‘맑다’는 뜻이고, ‘꽃다울 芳’은 좋은 냄새, 즉 ‘향기’를 뜻하므로, 맑고 향기로운 절이란 의미를 지닌 정방사(淨芳寺)는 신라 문무왕(662년)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로, 더 없는 절경을 뽐내는 충북 제일의 관음도량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산방사(山芳寺)로 소개되 있으며, 1954년에 쓴『정방사 창건연혁기』와 1969년에 발간된『제천군지』에도 의상스님의 창건설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662년은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화엄학을 공부하던 시기므로 의상대사의 창건설에는 의문이 있다. 하지만 의상스님이 창건한 사찰의 공통적인 특징은 물이 귀한 깊은 산속에 절을 짓거나, 관음신앙과의 밀접한 관련 등으로 볼 때, 정방사 창건에도 관계를 가지고 있어 시대의 착오로 보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데, 조선중기까지 그 사맥이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정방사는 한때 산방사로, 금수산은 백운산이라는 다름 이름으로 불러진 적도 있다. 이후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1825년 현재 법당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법당 건물의 기와에서 '무오년'이란 간지와 ‘충청북도청풍금수산정방암’이란 글과 '도편수이대운'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19세기 중반인1838년(헌종 4)에 법당을 중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방사의 창건 유래를 보면, 신라시대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정원(淨圓)은 십여 년을 전국을 돌아 다니며 공부를 한 후에,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펴고자 스승을 찾아 나셨다. 수소문 끝에 스승이 원주의 어느 토굴에서 수행하고 계심을 알고 대사를 뵈러가니, 스승은 큰 반석에 앉아 정진을 하고 계셨다. 정원은 스승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여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자 하옵니다. 십여 년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하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간을 떠나지 않았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말씀 드리고 삼배 합장 하니, 그제서야 스승인 의상대사께서 "너의 원이라면 이지팡이의 뒤를 따라가다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지어 불법을 홍포하여라, 그리고 산 밑 마을에 윤씨 댁을 찾아가면 너의 뜻을 이루리라" 하셨다.

 

정원이 고개를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니 스승께서 던진 지팡이(석장)가 하늘에 둥둥 떠서 남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며칠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뒤를 따르니 지금의 정방사 자리에서 멈추어서는 것이 아닌가. 산세는 신령스러워 흡사 대범천이 머무는 궁전인 범왕궁(梵王宮)의 자리와도 같았다. 정원은 즉시 산 밑 마을의 윤씨 댁을 찾아 그 뜻을 전하니 주인은 어젯밤 꿈에 의상이라는 스님이 흰구름을 타고 우리 집에 오셔서 "내가 그대의 전생(前生)을 잘 알고 있고 불연(佛緣)이 있어 말하는 것이니 내일 어떤 스님이 오거든 절 짓는데 도와 주길 바라오" 하더니 구름을 타고 가셨습니다"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방사는 창건(創建)되었고, 사찰의 이름은 정원스님의 "정(淨)" 자와 아름다운 산세를 지녔다는 뜻의 "꽃다울 芳(방)"자를 써서 정방사(淨芳寺)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정방사 경내로 들어서면, 초입에 있는 범종각이다. 정면과 측면 각1칸에 사모지붕의 범종각은 근래(2002년)에 신축한 것이다. 사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기둥에 낙양각(落陽刻)이 장식되어 있다. 

 

 

당초문을 조각하여 건물의 기둥이나 창방을 장식하는 것을 낙양각(落陽刻)이라 하는데, 궁궐이나 사찰 건물 등에서 이 수법을 주로 쓴다. 즉 낙양각을 액자로 하고 그 안에 자연 풍경을 차경(借景)하여 그림으로 담아내 즐기고 감상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할 따름이다. 몇개월 전에   KBS 2TV '1박2일'에서 유홍준 교수가 경회루 안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걸려있다"며 그림을  찾아낼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수근이 그 그림을 찾아낸 적이 있다. 실제 액자속 그림이 아닌  경회루 낙양각을 액자로 한 경복궁 풍경이 정답이었다. 

 

 

정방사의 원통보전과 나한전, 유운당, 청풍루가 한 축을 이루는 아래쪽으로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다.

 

 

청풍루와 유운당, 원통보전, 나한전 등의 전각들이 거대한 암벽 아래 좁은 공간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

 

 

청풍루(淸風樓) 좌측에 주련(柱聯)이 걸려있는 건물은 유운당(留雲堂)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에는 툇마루를 가설하였으며, 종무소 겸 요사채로 쓰고 있다. 건물의 정면에는 유운당(留雲堂)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에는 송나라 대의 서화가인 미불(米芾)의 글씨를 복각한 주련 4기가 걸려 있다.

 

유운당(留雲堂) 주련(柱聯)의 내용

山中何所有(산중하소유)  산 가운데 이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嶺上多白雲(영상다백운)  산봉우리 위에 흰구름 머물러 있네

只可自恰悅(지가자흡열)  다만 나 홀로 기뻐하고 있을 뿐

不堪持贈君(불감지증군)  님(임금)에게 까지 바칠 수가 없구나.

 

 

관세음보살이 그 사찰의 주존불로 봉안될 때는 원통보전(圓通寶殿) 편액을, 그 사찰의 부속전각에 봉안될 경우에는 주로 관음전이라는 편액을 붙인다.

 

 

정방사 주 법당인 원통보전이다. 지붕 기와의 명문을 통해 1838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암벽 아래에 거의 붙어 있으며, 전면에 툇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건물의 중앙에는 원통보전(圓通寶殿) 편액을, 좌우로는 유구필응(有求必應)과 정방사(淨方寺) 편액이 걸려 있다.   

 

                  

 

원통보전 건물 앞 뒤로는 많은 주련이 걸려 있는데, 건물 뒷편에 걸린 주련의 내용을 보면, 

高無高天還返底(고무고천환반저)  높음이 하늘보다 높을 것 없으나 도리어 밑으로 돌아가고

淡無淡水深還墨(담무담수심환묵)  맑음이 물보다 맑은 것 없으나 깊음이 도리어 검다.

僧居佛地少無慾(승거불지소무욕)  수행자가 불국정토에 있으니 조금도 욕심이 없고

客入仙源老不悲(객입선원노불비)  나그네가 신선 사는 곳으로 들어서니 늙음이 또한 슬프지 않네.

 

 

 

원통보전에서 관음보살님께 정성을 다해 사시예불을 올리는 스님의 모습.

 

 

원통보전 내부 불단 위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관음보살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며, 후불탱은 아미타후불탱으로 1928년에 금어 관하종인(觀河宗仁)스님이 조성 봉안하였고, 불단 우측의 칠성탱은 1900년에 금어 영운봉수(永雲奉秀)스님이 조성하였으며, 그 옆으로 1928년에 종인스님이 조성한 신중탱이 걸려 있다.

 

정방사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그 안에서 나온 유물들로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전형적인 조선 중기 보살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상호는 몸에 비해 작은 편이며, 머리 위 보관에는 작은 부처가 화불로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신체는 비례가 알맞으나 경직되어 있으며, 천의는 오른쪽 어깨를 반달형으로 덮은 형식을 보인다.

 

어깨는 상호에 비해 넓은 편으로 목에는 간략화된 2줄의 목걸이를 걸고 있고, 앞가슴에는 가로로 생긴 군의의 주름이 보인다. 수인은 왼손은 들고 오른손을 내리고 있어, 이 보살상이 관음보살상으로 단독 조성된것이 아닌 아미타삼존불의 좌협시로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상 복장에서는 삼존불을 조성하였다고 밝히는 기록과 대불정수능엄신주,묘법연화경, 그리고 범어로 된 다라니경이 출토되었다.

 

본존상과 우협시보살상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발원문(發願文)'강희이십팔년...(康熙二十八年...)'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성 연대가 조선 숙종 15(1689)임을 알 수 있다. 즉 강희는 중국 청나라 강희제(성조)의 연호로 1662∼1722년까지 사용되었으므로 1662 + 17 = 1689년이 된다. 전반적으로 정방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인상도 단아한 아름다운 보살상으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17세기 말 불상연구에 있어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원통보전에 걸려 있는 정방사(淨方寺) 편액은 석정(石丁) 안종원(安鍾元, 1874~1951)이 쓴 글씨이다. ‘깨끗할 淨’은 ‘맑다’는 뜻이고, ‘꽃다울 芳’은 좋은 냄새, 즉 ‘향기’를 뜻하므로 정방사(淨芳寺)는 맑고 향기로운 절이란 의미를 지닌 사찰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물론 창건설화에 의하면 사찰의 이름은 정원스님의 "정(淨)" 자와 아름다운 산세를 지녔다는 뜻의 "꽃다울 芳(방)"자를 써서 정방사(淨芳寺)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불교경전의 화엄경에 나오는 말로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뜻의 유구필응(有求必應) 편액(扁額)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로 측면에는 풍판을 단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어칸에는 2분합의 띠살문을, 좌우협칸은 1분합의 띠살문을 달았고, 나머지 삼면(三面)은 판벽(板壁)으로 처리하였다.

 

 

나한전 불단 중앙에는 석가모니후불탱을, 좌우로는 나한탱을 봉안하고, 그 앞으로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또한 측벽에는 인왕상과 화조화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특히 우측(향좌)에 있는 나한탱은 정방사에서 연대가 가장 오래된 탱화로 1900년에 금어 영운(永雲)과 봉수(奉秀)외 4인이 조성한 것이다.

 

 

나한전 판벽의 인왕상 그림

 

 

나한전 판벽의 화조도(花鳥圖)

 

 

 

근래에 새로 신축한 정면 2칸 ,측면 1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한 지장전이다.

 

 

지장전 내부에는 자연암벽에 선각(線刻) 지장보살입상을 조성하였고, 그 앞에는 개금한 석조지장보살입상을 봉안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산신각 건물은 근래에 신축한 것이다. 건물 내부는 불단을 설치하고, 칠성탱을 중심으로 좌우로 독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산신각의 중앙에 모셔진 칠성탱은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한 모습이다. 독성탱은 1900년에 금어 영운(永雲)과 봉수(奉秀)외 4인이 조성한 것이다. 산신탱은 1955년에 혜봉스님이 조성한 것이다.

 

 

 

산 아래에 펼쳐진 청풍호를 내려 보고 계시는 해수관음보살입상이다. 화강암의 연화대좌 위에 자리한 관음보살상은 불모 김혜영(金慧永)이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