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83 - 소백산 비로사 본문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83 - 소백산 비로사

徐白(서백) 2012. 5. 25. 23:22

 

임진왜란 당시 일천여 명의 의승군들이 강원도 영월로 진격하던 왜병들과 맞서 싸우다 의승군 전원이 순국하였다는 슬픈 역사가 전해지는 사찰. 오후 늦게 찾아간 조용하고 한적한 사찰 비로사(毘盧寺)는 바로 지상낙원이란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다. 주차장에 내리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자산홍꽃들은 사찰 경내까지 온통 붉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아름답고 조용하며 소담스러운 사찰 비로사가 의승군들의 영원한 안식처로 보전되기를 기원한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산13번지 소백산 자락에 있는 비로사(毘盧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이다. 683년(신라 신문왕 3)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 사찰로,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小白山寺)라고도 불렀다. 신라 말에는 진공(眞空) 스님이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그 때 고려 태조가 방문하여 법문을 듣고 진공 스님을 매우 존중하였다. 그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진공 대사라는 시호와 보법(普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고려 인종 4년(1126년) 인종이『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으로 하여금 불치아(佛齒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385년(우왕 11) 환암(幻庵)이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세조 때 복전(福田) 5명을 두어 『화엄경』을 강의하도록 하였고, 1468년(예종 1) 김수온(金守溫)이 사비로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또한 비로사는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부산진(釜山鎭)에 상륙하여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던 왜병의 일부 부대가 강원도 영월로 진격하기 위하여 지름길인 비로사 앞을 지나 가려하자 이를 저지하려던 1,000여 명 의승군과 격전을 벌였고, 결국 의승군 전원이 순국하고 비로사도 불 타고, 당시 남은 것이 바로 대웅전 안의 두 부처님과 당간지주, 진공대사 탑비만 남았다. 1609년(광해군 1) 중건과 1684년(숙종 10)에 중창이 있었지만 1908년 갑오경장 때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1919년과 1927년, 1932년에 중건 중수가 있었는데,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다시 전 당우가 소실되었다. 최근에 다시 중건 불사가 계속되어 현재의 가람 모습을 다시 갖추게 되었다.

 

 

비로사 주차장에 내리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산홍 꽃밭이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비로사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월명루(月明樓) 편액

 

 

적광전으로 오르기전에 근래에 새로 지은 월명루(月明樓)가 자리하고 있으며, 우측에도 최근에 신축한 보연당(寶蓮堂) 편액이 걸린 요사채가 위치하고 있다.

 

 

비로사 경내에 흩어져 있던 각종 석조물의 잔재들을 모아서 만들어 놓은 석탑이다.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정말로 어색하면서 이상한 석탑이 적광전 앞에 버티고 서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비로사의 중심 법당인 적광전(寂光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로 1995년에 건립하였다. 내부 불단 위에는 보물 제996호로 지정된 석조 비로자나불좌상과 아미타좌상을 나란히 봉안하였는데, 현재 개금이 되어 있다. 불화로는 후불탱을 비롯하여 관음탱과 신중탱이 걸려 있다.

 

 

적광전(寂光殿) 편액

 

 

적광전(대적광전)에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법당에 3분의 부처님이 계셔야 하는데, 왜 두 부처님만 모셔져 있을까. 향(向) 왼쪽에 아미타부처님이, 오른쪽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이 사이좋게 앉아 계신다. 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부처님과 석가모니부처님 그리고 노사나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그런데 노사나부처님과 석가모니부처님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아미타부처님이 어떻게 적광전에 계시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또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진 전각은 미타전이나 극락전인데, 왜 남의 집에 사시는지 궁금하다.

 

 

모든 부처님의 진신(眞身)인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의 부처님이다. 보물 제966-2호 “영주 비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모양으로 지권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약간 긴 얼굴, 길게 내려온 귀, 뚜렷하게 표현된 삼도, 단정한 얼굴과 안정된 신체의 형태로 아미타불과 비슷한 작풍을 드러낸다. 두 어깨를 감싼 옷은 얇게 빚은 듯한 평행계단식 주름으로 자연스럽게 보인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하대 9세기 불상의 양식을 보인다. 현재 팔각연화대석 위에 모셔져 있으며, 본래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었으나 광배는 깨진 채 버려졌다.

 

 

보물 제966-1호 “영주 비로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 광배와 대좌를 상실한 아미타불좌상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국토를 지난 곳에 있는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은 수명장수하고 극락왕생을 보장하며 자비를 베푸는 분이다. 장방형의 얼굴에 삼각형으로 높게 솟은 육계, 늘어진 귀, 목에는 삼도가 뚜렷히게 보인다. 당당하게 보이는 어깨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을 하고 있는데, 왼쪽 팔에 감겨진 옷주름은 약간 어색해 보인다.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는 아미타구품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측면에는 풍판을 단 나한전(羅漢殿)은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들인 16나한을 봉안한 법당이다. 원래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고승을 지칭하는 말이였으나, 온갖 번뇌를 끊고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의 이치를 터득하고 아라한(阿羅漢)과를 증득하여 마땅히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큰 성인이라는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나한전(羅漢殿)에 모셔진 석가삼존상

 

 

 

나한은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인이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이 있으며, 부처님으로부터 미륵불이 출현할때까지 중생을 교화하라는 수기를 받은 분들이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와 16나한상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하며, 석가삼존불과 500나한을 모신 전각은 나한전이라고 하는데, 이곳 비로사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을 봉안하고 나한전(羅漢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요사채로 사용하는 반야실(般若室)

 

 

망월당(望月堂) 앞마당에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모란이다. 중국 원산인 모란에 관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오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이 임진년(재위기간 632년∼647년)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16년 동안에 미리 안 세가지 일(知機三事)이 기록되어 있다. 그 첫 번째 이야기가 모란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날 당 태종(이세민)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모란꽃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온 것을 보고는 선덕여왕은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고 말하면서 씨를 뜰에 심도록 하였는데,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여왕의 말처럼 향기가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놀랍게 여겨 여왕에게 어떻게 모란꽃에 향기가 없을 것을 알았느냐 물으니 왕이 대답하길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매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의 배우자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 태종이 삼색의 모란꽃을 그려 보낸 것은 신라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진성여왕 등 세 여왕이 있을 것을 미리 알아 맞춘 지혜로움도 함께 설명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은 실제 향기를 품고 있는 꽃이다. 모란은 부귀를, 나비는 질수(耋壽늙은이질)라고 하여 80세를 상징하므로 모란과 나비를 같이 그리면 80세까지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뜻이 된다. 즉 부귀를 누리는 시기를 제한하므로 모란과 나비를 같이 그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요사채에 걸려 있는 '망월당(望月堂)' 편액

 

 

삼성각(三聖閣)의 건물양식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근래에 지었다. 산신, 칠성, 독성은 인간의 복을 관장하는 신들이다. 칠성여래, 독성(나한), 산신을 함께 모신 전각을 삼성각이라고 한다. 불교 고유신앙이라기 보다는 도교나 토착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경우이다. 

 

 

망월당(望月堂)에서 계단을 내려오다 만난 '금낭화(金囊花)'이다. 여러해살이풀로 양귀비과에 속하는 이 꽃은 '며느리주머니' 혹은 '며늘취'라고도 부른다. 금낭화는 깊은 산이나 계곡에서 주로 자라며, 꽃은 5~6월에 줄기 끝에 여러송이가 주렁주렁 달린다. 심장 모양의 빨간색 꽃이 예쁜 복주머니(囊)처럼 생기고 그 안의 암술과 수술이 노란 금화(金貨)가 들어 있는 것 같다고 하여 '금낭화(金囊花)라고 부른다.

 

 진공대사에 관한 이야기

비로사(毘盧寺) 창건 직후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진정(眞定) 대사가 비로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진정은 출가 전 군졸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틈틈이 품을 팔아 가난하게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다. 하루는 한 스님이 진정의 집으로 와서 절을 짓는 데 쓸 쇠붙이를 보시해 달라고 청하므로 그의 어머니가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다리 부러진 솥은 시주하였다. 진정은 어머니의 보시를 매우 기뻐하며 질그릇에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의상대사가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효도를 다한 다음 출가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 바로 출가하도록 엄하게 말씀하였고, 그러한 어머니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3일 만에 태백산으로 가서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렇게 공부한 지 3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어 명복을 빌었고, 나중에 그러한 이야기를 의상에게 전하였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소백산 추동(錐洞)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진정의 꿈 속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서 환생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한다. 소백산 추동은 곧 지금의 비로사 옆 계곡을 말하며, 계곡 상류에는 비로폭포가 있고 부근에 의상 대사가 공부하던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진공대사(855∼937)는 경주 출신으로 속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신라의 왕계인 확종(確宗)이고 어머니는 설씨(薛氏)이다. 가야산(伽倻山)에 입산하여 선융(善融)의 제자가 되어 874년(경문왕 14) 가야산 수도원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삼장(三藏)을 연구하였다. 937년(고려 태조 20) 태조의 후삼국 통일을 축하하고 열반하니, 태조가 시호(諡號)를 내리고 939년에 이 탑비를 세웠다. 시호는 진공이며, 탑호는 보법이다. 또한 경북 유형문화재 제7호 “영주 삼가동 석조당간지주(榮州三街洞石造幢竿支柱)”도 바로 옆에 있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4호 '진공대사 보법탑비(眞空大師普法塔碑)'는 신라 말 고려 초에 비로사에 주석하였던 진공대사의 탑비이다. 나말여초의 승려인 진공(眞空)의 탑비로 고려 태조 22년(939년)에 조성되었다. 비문은 최언위(崔彦僞)가 짓고 글씨는 구양순체 해서로 이환추(李桓樞)가 썼다. 비석의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산(山) 모양의 머릿돌을 얹은 모습인데, 비몸이 갈라져 일부가 파손되었다. 거북받침은 새겨진 조각이 얕아 둔해 보이며 등 중앙에 비를 꽂는 네모난 홈을 마련해 두었다. 머릿돌은 구름과 용무늬를 새겨 놓았는데, 화려하긴 하나 깊이 새긴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