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84 - 문수산 축서사 본문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84 - 문수산 축서사

徐白(서백) 2012. 6. 6. 09:23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1번지. 문수산(文殊山, 해발 1,206m) 기슭 해발 800m 고지의 명당에 자리잡은 축서사는 축서사(鷲棲寺)는 대한불교조계종 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신라(新羅) 제30대 문무왕(文武王) 13년(서기 673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절이다.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스님이 어느 날 밤 지금의 개단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다니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축서사의 창건이다. 이 때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 해서 문수산이라 한듯 하다. 의상대사께서는 3년 뒤에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제일도량(東國華嚴第一道倆)인 부석사(浮石寺)이다.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축서사란 이름은 독수리 축(鷲), 살 서(棲), 즉 독수리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지혜는 바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보살님을 뜻하므로 축서사란 이름을 붙인 듯하다. 한편 험준한 뒷산세가 풍수지리학상으로 독수리가 날려는 형국이므로 축서사라고 했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고려 중기 전성기에는 건물이 30여 동, 대중은 200여 명, 토지는 축서사 스님들이 축서사 땅이 아니면 밟고 다니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부찰이었고, 공양을 지으려고 쌀을 씻으면 뿌연 뜨물이 10리 밖까지 내려갈 정도였다고 한다. 보광전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광서(光緖) 7년(서기 1875년)에만 해도 대웅전(大雄殿), 보광전(普光殿), 약사전(藥師殿), 선승당(禪僧唐), 동별당(東別堂), 서별당(西別堂), 청련당(靑蓮堂),백화당,(白花堂), 범종각(梵種閣)등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다.

 

산내 암자도 상대(上臺), 도솔암(도率庵), 천수암(天水庵) 등이 있었고, 당시 대중이 44명이나 되었다.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 하여 기도처로서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1905년)과 정미조약(丁未條約, 1907년)으로 왜구의 속국화되는 것을 분개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무장 봉기하여 항일 투쟁할 때, 이곳에도 일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으로 방화하여 대웅전 1동만 남기고 전소시켰다.

 

이때 천년 고찰로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축서사는 하루 아침에 잿더미가 되었고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던 수 많은 유물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한동안 폐사로 있다가 일제 말기에 삼성각을 신축하고 요사 2동을 1957년과 1982년에 각각 신축하였으며, 1987년에 무여(無如) 스님이 주석하시면서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999년에 대웅전을 완공하고, 석가모니 불상과 문수보살상과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적묵당(寂默堂)을 준공하면서 현재까지 불사가 이루어졌다.

 

축서사(鷲棲寺)를 품고 있는 문수산에는 한때 수 많은 사찰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지고 산골짜기 여기저기에 불적(佛跡)만 남아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현재 축서사의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보물로 지정된 보광전 비로자나불좌상 및 광배, 좌대와 괘불이 있으며 지방문화재자료로는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문수산 축서사라는 팻말과 범종각 건물, 그리고 누각으로 된 보탑성전 건물이다.

 

 

범종각에는 범종(梵鍾)을 포함해서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 등의 '불전사물(四物)'을 달아 놓고, 아침 저녁 예불 시에 법고, 운판, 목어, 범종 순으로 친다.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이다. 법고는 축생 제도와 이땅에 사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친다.

 

운판은 청동 또는 철로 만든 넓은 판으로 가장자리에는 승천하는 용이나 옴마니반메훔 등의 진언을 새기기도 한다. 옛날에는 부엌에 달아 놓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해 쳤으며, 구름 모양을 한 것은 구름이 비를 머금고 있으므로 화재 예방을 하기 위해 부엌에 달아 놓았다는데 근래에 와서 불전사물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공중을 날아다니는 날짐승들을 제도하고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친다. 목어는 나무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불전사물로 물 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치고, 범종은 지옥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친다.

 

 

정면과 측면 각 3칸에 팔작지붕을 한 범종각은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아주 큰 전각의 건물이다.

 

 

범종각(梵鍾閣) 편액은 석당(石堂) 김종호 선생의 필적이다. 석당(石堂) 김종호(金宗鎬,19011985)선생는 영주시 휴천3동 아천마을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작고 하셨다. 석당 선생은 서예가로서 우리나라 5대 국필 이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총독이 조선의 명필 다섯 분을 초청 한 적이 있었는데, 석당 선생께서 다른 네 분과 함께 초청을 받으셨다 한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우리나라 5대 국필 로 모든 사람이 인정하였다 한다. 또한 석당은 동양삼국(한국, 중국, 일본)서도회에서 특선도 하였다. 원래 석당의 호는 소남(小南)이라 하였는데,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경에 호를 석당(石堂)으로 바꿔 쓴 것으로 추정된다.

 

 

보탑성전에서 본 범종각

 

 

목 마름을 해결해 주는 석간수 앞에 서 있는 석조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관자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하여 보살핀다는 뜻),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왼손에 정병(중생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감로수)을 들고 있는데, 여기엔 ‘정병에 있는 물을 버들가지로 뿌려서 모든 중생의 번뇌를 없애주고 병을 낮게 해준다’는 뜻이 담겨 있다.

 

 

보탑성전(寶塔聖殿) 편액(扁額)은 월정(月汀) 선생의 글씨이다. 

 

 

비록 인생살이가 어렵고 괴롭더라도 행복의 그림을 그려라는 내용의 '슬기롭게 살아가는 길'의 내용은 가슴에 와 닿는 좋은 글이다.

 

 

정면에서 본 보탑성전

 

 

경내에서 본 보탑성전

 

 

 

이 오층석탑은 불기 2549(2005)년에 조성하였다. 아(亞)자형 한옥식 석탑이고, 조성자는 충청남도 논산시 광성면 왕전리 자광불교연구소 김광열씨이다.  또한 오층석탑에는 경북 경주시에 거주하는 이삼순(진여심) 보살이 불기 2549(2005)년 6월에 미얀마의 박물관장으로부터 기증받아 축서사로 이운한 사리와 보물 제1379호 축서사 괘불탱의 복장낭에서 나온 적사리 2과가 함께 봉안되어 불자들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는 석탑이다.

 

 

 

 

심검당(尋劒堂) 편액(扁額)

 

종무소와 함께 절의 소임자들이 거쳐하는 심검당 건물

 

 

선열당(禪恱堂) 편액(扁額)

 

 

스님과 행자들이 거처하는 선열당 건물

 

 

축서사의 주지 스님이 거처하는 요사채

 

 

 

대웅전은 1999년에 완공하였으며 건축양식은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주춧돌은 정교하게 다듬은 복련(아래로 향한 연꽃) 주춧돌이다. 

 

 

대웅전 전면의 모든 문(門)은 연꽃모양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 꽃살문으로 예술적 화려함과 정교함을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문이다.

 

 

대웅전에 봉안된 주불이 석가모니불일 때에 좌우협시는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이여야 하는데, 이곳 축서사 대웅전에는 좌우에 문수보살과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건물이며 창호는 띠살창으로 어칸은 4분합문, 협칸은 2분합의 문을 달았다. 보광전(普光殿)이란 당호를 가진 법당은 우리나라에서 그 예가 드물다. 보광전(普光殿)은 원래 고대 중인도 마가다국 보리도량에 있었다고 하는 불전의 이름이다.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설하는 아홉 번의 법회(7처9회) 가운데 2회, 7회, 8회가 보광법당회로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보광전이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불교에서 연화장 세계(蓮華藏 世界)란 연꽃에서 출생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있는(含藏,함장된) 세계라는 뜻으로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연화장 세계의 교주이신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이 보광전에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법신불인데 법신이란 ‘진리 그자체’라는 뜻이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수인은 지권인이라고 하는데,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말아 쥐고있다. 가끔 왼손이 위로 가고 오른손이 아래로 가는 경우도 있다. 오른손은 부처님의 세계요, 왼손은 중생세계를 표현하는데,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둘이 아님을 나타내며, 진리의 몸으로 중생세계를 감싸고 있음을 뜻한다.

 

불신(佛身)은 곧고 반듯한 어깨, 넓은 가슴, 넓게 벌린 무릎과 함께 현실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분명하며 통견(通肩)의 법의는 몸에 밀착되어 신체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평행계단식 옷주름은 지권인(智拳印)을 결한 양쪽 팔에 걸쳐 양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축서사 보광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좌상과 석조좌대, 부광배(附光背)는 '보물 제995호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奉化 鷲棲寺 石造毘盧遮那佛坐像 및 木造光背)'로 지정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좌상의 뒤쪽의 아름다운 광배(光背)는 조선시대에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광배에는 李健鎬(이건호)라는 글씨가 붓글씨로 써져 있다. 목조광배(木造光背)의 화려한 아름다움과 석조비로자나불의 고고함이 함께 어우러져 참배자들에게 신심이 절로 일어나게 한다.

  

 

무릎사이의 옷주름은 다른 불상에서와는 달리 물결식의 주름으로 표현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평행계단식 옷 문양과 함께 9세기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석조대좌(石造台座)는 신라하대에 유행한 8각대좌로서 하대석(下台石)에는 8각에 사자1구씩을 양각했으나 마루판 아래에 묻혀있어 볼 수 없다. 중대(中臺)에는 공양상과 합장한 인물상이 부조(浮彫) 되어 있고, 상대석(上臺石)에는 화문(花紋)과 연화문(蓮華紋) 등이 조각되어 있다. 비로자나불과 부광배(附光背)와 함께 보물 제995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좌상 위에 나무로 조각된 용(龍) 모양의 닫집이다. 용의 모습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보는이로 하여금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보광전 천정은 봉황(鳳凰)을 타고있는 선신(仙神)이 그려진 우물반자로 마감하였는데, 사찰의 천정 그림에서 흔치 않는 독특한 그림이다.

 

 

보광전 앞에 있는 이 석등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진리를 상징하는 이 석등은 어둠을 밝혀 중생의 무명(無明)을 일깨워주는 조형물로 방형의 지대석는 각면에 2구씩 안상(眼像)이 새겨져 있으며, 팔엽의 복연(伏蓮)으로 보이는 연화문의 하대석(下臺石)이 올려져 있고 각 모서리에는 귀꽃을 세웠으며 간주석(竿柱石)은 팔각기둥을 이루고 있다. 

 

그 위에는 앙련(仰蓮)의 상대석이 4개의 화창(火窓)이 장식된 화사석(火舍石)을 받치고 있으며, 옥개석(屋蓋石)은 마멸되어 있지만, 처마나 우동(隅棟)의 반전이 급격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의 높이는 2.3m 쯤 된다.

 

 

스님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요사채

 

 

보광전(普光殿) 뒤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 건물은 적묵당(寂默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축서사의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선원(禪院)이다. 

 

 

 

 

원래 괘불석주(掛佛石柱)는 대웅전 앞에 조성되어 있는 돌기둥으로 괘불을 걸수있는 받침대이다. 축서사 괘불석주는 보광전 뒤의 언덕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데, 흔히 사람들은 괘불석주(掛佛石柱)와 당간지주(幢竿支柱)를 혼동하는데, 당간지주는 절 입구에 2개의 돌기둥이 한쌍으로 조성되어 있는 것이고, 괘불석주는 법당 앞에 2개의 돌기둥이 한쌍으로 두쌍을 이루고 세워져 있다.

 

괘불석주(掛佛石柱)는 사찰에서 행해지는 큰행사에는 많은 불자(佛子)들이 참석하게 되면 비좁은 대웅전 안에서 법회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대웅전 안에 모셔진 부처님을 대신하여 두루말이 그림 형태의 괘불을 대웅전 앞 마당에 두개의 깃대를 세워 걸고, 더 많은 신도들이 부처님을 볼 수 있게 하였던 깃대를 고정하는 석주(石柱)이다.

 

외형은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즉 야외에 부처님을 모시는 단을 설치하여 불법(佛法)을 설(說)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 많은 사람이 모임으로 인해 시끄럽고 떠들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야단법석(野檀法席)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보물 제1379호 축서사 괘불탱 (鷲棲寺 掛佛幀)'은 모시바탕에 채색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으로, 정면을 향한 입불상을 화면에 가득 차도록 그린 다음 광배 주위로 화불과 보살상을 배치한 독존도형식이다. 원래는 보광전에 걸어두고 예배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대웅전에 보관 중이다. 주불은 얼굴 형태가 원만하고 사용된 색채 또한 선명하고 화려하여 전반적으로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편 괘불탱에 걸려 있던 복장주머니에서 후령통(1구)을 비롯하여 사리(2과)와 씨앗류, 다라니(4종 4매), 괘불원문(1매) 등이 발견되었다. 그림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기록과 조성내용을 밝혀주는 ‘괘불원문(掛佛願文)’에 의하면, 이 괘불탱은 조선 영조 44년(1768)에 정일(定一)스님 등 10명이 참여하여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축서사 괘불탱화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며, 인물과 문양의 세련된 표현 및 화려하면서도 조화로운 색채의 사용 등이 돋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복장주머니에서 사리를 비롯한 복장품과 함께 다른 불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괘불원문’이 발견되어 학술적으로도 자료 가치가 높다.(자료제공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