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45 - 천불천탑의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천불산 운주사 본문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45 - 천불천탑의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천불산 운주사

徐白(서백) 2016. 1. 10. 12:24

 

전라남도 화순하면 생각나는 대표 관광지는 세계문화유산 화순고인돌을 비롯해 천불천탑의 운주사, 천하제일경 화순적벽, 북면 서유리 공룡발자국 화석지 등 돌과 관련된 문화유적 등이 있는 고장이다. 이 고장의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자락에 위치한 구름이 머무는 절, 운주사(雲住寺)는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한다. 여기서 절의 이름을 운주사(運舟寺)라 한 것은 풍수지리로 볼 때 움직이는 배 모양의 땅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 운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에는 석불 석탑이 각 1,000기씩 있다고 기록됐다. 1632년 발간된 능주읍지에도 천불산 좌우 협곡에 석불 석탑이 1,000개씩 있다고 기록됐다. 운주사의 창건에는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운주사의 창건에는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운주(雲住)가 세웠다는 설, 마고(麻姑)할미가 세웠다는 설, 미륵 사상을 믿는 노비들이 미륵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설, 도교사원(道敎寺院)이라는 설, 일부는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대장경과 천불천탑을 쌓았다는 설과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이 삼별초군에 맞서기 위해 천불천탑을 쌓았다는 설, 또한 석공들의 연습장이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불교에서 천()이란 숫자는 무한히 많음을 뜻하고, 천불(千佛)은 인간사의 모든 번뇌에서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여전히 천불천탑에는 천 가지 비밀과 천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이 중 도선 창건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영암 구림(鳩林) 출신인 도선이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고, 배의 중간 허리(船腹,선복)에 해당하는 호남 땅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영남쪽으로 기울어져 일본쪽으로 땅의 정기가 기운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에 한반도의 서쪽인 운주사 자리에 천불천탑을 세워 무게의 중심을 맞춤으로써 운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이야기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이 도력으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하룻밤 사이에 천 개의 석불과 천 개의 석탑(千佛千塔)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고자 했으나 공사가 끝나갈 무렵 일하기 싫은 동자승이 꼬끼오하고 닭소리를 내는 바람에 석수장이들이 날이 샌줄 알고 하늘로 올라가버림으로 인해 결국 미완성인 와불로 남게 됐다는 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운주사 유적들이 12~13세기의 양식을 보이는 데 비해 도선국사는 훨씬 전인 9세기의 인물이라서 연대가 맞지 않다.

 

아마 이는 후대에 덧붙여진 설이지 않을까? 하여튼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믿어 왔다한편 운주사의 전설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절에서 멀지 않은 춘양면에는 돛대봉이 있다. 돛대봉에 돛을 달고 절(운주사)에서 노를 젓는 형세라 한다. 또 절을 지을 때 신()들이 회의를 열었다는 중장터(衆場地가 멀지 않고, 신들이 해를 묶어놓고 작업하였다는 일봉암(日封巖)도 가까이에 솟아 있다.(중장터 - 일설에는 승려들이 장터를 이룰 만큼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함.)

 

천불천탑의 전설이 전해오는 운주사는 임진왜란으로 법당을 비롯한 석불과 석탑이 크게 훼손되어 폐사로 남아 있었으나 18세기에 자우(自優, 17691830)가 불상과 불탑을 수리하고 약사전을 중건하였다. 당시는 약사사(藥師寺)라고 불렀음을 각안(覺岸)이 지은 능주운주동(綾州雲住洞)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1921년에 간행한 도암면지를 보면 1918년에 박윤동, 김여수 등 16명이 시주하여 중건하였음이 나와 있고, 최근에도 중창불사가 있었다.

 

현재 사찰 내에는 대웅전, 지장전, 미륵전, 산신각, 보제루, 종루, 운주 선원, 일주문, 사천왕문, 원융당, 지혜당, 공양간 등의 전각이 산재해 있다.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에는 석탑 12, 석불 70(화순군 자료 : 석탑 21, 석불 101)만이 있다. 19806월에 절 주변 일원이 사적 제312호로 지정되었다.

 

일주문 뒤쪽에 걸려 있는 "千佛千塔道場(천불천탑도량)" 편액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자락에 위치한 운주사 일주문 전면에는 마땅히 "천불산운주사(千佛山雲住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달리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이 쓴  "靈龜山雲住寺(영귀산운주사)" 편액이 걸려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눈앞에는 펼쳐지는 광경은 사찰에 온 것이 아니라 어떤 조각공원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수많은 석불과 석탑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만나는 거대한 '화순 운주사 구층석탑(보물 제796호)'의 모습이다.

 

운주사 구층석탑은 커다란 바윗돌로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을 삼고 그 위로 윗층 기단을 쌓은 후 9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운주사 석탑 가운데 가장 높은 석탑이다. 윗층 기단의 가운데돌은 4장의 널돌로 짜였으며,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긴 후 다시 면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굵게 새겨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또한 기단의 맨 윗돌은 탑신의 1층 지붕돌로 대신하고 있는 점이 특이한데, 운주사의 모든 탑이 이러하여 고려시대로 오면서 나타난 특징으로 보인다.

 

탑의 면이 사각형인 것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탑들과 같으나, 지붕돌 밑면에 받침을 생략한 모습이나 각 면에 새긴 장식이 일반형에서 벗어난 모습들은 보기 드문 예이다. 이는 지방적인 색채가 뚜렷했던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원래 지방유형문화재 제8호였다가 1984년 보물로 등급이 조정되었다.

 

탑신의 각 몸돌에는 면마다 2중으로 마름모꼴을 새기고, 그 안에 꽃무늬를 두었는데, 이러한 수법은 운주사의 석탑에서만 볼 수 있다. 각 지붕돌은 밑면이 약간 치켜올려져 있고, 여러 겹의 빗살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원기둥모양으로 다듬은 돌과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올려져 머리장식을 이루고 있다.

 

운주사 경내에서 맨 먼저 만나는 불상군(佛像群)으로, 운주사 구층석탑 옆 절벽에 비스틈하게 기대고 있는 모습

 

진입하면서 우측 산등성이에 자리한 오층석탑의 모습이며, 석탑의 모습이 온전하지 못한 관계로 일명 동냥치탑, 거지탑이라는 애칭이 붙어 있는 석탑

 

 

 

옛 운주사가 한 때 폐허가 되면서 파손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석불과 석탑을 비롯한 각종 유구들의 잔해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 

 

'화순 운주사 칠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제276호)' 

 

 

 

(사진-1)동쪽 산중턱에 있는 '화순 운주사 수직문칠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257호)'

 

(사진-2)화순 운주사 수직문칠층석탑  

 

화순 운주사 수직문칠층석탑에서 바라본 맞은 편 산능선의 전경이다. 좌측으로 칠성바위와 칠층석탑이 보이고, 우측의 소나무가 서 있는 정상이 와불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탑에 장식된 문양 중 가장 이색적이고 의미가 주목되는 '화순 운주사 쌍교차문칠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제277호)'의 X자 문양이다. 운주사에 남아 있는 몇몇 석탑의 탑신에 돋을새김 혹은 음각X자 문양은 네 방향의 연장선이 옥개석 추녀선과 연결되어 있다.

 

X자 문양은 티베트 불교에서 십상자재(十相自在)와 더불어 사용되는 시륜(時輪)의 상징 문양 중 하나라고 한다. 시륜은 불교의 5대 금강인 대위덕금강, 승낙금강, 일집금강, 희금강, 시륜금강 중의 하나로, 시륜경에서 X자 문양은 음양의 원리와 인간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쌍교문칠층석탑의 탑신에 새겨진 X자 모습

 

쌍교문칠층석탑의 탑신에 새겨진 ◇꼴 모습

 

 

운주사에서는 보기 힘든 광배(光背)를 가진 '화순 운주사 광배석불좌상(전남 유형문화재 제274호)'이다. 운주사의 석불 가운데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유일하게 광배가 있는 불상이다.

 

 

광배를 갖춘 석불의 뒤쪽 측면을 보면 바위면에 먼저 석불을 새기고 난 뒤에 돌을 뜯어 낸 흔적들이 남아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흔적은 바로 정으로 쪼아 틈을 내고 쐐기를 박아 석불을 암반에서 떼어낸 자국임을 증명하는 것이.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을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규모가 작다. '화순 운주사 석조불감(보물 제797호)'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의 대표적 예이다. 이처럼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유례를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등을 서로 맞댄 감실 안의 두 불상 역시 특이한 형식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감실 지붕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서 보아 여덟팔()자모양인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다.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예이다. 불상을 새긴 수법은 그리 정교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나타난 지방적인 특징이 잘 묻어나온다.

 

'화순 운주사 원형 다층석탑(보물 제798호)'의 모습으로, 일명 연화탑, 호떡탑으로 불리기도 하는 특이한 석탑이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형태에서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를 따르지 않은 특이한 모양의 석탑으로 고려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기단(基壇)2단의 둥근 바닥돌에 높직한 10각의 돌을 짜올리고 그 위로 16장의 연꽃잎을 장식한 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원형이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층 뿐이나 원래는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조형면에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문 모습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에서 나타난 특이한 양식이라 하겠다. 기단의 맨 윗돌이 윗면이 편평하고 옆면이 둥근데 비해, 탑신의 지붕돌은 정반대로 아래가 편평하고 윗면이 둥글다. 이는 상하의 조화와 안정감을 꾀하려 한 의도로 추측된다.

 

 

석조불감 앞에서 본 운주사 전경 

 

대웅전이 있는 경내로 들어서는 보제루 건물의 출입구 좌우에는 주련이 걸려 있는데, 일주문에 걸려 있는 '靈龜山雲住寺(영귀산운주사)'와  보제루에 걸려 있는 '雲住寺(운주사)' 편액의 서체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 주련도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 선생의 필적인 것 같다. 

 

오른쪽 주련은 "千佛來會雲中住(천불래회운중주)"이고, 왼쪽 주련에는 "千塔湧出徧滿山(천탑용출편만산)"이라고 적혀 있다. 이 글의 내용은 대충 이런 내용이 아닐까?  "천 분의 부처님이 구름처럼 모여 오셔서 머무는 가운데, 천 개의 탑이 높이 솟아 올라 온 산 가득하게 펼쳐져 있네"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 선생이 쓴  "雲住寺(운주사)" 편액

 

대웅전 전경(1) 

 

대웅전 전경(2)

 

대웅전 전경(3)

 

노천당 월하 스님이 쓴 대웅전 편액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 부처님과 영산회상도 

 

대웅전의 후불탱이 걸려 있는 뒤쪽 벽면에 그려진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 

 

대웅전 내부 측벽에 그려진 '해수관음보살도' 

 

 

노천당 월하 스님의 필적인 '지장전(地藏殿)' 편액 

 

지장전에 봉안된 지장삼존상과 수많은 지장보살좌상의 모습 

 

법성료(法性寮) 전경

 

월하 스님의 필적인 '법성료(法性寮)' 편액

 

 

 

산신각과 미륵전 전경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불의 모습 

 

미륵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발형(鉢形) 다층석탑 

 

 

운주사의 전체 모습을 살펴보려면, 대웅전 뒤편 산 위의 공사바위(혹은 불사바위)로 올라가야 한다. 이 바위는 그 옛날 천불천탑 불사를 할 때 총감독이 앉아서 내려다보며 지시를 했던 바위라 하여 공사바위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곳에 올라서서 보면 골짜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손바닥의 손금을 들여다 보듯 빤히 내려다 보이니, 비록 이 바위의 이름이 설화라고 할지라도 그럴 듯한 이름이다.

 

마애여래좌상 앞에서 본 운주사 모습 

 

공사바위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암벽에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불꽃무늬 광배가 있는 이 '화순 운주사 마애여래좌상(전남 유형문화재 제275호)'은 어쩌면 좌우 능선과 발 아래의 돌부처들을 거느리고 지켜보는 주인공으로 보인다.

 

신라 말 효공왕 때, 영암 구림(鳩林)에서 태어난 도선 국사가 당나라에 가서 풍수지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지세를 살펴보니 화순 운주사 땅이 여자의 음부형국으로 장차 임금이 나올 군왕지(君王地)여서 그 혈을 끊어 놓기 위해 명당을 누르는 탑을 세우고, 하룻밤 사이에 천불 천탑을 세웠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바로 이 원형탑이 '명당탑'으로 불린다.

 

또한 운주사가 위치하고 있는 이곳의 산이름은 완전한 거북의 형상이라고 해서 영귀산(靈龜山)이다. 그 거북의 목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 명당탑 자리라고 한다. 여기에 탑을 세운 것은 명당의 지기(地氣)를 눌러 막으려는 의도일 것이다. 신령스러운 영귀(靈龜), 즉 거북의 귀두(머리)가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바로 자녀 생산을 위한 행위가 아닌가. 

 

그리고 특이하게도 운주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은 전체가 돌산인데 비해, 이 장소는 한 길을 파도 황토흙이라고 한다. 그래서 풍수지리적으로 이 자리는 임금이 태어날 수 있는 곳이였다는 뜻이다. 명당탑의 탑신이 다른 탑과 달리 둥근 모습인 것도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람의 성기 모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명당탑 옆에 있는 사층석탑 

 

 

거북바위 오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제256호) 

 

거북바위 교차문칠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제279호)

 

거북바위 교차문칠층석탑의 탑신에 새겨진 X자 문양

 

 

부부와불(夫婦臥佛)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시위불(머슴불)의 모습이다. 이 돌부처는 도선 국사 설화에서 일이 하기 싫어 새벽닭 우는 소리를 낸 동자승이 벌을 받아 변한 불상이란 설화를 가지고 있다. 또 와불에서 떼어낸 바위의 일부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운주사의 스토리텔링은 이 부부와불(전남 유형문화재 제273)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와불은 칠성바위의 국자 끝 두 돌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북극성을 상징하며, 북극성 신앙을 나타내는 유적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실제 하늘의 북두칠성 국자 끝의 별 두 개를 연결하고, 그 두 별 거리의 5배 되는 곳에 북극성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이곳 운주사 칠성바위의 국자 끝 두 돌의 연장선을 따라 올라가면 와불이 누워있다. 그러니 칠성바위는 북두칠성을, 와불은 북극성을 상징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999번째, 1000번째 불상으로 번호매김이 된 이 와불은 남불 12.7m, 여불 10.3m의 크기이다. 이들이 일어나는 날 세상이 바뀐다는 설화가 후대에 생겨나기도 했다. 애초의 의도대로 이 거대불상을 세웠더라면 단연 운주사의 중심불이 되었을 것이다. 와불의 본 의미는 석가모니가 누워 돌아가신 모습을 새긴 열반상으로 측와상을 뜻하는 말이나 지금은 와불하면 운주사의 이 부처상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처럼 흔히 말하고 있다.

 

석불의 발 아래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남불)은 좌상, 오른쪽(여불)은 입상이다. 손의 모양으로 보아 각각 비로자나불좌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이다. 또 바위 결에 충격을 가해 생긴 균열로 자연암석에서 부처상을 떼어내어 세우려했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일권 교수는 와불은 미륵신앙을 상징하며, 나아가 북극성을 사랑한 민족임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말했다.

 

와불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허리 아래 부분에는 정으로 쪼아 틈을 내고 쐐기를 박아 와불을 암반에서 떼어내려 한 흔적이 보이지만, 허리부터 머리 부분까지는 그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한편 오른쪽에는 예리하게 절단된 육계 부분이 남아 있다.

 

부부와불의 얼굴 부분 모습

 

부부 와불은 남녀가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이다.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다 세우려 하였으나, 미처 세우지 못해서 누워 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이 절의 석탑과 석불은 동일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어 이름 없는 석공이 평생을 두고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칠성바위앞칠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제281호)과 칠성바위이다. 운주사의 탑은 별자리를 본뜻 것이라는데, 사람이 깎은 일곱 개의 둥그런 바위가 칠층석탑 옆에 마치 북두칠성처럼 놓여 있다. 실제로는 북두칠성을 반대로 엎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지난 199943KBS <역사스페셜>을 통해 방영된 바 있어 운주사를 찾는 이라면 빼놓지 않고 둘러보는 명소가 되었다. 실제 북두칠성의 밝기 등급과 같이 밝은 것은 크고 어두워질수록 돌의 크기 역시 차례로 작아지고 있다.

 

칠성바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넓은 잔디밭이 나오는데, 이곳 또한 수많은 석불이 널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공터이지만 이곳이 바로 운주사의 옛터인 운주사지(雲住寺址)이다.

 

 

운주사지에 누워 있는 또 다른 애기와불

 

 

옛 운주사 터였던 잔디밭에는 소박한 불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하나하나의 돌부처에 새겨진 기원과 소망이 온 골짜기를 메우고 있는 듯하다. 한편 운주사 천불천탑은 황석영의 '장길산', 송기숙의 '녹두장군', 드라마 '추노'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위 글은 한국의 사찰, 사찰장식의 善과 美, 답사여행의 길잡이-5(전남), 문화재청, 동국역경원, 부산일보, 뉴스천지, 오마이뉴스,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글쓴이 : 서백(徐白) 김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