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47 - 초조대장경의 보관처로 알려진 팔공산 부인사 본문
『삼국사기』에 의하면 오악으로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과 중악(中岳)인 팔공산은 신라시대에는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라 불렸으며, 고려시대에는 ‘공산’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지금의 팔공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공산이 팔공산이라 불리게 된 것에 대해서는, 통일신라 말기 벌어진 왕건과 견훤의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 신숭겸을 비롯한 여덟 장수가 순절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여덟 고을에 걸친 산이라고 해서 유래되었다는 설, 신라 헌덕왕 때 심지대사가 진표율사로부터 받은 8간자를 동화사에 봉안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는 설, 원효대사의 1000명 제자 가운데서 여덟 분이 득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또한 사대주의 모화(慕華) 사상가들이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팔공산(八公山) 남쪽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부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부인사(符印寺) 또는 부인사(夫人寺)라고도 일컬어진다.신라시대에는 지체가 높은 여인을 부인(夫人)이라고 불렀는데, 선덕여왕을 기리는 의미에서 `부인사(夫人寺)`라고도 쓰고 초조대장경을 보관한 데서 연유하여 부신 符(상서, 길조), 어질 仁의 `부인사(符仁寺)`로 쓰기도 한다. 부인사지(符仁寺址)는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예로부터 선덕묘(善德廟)라는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라 선덕여왕 때(7세기 초)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백제의 침공으로 위기에 놓일 때 친히 신라 오악 중 하나인 중악에서 기도를 드리자 도인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지으면 국난이 사라지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 하여 세웠다고 한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약 2,000명의 승려가 수도하였다고 하며, 고려 현종 때부터 문종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도감(都監, 임시로 설치하던 관청)을 설치하였으며, 고려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의 보관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성기에는 39개의 부속 암자를 관장하였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승려들만의 승시장(僧市場)이 섰다는 구전이 전하여지지만, 몽고의 침입 이후 중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중창 및 중수의 역사가 전래되지 않고 있다.
또한 부인사는 고려시대 무신 집권에 항거하여 봉기한 승려들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인 1203년(고려 신종 6) 무렵에 이르러 부인사에서는 큰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다. 보통 "부인사 승도난(僧徒亂)"으로 부르는 사건인데, 이 사건은 무신 최충헌의 집권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부인사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최씨 무신정권에 반발한 반란이었다.
이미 1202년에도 운문사와 부인사, 동화사 등의 승려들이 연합하여 경상북도 영천(永川)의 관아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1203년의 부인사 승도란은 그 전 해에 있었던 영천 공격 사건과 연계되는 난이었다. 무신집권기에 지방 사원의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례는 적지 않게 발견되는데, 부인사 승려들이 일으킨 이 난은 경상북도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발생한 난과 함께 규모가 컸던 승려난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 승려와 지방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반란 사건은 고려 후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일반 정치사 분야에서의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다. 여하튼 부인사를 중심으로 이러한 난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부인사가 이 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400m에 위치한 암자 터에다 1930년대 초에 비구니 허상득(許相得)이 중창한 것이다. 1991년 선덕묘를 선덕여왕숭모전으로 좀 더 크게 옮겨 지었고, 선덕여왕 진영을 새로 조성하였다. 최근까지 무너져 있었던 쌍탑 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서탑은 1966년에 복원하였으며, 신라 말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보이고 있다.
절에서 200여 미터 남쪽 밭에는 신라 때의 작품인 당간지주가 있어 전성기의 절 영역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바위에 감실을 파고 조각한 마애여래좌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특이한 마애불이다.
부인사는 대웅전의 전면에 동탑과 서탑을 배치한 전형적인 통일신라기의 쌍탑가람이었으나, 오랜기간을 방치되어 있었던 관계로 동탑은 허물어져서 기단석 일부만 남아있을 뿐이고, 서탑은 원 위치에 각층 옥개석의 모서리 부분이 일부 회손된 상태이지만,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는 부인사 서탑의 기단부는 2층기단을 이루고 갑석은 상·하층 기단마다 두고 상층 기단 갑석의 밑면에는 직각을 이룬 1단의 부연(副緣)을 각출하였으며, 상하 갑석은 상면 중앙에 2단의 괴임을 두었고, 하대중석과 상대중석의 측면에는 탱주(幀柱)를 모각하였다.
탑신부는 각층에 탑신을 받치는 2단의 괴임을 만들고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 1매석으로 하였는데, 옥신에는 우주(隅柱)를 새기고, 옥개석의 옥개받침은 5단이며, 옥개석 상면의 낙수면은 완만하게 흐르다가 추녀마루의 합각(合閣)에 이르러 약간 반전시켰다.
상륜부는 방형의 노반(露盤)이 남아 있는데, 그 중심부에 직경 23.0㎝, 깊이 13.0㎝의 활주공이 뚫려 있고, 노반 이외의 상륜부재는 결실되었다.
허물어져서 기단석 일부만 남아있던 동탑을 근래에 복원한 모습
지붕돌은 처마가 길고 얇으며, 여덟 귀퉁이가 하늘을 향해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둥근 받침만 남아 있을 뿐 그 위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비록 받침의 가운데기둥에 약간의 금이 갔지만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조각도 섬세하고 부드럽다. 각 부재가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뛰어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그리고 석등 앞쪽에 있는 돌판은 배례석(拜禮石)이다. 배례석이란 말 그대로 예를 올리기 위해 사용하는 돌판이다. 법당이나 탑, 석등 앞에 주로 있다. 여건상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이가 삼보께 여법하게 정성을 다해 예를 올릴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배례석을 살펴보면 절하기엔 너무나 부담스런 모양이다. 장방형의 직사각형에 중앙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전면과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특히 중앙에는 활짝 핀 연꽃이 새겨져 있는데,불교에서 활짝 핀 연꽃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불보살은 연꽃이 활짝 핀 연화좌대 위에 모셔진다.
안상이라는 문양도 역시 높은 위계의 장식이다. 안상은 실제로 코끼리를 정면에서 바라본 것과 같은 모습을 말한다. 하지만 인도와 달리 중국에서는 코끼리가 없었다. 이런 연유로 안상이라는 개념을 형상화 하기 어려웠기에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양식적인 변화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 받침대가 배례석이 아니라는 것이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나타난다. 이 책에는 배례석을 봉로대(奉爐臺)로 설명한다. 봉로대란 향로를 올려놓는 돈대(墩臺)라는 의미다. 지금은 불전 안에만 향로가 있지만 과거에는 불전 밖에도 향로가 있었다. 옛날에는 신도들이 함부로 법당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향을 밖에서 피우고 그곳에서 기원을 올리고 참배를 하였다.
지금에 와서 과거의 유산인 받침대만 남아있게 되다보니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유전되어 배례석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앞으로 빠른 수정이 있어야할 잘못된 이름이다.
대개 사찰에서 보제루 혹은 만세루로 불리는 건물로, 부인사에서는 '삼광루(三光樓)'란 편액을 걸었다. 한편 이 편액은 남석(南石) 이성조(李成祚) 서예가의 필적이다. 정면에서는 중층의 건물이지만 대웅전과 마주한 중정(中庭)에서는 단층의 건물이다.
부인사의 범종각에는 범종각 대신 '현음각(玄音閣)' 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모든 색이 합쳐지면 검은색이 된다, 그렇다면 모든 소리가 합쳐지면 우주의 소리일까? 아무튼 궁금하게 생각되는 편액이다.
여기서 현(玄)은 검다. 미묘(微妙)하다. 현묘(玄妙)하다 등의 수식어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고, 『주역』문언전(文言傳)에서는 “검고 누런 것은 천지가 뒤섞인 것이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하였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전통적으로 현(玄)은 하늘을, 황(黃)은 땅을 의미하며, 그 두 가지가 뒤섞인 상태는 현황(玄黃)이라고 표현된다.
그래서 '현음(玄音)'을 미묘한 소리, 현묘한 소리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하늘의 소리, 범천(梵天)의 소리, 즉 진리의 소리가 나오는 전각이란 의미에서 '현음각(玄音閣)' 이란 편액을 걸었다고 본다.
묘심원(妙心院) 건물
묘심원(妙心院) 편액
일화선원과 영산전의 모습
부인사의 주불전에 해당하는 대웅전
대웅전 편액도 삼광루 편액을 쓴 남석(南石) 이성조(李成祚) 서예가의 글씨이다. 선생은 경남 밀양 태생으로 18세 때 서예계에 입문하여 평생 외길을 걸어온 서예가로, 청남 오제봉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대웅전 창호 사진1) - 솟을꽃살문
(대웅전 창호 사진2) - 창호의 또 다른 문양
(대웅전 창호 사진3) - 꼬끼리들이 서로 물고 물리어 있는 모습을 표현한 아주 특이한 문양
(대웅전 창호 사진4) - 궁판에 표현된 귀면상
(대웅전 창호 사진5) - 궁판에 표현된 연꽃과 두 마리의 물고기 문양
(대웅전 창호 사진6) - 궁판에 표현된 연꽃과 두 마리 거북의 모습
법화신앙에서는 대웅전을 지혜를 실어 나르는 배 또는 중생을 고통없는 극락의 세계로 건너가게 해주는 배로 비유한다. 부인사 대웅전 앞쪽의 주춧돌은 앞으로 나아가는 형상의 거북이 모습이다. 이런 수생동물로 주춧돌을 만들어 놓은 이유는 대웅전 기단부가 바다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대웅전 법당은 반야용선의 선실이 되고, 축대를 포함한 주춧돌은 출렁이는 바다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대웅전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서방 극락정토를 향해 가는 반야용선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삼존상과 두 분의 여래좌상
대웅전 불단 동쪽 측면에 모셔진 신중탱
부인사 일명암지석등(逸名庵址石燈)으로 불리는 이 석등은 두 개의 화사부(火舍部 : 석등의 불 켜는 부분)를 구비한 우리 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쌍화사(雙火舍) 석등이다.
이 석등의 세부적인 구도를 보면 하대석에서 방형으로 된 기대석의 사방으로는 한 측면에 두 개씩의 안상(眼象)이 배치되어 있으며, 상면에는 단형부등변연대(短形不等邊八角蓮臺) 받침 위에 십엽복판연판(十葉複瓣蓮瓣)을 각출하고 있고, 연대 위에는 3단의 간석(竿石) 밭침이 모각되었다.
간주석(竿柱石) 역시 단형부등변8각주로서 높지 않다. 상대석은 단형부등변8각평면으로 되었고, 그 밑부분에 3단의 밭침이 모각되었으며, 그 위로 중판단연화(重瓣單蓮花)를 배치하였는데, 각 연판내에는 3중판(三重瓣)의 화염문이 장식되어 있다.
화사석은 일반적인 석등의 구도에서 벗어난 편팔각 즉 장방형의 평면상에 두 개의 화사부를 구비한 14면체를 취하고, 옥개석(屋蓋石)은 우동(隅棟)이 뚜렷하며, 낙수면(落水面)의 굴곡은 심하게 반전되어 있다.
이 중에서 화사석의 구재는 경북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지금 화사석과 상륜부는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신재로서 짜맞춤하였다.
이 석등은 원래 팔공산 순환도로의 남쪽에 위치한 일명 금당암지(金堂庵址)에 흩어져 방치되었던 것을 회수하여 부인사 경내로 옮겼으며, 지금은 부인사 명부전 앞에 새워 놓았다. 이 석등의 조성시기는 신라 하대 즉 9세기 중엽의 양식으로 보여진다.
지장보살을 봉안한 명부전
명부전 불단 위에 봉안된 지장보살을 비롯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의 모습
지장보살 좌측으로 모셔져 있는 시왕을 비롯한 동자와 월직사자의 모습
산신탱을 봉안한 산신각
산신각 앞에 놓여져 있는 치미(鴟尾)인데, 이 치미는 고대 건물의 용마루 양끝에는 얹어 장식하는 망와의 일종이다. 치미(용)가 입을 크게 벌려 용마루를 물고 바다에서 꼬리를 휘젓는다면 거대한 파도가 일고 바닷물은 넘쳐 육지에 이를 것이다. 어떤 큰불이 나도 치미가 꼬리 한번 흔들면 단번에 그 불을 끌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화재예방을 위한 방편으로 치미를 설치했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치미는 지붕에서 사라지고, 대신 취두(鷲頭, 독수리 머리 형상)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명칭은 마루 끝에 장식하는 기와를 말하는 망새(望瓦)라고 해야 적절한 용어라고 여겨진다.
영산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설법했던 영산불국(靈山佛國)을 상징한다. 영축산정은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던 곳으로 불교의 성지(聖地)를 영산전을 통하여 현현시킨 것이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협시로 봉안한다. 그리고 후불탱화로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봉안하여 영축산에서의 『법화경』 설법상을 묘사하고 있고, 그 주위에는 8폭의 팔상도를 봉안하는 것이 통례이다.
일화선원
부인사부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 - 이 부도의 기단부는 하대석과 중간석 및 상대석으로 되어 있으며, 8각으로 된 하대석의 사방으로는 복련판과 동물상을 조각하였고, 중간석도 8각으로 되어 각면에 동물상과 동자상 및 화문(火文)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에는 8각의 사방으로 겹쳐지도록 앙련(仰蓮)을 큼직큼직하게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8각원당형으로서 상하를 약간 좁힌 엔타시스형을 취하였으며, 전면에 ‘隱通堂(은통당)’이라는 글자를 음각하였다.
옥개석은 8각으로서 우동(隅棟)이 높고 그 사이에 기와골을 양각하였으며, 밑으로는 서까래를 양각하였다. 상륜부는 유실되고 남아있지 않았으나, 수년 전 이 부도를 분실하였다가 회수하여 부인사의 남쪽에 대지를 만들어 종형부도 1구와 나란히 안치하였는데 이 때에 상륜부를 다시 제작하여 짜맞춤하였다.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
초조대장경은 1011년(고려 현종2년 음력 2월)에 처음 판각돼 총 86년에 걸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이다. ‘초조(初雕)’는 ‘처음으로 새긴’이라는 뜻이다. 초조대장경은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염원으로 조성됐다. 중국 북송의 개보칙판대장경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이며, 재조(再雕)대장경인 팔만대장경보다 222년 앞섰다.
초조대장경은 처음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됐다가 팔공산 부인사로 옮겨졌다. 왜 팔공산 부인사로 옮겨졌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문헌이나 기록은 없으나 팔공산이 좀 더 안전한 장소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다.
초조대장경은 여러 번의 인간(印刊)이 있었으나, 고종 19년(1232년)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황룡사 9층 목탑과 함께 불타버렸으며, 임진왜란 때 다시 전소되었다. 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현재 그 인쇄본이 일본 교토(京都)의 난젠사(南禮寺)에 1,715판이 전해지고 있다.
2011년에는 고려 초조대장경 인경본(경판을 찍어 책으로 만든 것)을 복원하여 복원간행본(복간본)이 제작되었다. 고려시대 인경(인쇄) 당시의 종이, 인쇄, 제본 등을 이용, 원형 모습으로 제작됐다.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은 부처님이 45년간 중생에게 설법한 내용과 불교 교리를 빠짐없이 기록한 불교경전으로 불교의 경(經), 율(律), 논(論) 등 삼장(三藏)을 모아 놓은 석가모니의 설교 모음집이다. 대장경판을 봉안한 장경판전(국보 52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고, 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렸다. 팔만이란 팔만사천을 줄인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 즉,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르침을 뜻한다.
고려인은 1236년(현종 2년)부터 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초조대장경판 조성과 똑같은 정신으로, 처음보다 더 완벽한 대장경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현재 해인사에 봉안된 재조대장경판이다.
경판은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를 비롯해 10여 종의 나무가 사용되었고, 전체 무게는 280톤이니 4톤 트럭에 싣는다면 70대 분량이다. 8만1,258장을 모두 쌓으면 3,200m로 백두산(해발 2,774m)보다 높다. 목판을 한 줄로 이으면 약 60km(150리)나 된다. 경전에 새겨진 5,200여만 자 가운데 오탈자는 158자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5200만 자가 넘는 대장경의 많은 글자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마음 心’ 하나다. 즉 일심(一心)이다.
잘 썩고 벌레 먹기 쉬운 나무로 만든 경판을 7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비결은 장경판전 건축법에 있다는 분석이고 건물 4동에 전체 기둥 수는 108개로 108번뇌를 상징함과 동시에 번뇌의 집 속에 진리인 부처님의 말씀을 넣어 둠으로써 번뇌 속에 깨달음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몽골군 침입으로 사라졌는데,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숱한 위기를 넘겼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장경을 일본으로 통째로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대장경을 옮기는데 4톤 트럭 70여 대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고 중도에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6·25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이 해인사 등 산속 사찰에 숨어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김영환 장군(1921∼1954년, 당시 대령)은 그해 8월 “무장공비가 많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해인사를 폭격하면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인 대장경이 소실된다”며 동료 조종사들의 폭격을 중지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인사는 매년 김 장군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위 글은 한국의 사찰, 답사여행의 길잡이-8(팔공산 자락), 사찰의 상징세계, 문화유산 바로보기, 동국역경원, 한국관광공사,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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