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44 - 강원도 심산유곡 무릉계곡에 위치한 삼화사 본문
삼화사를 품고 있는 산이름 두타산(頭陀山)의 두타란 불교 용어로, 번뇌의 티끌을 털어내고 의식주에 집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수행하는 것을 두타행이라고 하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래서 삼화사는 지금도 선종의 종풍을 지켜 온 절집이 아닐까? 행정구역으로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84번지, 두타산(1351m)의 북쪽 무릉계곡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옛날에는 삼공암 또는 흑련대, 중대사라고도 하였다.
이 사찰과 관련하여서는 몇가지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삼화사고금사적』과 『진주지』,『읍지(邑誌)』에 의하면, 옛 사적(史蹟)에 이르기를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대산을 돌면서 성적(聖蹟)을 두루 거쳐 돌아다니다가 두타산에 와서 신라 선덕왕 11년(642)에 흑연대를 창건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다.
선덕여왕 11년은 자장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한해 전이다. 자장은 선덕여왕 12년(정관17, 643)에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대국통으로 임명되어 선덕여왕 14년(645) 황룡사 구층탑을 완성한다. 자장의 전기는 그 뒤 나이가 더 든 말년에 강릉 수다사에 머물다가 문수대성을 친견하기 위해 태백산 등을 유력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선덕여왕 11년, 즉 한 해 동안 삼화사를 비롯한 영동지방 사찰들을 창건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삼화사고금사적』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장의 귀국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정관 17년이고, 또 경주에서 대국통으로 활약한 사실이 마지막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진덕여왕 4년(650)이라면, 그 이전에 삼화사 창건에 관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 신라 경주에서 국가적 존경을 받던 자장이 영동지방으로 옮겨온 것은 그의 인생이 황혼기로 접어든 650년 이후의 말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건시기의 상한선을 아무리 올려 잡는다 해도 자장이 삼화사 창건에 관여했다면 그 시기는 『삼국유사』에 기록이 남아 있는 650년 이후라야 가능하다. 이는 앞으로도 더 상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한편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말 굴산사의 개창주인 범일국사가, 『척주지』에는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범일국사가 산에 들어와 불사를 지어 삼공암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흥덕왕 때 창건됐다는 설도 있다. 『석식영암(釋息影庵)』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서 모의(謀議)를 하였다. 그들이 가버리자 그 지방 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하였으며, 얼마 뒤 사굴산(闍堀山)의 품일(品日)이 이곳에다 절을 짓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기록과 아울러 현존하는 유물들을 감안하면 삼화사는 대체로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1393년(태조 2) 조선의 태조가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神人)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 옛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의 영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로 고쳤다고 한다.
또한 고적(古蹟)에 의하면,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 중(仲), 계(季) 3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돌배(石舟)를 타고 유력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와서 맏형은 검은 연꽃(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푸른 연꽃(靑蓮)을 손에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색 연꽃(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각각 머물렀다고 하며, 이곳이 지금의 삼화사, 지상사, 영은사라고 전한다.
이 절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747년(영조 23) 홍수와 산사태로 인하여 무너지자 옛터에서 조금 위로 옮겨 지었고, 1820년(순조 20) 화재가 나서 1824년에 중건하였으며, 1829년 다시 불타자 정원용, 이기연, 이광도, 윤청 등이 서로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그 뒤에도 수차례의 화재와 중건을 거쳐오다가 1905년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는데, 1907년에는 의병이 숙박하였다는 이유로 왜병들이 방화하여 대웅전, 선당 등 200여 칸이 소실되었다. 그 이듬해 이 중 일부를 건축하였으며, 1979년 8월에 무릉계반 위쪽으로 절을 옮겨 중건하였다.
SBS 드라마 “시티홀”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무릉계곡의 무릉반석이다. 무릉반석에는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암각글씨로 채워져 있다. 무릉반석의 암각 글씨하면 단연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글자이다.
정하언이 썼다는 설과 양사언이 썼다는 등 논란이 있는 글자이지만, 정하언이 삼척부사로 재직(1750~1752)한 적이 있으므로 신미년인 1751년에 정하언이 썻다는 설이 더 유력하지 않을까. 한편 명필 양사언(楊士彦, 1517~1584)도 조선 중기의 문관으로, 김구(金救), 한석봉(韓石峯),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조선 중기의 4대 명필로 꼽힌다.
무릉반석 위에 있는 "金蘭契員(금란계원)"과 글씨 위쪽에 그려진 난(蘭) 그림이다. 특히 암반 위에 그려놓은 그림인데도 난(蘭)이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이 있다.
동해시에서 글자가 마모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1995년도에 만들어 놓은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모형 석각의 모습.
두타산은 예로부터 삼척 지방의 영적인 모산(母山)으로 숭상되는 산으로, 두타산 무릉계곡에 있는 화강암 지역은 급사면인 동해 사면으로서 수직 절리가 이루어 놓은 아름다운 경관이다. 무릉계곡을 따라 그에 평행한 방향으로 수직 절리가 발달되어 있어 급벽과 폭포 등이 발달되어 있다.
(사진-1) 무릉계곡에 위치한 금란정 전경.
구한말까지 유림들은 향교 명륜당에 모여 유학강론에 전념하였으나 한일합병으로 인해 폐강하기에 이르자 이에 분개하여 우의를 다지는 금란계를 결성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건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일본 관군들에 의해 제지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뒤 1945년 해방이 되자 금란계원과 그 후손들이 선인의 뜻을 계승하여 정자를 짓기로 합의하고 1949년 봄에 금란정을 건립하였고 1956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사진-2) 금란정에 걸려 있는 "금란정(金蘭亭)" 편액은 계남(桂南) 심지황(沈之潢, 1888∼1964)의 필적이다. 심지황은 동해시 북평동 단곡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으나 강릉에서 주로 활동한 서예가이다. 자는 시택(時澤), 호는 계남(桂南)이다. 15세부터 20세까지 5년간 소남 이희수로부터 서화를 배웠으며, 무릉계곡의 「금란정(金蘭亭)」 편액 글씨 외에도 무릉반석의 「금란회우도(金蘭會友圖)」 가 있다.
(사진-3) 금란정에 걸려 있는 또 다른 금란정 편액
(사진-1) 삼화사 일주문
대웅전에 다다르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주고 공간의 리듬감과 종교적 신비감을 주기 위한 방법으로 지어진 일주문은 구도자가 이제 막 해탈교를 건너와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뜻을 전해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일주문이다.
(사진-2) 삼화사 일주문에 걸려 있는 "頭陀山三和寺" 편액은 탄허스님의 필적이다. 탄허스님은 1934년 22세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하였고, 이후 3년간 묵언 참선의 용맹정진으로 수행했으며, 15년간 오대산 동구 밖을 나오지 않았던 분으로 유명하다. 월정사 조실,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조계종 초대 중앙역경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타이완 국립타이완대학교에서 비교종교에 대한 특강을 하여 세계적인 석학으로 추앙받았던 분이다.
천왕문으로 가는 길 옆에 세워진 12지신상의 모습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외호신(호법신)으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이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흔히 사천왕은 무관복장을 하고 있는데, 불교우주론에 따르면 사천왕은 왕이기 때문에 무관복장을 하지 않는다. 다만 사천왕이 방위신 겸 수문신의 역할을 하다 보니 문관 형식보다는 무관 형식이 더 적합하여 이렇게 고착화된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1277호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비교적 높아 보이는 기단은 각 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기단의 맨 윗돌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번갈아 쌓아 올렸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든다.
여러군데에 금이 가 있고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대체로 잘 남아있고 균형이 잘 잡힌 단아한 모습이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신괴임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1997년 4월 대웅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이 때 위층 기단 안에서 나무 궤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형탑 25기와 청동제 불대좌 조각 2점, 철조각 6점, 문서를 기록한 종이 1매 등이 들어있었다.
범종루와 천왕문, 그리고 기와불사와 공양미 등을 판매하는 건물
"수륙사(水陸社)" 편액이 걸린 당우
삼화사의 주불전인 적광전(寂光殿) 편액은 탄허스님의 글씨이며, 적광전 기둥에 걸린 주련은 자장율사의 불탑게인데 이 주련의 글씨도 탄허스님의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보물 제1292호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은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복원 작업을 하면서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決言)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명문(名文) 가운데는 이두(吏讀)가 포함되어 있으며, 불상 조성에 관계되었던 승려와 시주자들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등, 당시의 사회,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철조노사나불에 얽힌 여러 설화가 있지만, 포스팅에서는 생략한다.
탄허스님이 쓴 주련이 걸려 있는 적광전 전면의 모습
불교에서 연화장 세계(蓮華藏 世界)란 연꽃에서 출생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있는(含藏,함장된) 세계라는 뜻으로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연화장 세계의 교주이신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셔놓은 법당을 적광전, 대적광전, 대광명전이라 하고, 그 사찰의 부속 전각일 경우에는 대개 비로전이라고 한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 빛처럼 우주에 가득 비치는 것을 형상화 한 것이 비로자나불이다.
또한 화엄경은 비로자나불을 교주로 하면서 불타가 깨달은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인데, 화엄사상에서는 부처의 몸을 셋으로 나누어 법신불(비로자나불), 응신불 또는 화신불(석가모니불), 보신불(노사나불)이라는 삼신불(三身佛)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 불전에도 노사나불을 봉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로자나불을 모신 경우에 걸리는 적광전이라는 편액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약사전 쪽에서 본 적광전
적광전 동쪽에 위치한 약사전
약사여래불과 협시보살인 일광과 월광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 500여분의 부처님을 함께 봉안한 약사전 내부의 모습
적광전 서쪽에 위치한 극락전과 삼성각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여래삼존불(좌우 협시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국토를 지난 곳에 있는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 극락전, 극락보전, 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정토에 가게 하는 부처이다. 아마타불의 48대원에서 18번째 서원은 내 이름을 열 번만 불러도 반드시 극락왕생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미타불 이름을 열 번만 불러도 극락에 간다고 했으니 그 이유 때문에 누구나 염불할 때 아미타불을 쉽게 부르는 것 같다.
탄허스님이 쓰신 극락전(極樂殿) 편액
삼화사사적비와 동안거사 이승휴유적비(動安居士 李承休遺跡碑)
고려 말의 이승휴(李承休)는 이 절 가까이에 객안당(客安堂)을 짓고 이곳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으며, 10여 년 동안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고 간장암(看藏庵)이라 하였다고 전해 온다.
한편 삼화사에는 매년 봄, 가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국행수륙대재"가 봉행되고 있는데, 이 수륙대재가 봉행되게 된 이유를 보면 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건국과정에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고, 친 고려 성향의 세력들을 포용하여 백성들과 소통,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동해 삼화사와 강화도 관음굴, 거제도 견암사에서 국행수륙대재를 봉행하였다. 이것이 조선시대 수륙재의 시작이다. 삼화사에서 봉행하게 된 배경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과 두 아들이 삼척에서 교살(목이 졸라 죽임)되었기 때문이며, 매년 봄, 가을에 왕실에서 주관하였던 의례였다.(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국역경원, 한국관광공사, 삼화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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