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41 - 감추어진 잘 늙은 절, 전북 완주 불명산 화암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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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141 - 감추어진 잘 늙은 절, 전북 완주 불명산 화암사

徐白(서백) 2015. 10. 17. 12:26

 

화암사(花巖寺)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불명산(佛明山) 시루봉 남쪽에 있는 사찰로, 고고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즈넉한 화암사는 숨어 있는 절이다. 화암사를 만나러 가는 길은 좁은 산길과 계곡을 건너 마지막 철계단을 올라서야 겨우 화암사에 도착할 수 있다. 정겨운 오솔길과 계류를 따라 한참 오르면 안도현 시인의 말대로 잘 늙은 절, 화암사가 고풍스러운 자태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15세기에 쓰인 화암사중창기에는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땅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절은 고산현(高山顯) 북쪽 불명산(佛明山) 속에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은 비스듬히 잇닿아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지 오래다. 비록 나무 하는 아이, 사냥하는 남정네라고 할지라도 도달하기 어렵다. 골짜기 어구에 바위 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

 

골골의 계곡물이 흘러 내려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 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이른다. 절이 들어선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땅이다.”

또한 고려 중기의 문신 백문절(白文節 ? ~ 1282년)은 화암사에 대해 740구의 긴 한시를 남겼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글이다.

 

어지러운 산 틈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소나무, 회나무는 하늘에 닿고 댕댕이 줄 늘어졌는데, 백 겹 이끼 낀 돌다리는 미끄러워 발 붙이기 어렵구나. ()버리고 걸어가니 다리는 피곤한데, 길을 통한 외나무다리는 마른 삭정이일세. 드물게 치는 종소리는 골을 나오기 더디고, 구름 끝에 보일락 말락 지붕마루 희미하다.(중략) 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10년 홍진(紅塵)에 일만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어찌하면 이 몸도 얽맨 줄을 끊어버리고, 늙은 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볼까? 산 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을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도 다시 올 것 알지 못하는 일,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 세 장대()기울었도다.”

 

그리고 광주iN이광이 절창화담에서 화암사를 소개한 글에서도 누군가 꼭 보고 싶으면, 완주 화암사에 가면 된다. 혼자 가면 비밀이 하나 생긴다라고 적고 있다.

현대의 시인 안도현은 화암사, 내 사랑이라는 시에서 잘 늙은 절 한 채, 굳이 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으렵니다라고 표현하였다. 안도현 시인의 눈에 보인 화암사는 분명 특별한 절이었다. 안도현의 표현대로 불명산 화암사는 잘 늙은 절이다. 안도현은 화암사, 내 사랑외에도화암사, 깨끗한 개 두 마리라는 시와 잘 늙은 절, 화암사란 수필도 남겼다.

 

안도현의 시() - 화암사(花巖寺), 내 사랑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사진-1, 2) 화암사로 가는 산길  

 

산 모퉁이를 돌고 계류를 이리저리 건너고 한참을 걸어가면 나타나는 이 철계단을 올라서야 비로소 감춰진 절집, 화암사가 눈 앞에 들어온다.

 

철계단을 올라서서 보이는 화암사 전경  

 

화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창건자 및 창건연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694(신라 진성여왕 3) 일교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이곳의 별장에 와 있을 때 용추(龍湫)에서 오색찬란한 용()이 놀고 있었고, 그 옆에 서 있던 큰 바위 위에 무궁초(3월에 피는 노란색 꽃인 복수초로 추정)가 환하게 피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지은 뒤 화암사(花巖寺)라고 했다고 한다.

 

화암사중창기에 의하면,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 절에 머물면서 수도했다는 기록이 있고,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도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것으로 보아 화암사는 신라 문무왕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 뒤 여러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오다가 1425(세종 7) 관찰사 성달생(成達生)의 뜻에 따라 주지 해총스님이 중창하였다. 이때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1611(광해군 3) 중창하였고, 1629(인조 7)에도 중창하였다. 1666(현종 7)에도 중창이 있었으며, 1711(숙종 37)에 극락전 등을 중건하였다.

 

극락전과 우화루를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실린 화암사 중창기의 내용을 보면, ‘예전 신라의 원효, 의상 두 조사가 중국과 인도를 편력하다 도를 이루고 돌아와 이곳에 석장(錫杖)을 걸고 절을 지어 머물렀다. 절의 주존불인 수월관음상은 의상스님이 도솔천에 노닐다가 친히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 만든 것으로, 등신대의 원불이다. 절의 동쪽 산마루에 대가 있으니, 그 이름을 원효대라고 하고, 절의 남쪽 고개에 암자가 있어 그 이름을 의상암이라 하는데, 모두가 두 분 조사가 수행하던 곳이다.’

화암사에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국보 제316)을 비롯하여 명부전, 산신각, 그리고 꽃비 내리는 누각을 뜻하는 우화루(보물 제662), 적묵당, 철영재, 요사 등이 있다.

 

이 중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극락전은 1425년에 성달생의 시주로 건립했으며, 처마를 받치는 서까래를 겹으로 받쳐, 처마 지붕 선을 앞으로 더욱 내미는 하앙식 공법을 사용한 건물로, 중국 남조시대(南朝時代)에 유행하던 하앙식 건물로는 우리 나라에서 건축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극락전에는 아미타삼존불과 1858(철종 9)에 그린 후불탱화, 1858년에 그린 신중탱화, 1871(고종 8)에 그린 현왕탱화가 있다. 또 명부전에는 1830(순조 30)에 그린 지장탱화가 지장보살상 뒤에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같은 시기의 탱화 8폭이 있다.

 

이 밖의 문화재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높이 140의 동종(銅鍾)이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화암사중창비가 있다. 이 동종은 광해군 때 호영(虎英)이 주조한 것으로, 사찰 또는 나라에 불행한 일이 있을 때는 스스로 소리를 내어 그 위급함을 알려 주었다고 하여 자명종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극락전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고, 경판 200여 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는 1469(예종 1)에 판각된 보현행원품 普賢行願品을 비롯하여 1618(광해군 10)에 판각된 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등이 있었으며, 현재 전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또 고승들의 영정 7폭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들 영정은 허주(虛舟), 고경(古鏡), 낭월(朗月), 보경(寶鏡), 인파(仁坡), 낙암(樂巖), 월하(月河), 벽암(碧巖)의 것으로 전통적인 탱화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오래된 작품이다. 이 밖에도 절 주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3기의 부도와 덕운당(德雲堂)의 부도가 있으며, 모두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맞은 편 산 중턱에서 본 화암사 모습  

 

사찰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보이는 꽃비 내리는 누각을 뜻하는 우화루(보물 662호)이다. 앞쪽에선 2층이지만, 극락전 쪽에서는 1층 건물로 보이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우화루는 조선 광해군 3(1611)에 세워진 누각으로,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한 건물이다. 절에 대규모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공간으로 보통 때는 개방하지 않는다. 우화루 옆으로 3칸으로 이루어진 문간채가 들어서 있다. 문간채의 마지막 칸이 화암사 경내 중심 불전으로 향하는 대문이다.

  

우화루의 규모는 앞면 3, 옆면 2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다포 양식이다. 1층은 기둥을 세워서 바깥과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2층 마룻바닥을 땅과 거의 같게 놓아 건물 앞쪽에서는 2층이지만 안쪽에서는 1층집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안쪽에서 본 우화루의 모습

 

우화루 안에는 화암사의 백미로 꼽히는 목어도 볼거리이다. 5백여 년을 살고 한 생을 마친 소나무가 다시 목어(木魚)로 태어나서 또 다시 5백여 년 동안 오랜 풍상을 겪으며 살아 온 목어의 모습이다.

 

 

절묘하게 연결된 우화루와 적묵당 지붕의 내림마루 모습

  

우화루와 극락전 사이의 서편에서 동쪽을 향하고 있는 후원을 겸한 적묵당 건물로, 툇마루가 있는 건물이다. 화암사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한국인의 해학과 기지를 볼 수 있는 앙증스런 눈꼽째기창, 그야말로 눈꼽만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추운 겨울에 창호 전체를 열 경우 열손실이 많다. 그래서 작은 창을 내어 바깥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창을 내는데 이를 눈꼽째기창이라고 한다.

 

적묵당 측면의 판벽과 판문 

 

우화루와 극락전 사이의 동편에서 서쪽을 향하고 있는 요사채 건물로, '佛明堂(불명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근래에 지어진 명부전

  

극락전 동쪽에는 철영재(啜英齋)’란 편액이 걸려 있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종2품 벼슬인 지중추원사(표지석에는 숭록대부판중추원사로 기록)를 지낸 무신이였던 성달생(1376~1445)  자신의 원찰을 삼을 목적으로 시주를 자청하여 1425년에 불사를 하였고, 심지어 1429년에는 딸을 절에 보내 직접 일의 추이를 살피게끔 하였다. 성달생은 사육신 성상문의 조부로서 세종 때, 전라 관찰사를 거처간 후,  훗날 퇴락해가는 화암사를 중창불사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에 후대 화암사에서는 성달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위패를 봉안 하였다.

 

철영재(啜英齋) 편액에는 ‘자하(紫霞)’라는 낙관 글씨가 있어 호가 자하(紫霞)인 신위(申緯 17691845)가 쓴 글씨로 보인다. 글자 뜻풀이로는 꽃봉오리 향기를 맡는 집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지만,에서는 말을 삼가는 집이라는 의미로 설명한다. 신위가 어떤 연유로 이곳에 현판 글씨를 남겼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신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이며 서예가로, 이정, 유덕장과 함께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꼽힌다.

 

우화루와 극락전에서 건축 당시 지붕을 올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문서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적이 있다. 1981년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과 묵서명(墨書銘)이 각각 발견되었는데, 자료를 종합한 결과, 극락전이 지어진 때는 고려 후기인 1297년에서 1307년 사이, 그후 중창된 것은 1425년에서 1440년으로 추정되었다. 또 정유재란(1597) 때 왜병의 침입으로 우화루를 비롯한 극락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5년에 재건되고, 1714년에 다시 보수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극락전은 정면 3,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이고 중앙문은 네 짝으로 된 분합문이며 오른쪽과 왼쪽문은 세 짝으로 된 분합문으로 되어있다. 여러 자료로 미루어, 소실 이전의 모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극락전은 조선시대에 지어졌지만 그 이전 백제시대 건축술을 따른다고 한다. 극락전에 적용된 하앙구조 건축술은 백제시대 건축술로 알려져 있다.

 

 

옛 건물의 편액은 명칭을 가로로 쓴 형태가 일반적이다. 간혹 화재를 예방한다는 주술적 이유로 숭례문처럼 세로로 건물 이름을 쓴 경우도 있다. 그런데 화암사 극락전 편액은 하나의 나무판에 한 자씩 따로 편액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옛 편액 중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글씨는 잘 보일 수 있도록 굵은 획으로 최대한 크고 힘 있는 해서체로 썼다. 글씨를 가장 크게 담을 수 있도록 테두리도 없이 편액을 만들어 여백이 거의 없게 글씨를 꽉 차게 쓴 글이지만, 누구의 글씨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편액 나무판을 보면 같은 나무판(‘적묵당’ 편액도 동일)을 잘라 사용한 것 같다. 나무판을 똑같이 세 등분한 뒤 글자의 형태에 맞춰 ‘자와 자 편액을 세로결로 걸었고, ‘殿자 편액은 가로결로 걸었다. 이는 殿자의 경우 다른 두 글자보다 폭이 넓어 가로결로 걸었다. 글씨를 쓴 이도 아마 좁은 공간에 맞는 크기로 최대한 잘 썼는데, 세 글자 모두 같은 규격으로는 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다시 쓰게 하지 않았으며, 글씨를 다 담기 위해 편액 나무판의 방향을 달리해 글씨를 쓰고, 그냥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앙이란 기둥 위에 중첩된 공포와 서까래 사이에 끼워진 긴 막대기 모양의 부재를 가리킨다. 이 하앙의 끝부분 위에 도리를 걸고 서까래를 얹으면 밖으로 돌출한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다. 국내에서 화암사 극락전은 하앙식 공법을 사용한 유일한 건물로, 우리나라 건축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백제의 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건축한 것으로 전해지는 호류지(法隆寺)의 금당과 오층목탑에서 하앙식 구조가 발견되었다. 화암사 극락전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그 흔적이나 문화재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 하앙식 구조가 백제를 통하지 않고 중국에서 바로 일본으로 건너온 건축술이라 주장하기도 했다극락전에 사용된 하앙식 구조가 국내외에 알려지면서 건축사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앙식 구조가 백제에서도 사용되었다는 게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다른 사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아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하앙식 구조의 건물로 기록되고 있다.

 

극락전의 하앙식 구조를 자세히 보면, 건물 앞뒤의 모양새가 다르다앞부분은 하앙 전체를 한 마리 용으로 형상화한 모양이다. 하앙의 부리는 용의 발 모습임을 알 수 있고, 끝부분은 화염이 있는 여의주를 발톱으로 움켜쥔 모습을 표현하였다. 뒤쪽 하앙은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뾰족하게 다듬었다. 전문가들은 뒷면의 하앙 형태를 임진왜란 이전의 양식, 앞면의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으로 본다. 하여튼 오래전 백제에 뿌리를 둔 하앙 건축술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온 모습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극락전 아미타삼존불과 아미타극락회상도

  

극락전 불단에 모셔진 부처님 위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닫집이 만들어져 있다. 닫집은 사찰 법당의 불상 위 또는 궁궐 내부의 용상(어좌) 위의 천정에 장식으로 덧달아 붙인 집을 말한다. ‘따로라는 옛말이므로 따로 지어놓은 집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사찰에서는 불상 위에 설치되는 장식물로서 불단과 함께 부처님의 공간을 엄숙하게 만든다.

 

특히 화암사 극락전 닫집은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형식과 모양새를 갖췄다. 세월이 흘러 색이 바랬지만, 역동적으로 하늘을 나는 모습의 용과 비천상으로 장식된 화암사 닫집은 화려하면서도, 예술적 기품과 균형미를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정토에 가게 하는 부처이다. 무한한 진리의 빛을 상징하여 무량광불로 불리며, 도교의 불로장생 신앙과 결부되어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특히 아마타불의 48대원에서 18번째 서원은 내 이름을 열 번만 불러도 반드시 극락왕생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미타불 이름을 열 번만 불러도 극락에 간다고 했으니 그 이유 때문에 누구나 염불할 때 아미타불을 쉽게 부르는 것 같다.

 

원래의 동종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조선 광해군 때에 호영(虎英)이 다시 만든 동종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동종은 불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소리를 내어 그 위급함을 알려 주었고, 어느날 밤에 종이 스스로 울려 스님을 깨우고 자신을 지켰다는 전설이 있어 일명 자명종(自鳴鐘)이라고도 부른다.

 

화엄사 동종의 용뉴는 음통과 한 마리의 용(포뢰)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판의 가장자리에는 연꽃잎이 서 있는 모습이고, 상대(어깨띠)는 연판형 꽃무늬 띠를 둘렀다. 상대 아래로는 상대와 떨어져 4개의 유곽이 있고, 유곽 안에는 연꽃판 위에 각각 9개씩의 유두(종유)가 표현되어 있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입상의 지장보살을 새겼다. 유곽 아래에는 '金鐵大施主, 銅鐵大施主, 布施, 供養'이라는 명문만 새겨져 있고 제작연대는 없다. 그리고 종신 하단에 있어야 하는 당좌도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왜군이 무기를 만들 쇠붙이를 구하려고, 헌병들을 화암사로 보냈는데, 그들이 몰려오자 종이 스스로 종소리를 내어 스님들에게 미리 위험을 알렸고, 스님들은 일본군으로부터 종을 지키기 위해 종을 급히 땅에 묻게 되었고 광복 후 종을 꺼내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적묵당 뒷편의 암반 위에 덩그렇게 지어진 산신각의 모습

 

산신각에 모셔진 산신탱

  

적묵당 뒤뜰에 자라고 있는 맨드라미도 한 껏! 꽃말은 '시들지 않는 사랑'이다. 그리고 꽃 모양의 생김새가 사람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맨드라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닭의 벼슬처럼 생겼다고 하여 '계관화(鷄冠花)'라고도 부르는 꽃이다.

 

 다른 사찰에 비해 특이하게 지어진 화장실의 모습과 주변 전경

 

이외에 '화암사중창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4)'가 있지만, 실수로 담아오지 못했다. 중창비는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비신만 있는 원수방부형의 간단한 비이다. 비명은 화암사중창기(花巖寺重創記)’라고 적혀 있으며, 비신의 상당 부분이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이 비문은 1441(세종 23)에 쓰여졌으며, 비를 세운 해는 1572(선조 5)이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1471(태종 17)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했던 성달생(成達生)이 사찰을 하나 세우고자 하여 절터를 모색하던 중, 1425년에 산좋고 물 맑은 화암사지가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화암사를 중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화암사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머물러 수도하였다고 하는 곳이라 한다. 당시 법당에 모셔놓은 수월관세음보살상은 의상대사가 도솔산에서 직접 친견하였던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 한다. 한편, 원효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원효대가 화암사 동쪽에 있고, 의상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의상암이 남쪽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연화공주에 관한 설화

옛날에 임금의 귀여운 딸 연화공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한 달이 다 되도록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임금은 어느 날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은 딸의 마지막 소원을 빌기 위해 절에 나가 정성껏 불공을 드렸다. 그날따라 많은 비가 내렸고,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에 흠뻑 젖은 임금은 궁에 도착하자마자 피로에 지쳐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부처님이 나타나 이미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하여 연화공주의 병을 낫게 할 것을 알려 줄 터이니 그리 알라고 말하고 연꽃 한송이(고산지대에서 자라며 3월에 피는 노란색꽃인 복수초로 추정, 강심제, 정신 안정제 등 약제로 쓰임)를 던져 주고는 사라졌는데, 잠에서 깨고보니 꿈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부처님이 임금님께 던져준 연꽃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임금께 알려졌다.

 

연꽃이 피어 있는 것은 지금의 완주군 깊은 산봉우리 바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겨울에 연꽃이 피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연꽃이 연못에 피지 않고 산중 높은 산 바위 위에서 피어 있다는 것은 더욱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임금님은 몇몇 신하들에게 조심스럽게 꽃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신하들은 며칠만에 연꽃이  있는 산으로 올라가서 꽃을 꺾으려다 말고 다른 일행들에게 아무래도 이런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먼 곳에 숨어서 누가 이 연꽃을 키우고 있는가를 알아보자.”고 말했다. 얼마를 지났을까, 난데없이 산 밑에 있는 연못 속에서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산위로 올라가 연꽃에 물을 뿌려주고는 다시 연못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이 엄청난 광경에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는데, 그 중에 담력이 큰 몇 사람이 겨우 연꽃을 가지고 오게 되었다. 연꽃을 먹게 된 공주는 언제 그런 무서운 병에 걸렸었느냐는 듯이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금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님은 부처님의 고마운 은덕에 보답하고자 연꽃이 있던 곳에 커다란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고, 절 이름을 화암사라 지었다. 화암사란 바위 위에 꽃이 피었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화암사 입구 계곡에는 3단 폭포가 있는데 그 이름이 비룡폭포이다.

 위 글은 답사여행의 길잡이-13 가야산과 덕유산 편, 사찰의 상징세계, 한국의 사찰, 문화재청, 월요신문, 영남일보, 새전북신문,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