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운흥사명 범종(雲興寺銘 梵鐘) 본문
전남 곡성군 곡성읍 월봉리 327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도림사 보광전에 있는 범종이다. 이 범종은 음통은 보이지 않고 용뉴는 쌍용의 형태로 몸체를 서로 틀어 고리를 대신하고 있다. 용의 다리는 반구형의 천판을 딛고 있으나 힘은 없어 보인다. 천판과 종신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는 융기된 1조의 굵은 선을 가로로 돌려 구분하였다. 이 굵은 선 바로 밑에는 상대 대신 원형 안에 범자를 넣은 원형 범자문 14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장식하였다.
이런 문양대 밑으로 4개의 마름모꼴의 유곽을 두었는데 유곽의 문양은 당초문이고 그 안의 유두는 꽃받침 위에 자방이 돌출된 9개의 유두를 구비하고 있다. 유곽의 사이에는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 4구를 배치하였는데, 조선시대 범종에서 흔히 보이는 것으로 두광과 보관을 갖추고 합장한 상으로 선 조각으로 표현하였다. 이 범종의 특징은 4구의 보살상 중 1곳의 보살상 아래에 연꽃가지 2개를 선(線)으로 조각한 것이다. 연꽃가지는 각각 꽃잎과 꽃받침 가지를 모두 표현하고 있다. 하대에 새겨진 조성기 명문에 의하면 1706년(숙종 32) 에 운흥사에서 만들었는데,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옮겨졌는지 알 수 없다.
운흥사명 범종에서는 상대와 하대도 볼 수없고, 음통(용통)도 없으며 당좌도 보이지 않는다. 당좌(撞座)는 당목이 직접 접촉되는 부분이며, 신라의 종들은 주로 연꽃무늬를 새겼고, 당좌를 종의 양쪽에 두었다. 고려시대의 종들은 사방에 4개를 조각하였으며, 조선시대의 종은 당좌가 없고 그냥 치도록 되어 있다. 가장 좋은 소리를 내기위한 적합한 위치는 밑에서 1/3쯤 되는 곳이다.
용뉴는 '용모양의 고리' 라는 뜻이다. 종위에 올라 앉아 있는 용을 특별히 포뢰라고 하는데, 용뉴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뚜렷한 특징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당파싸움이나 하듯이 쌍용이 얼굴을 돌린채 엉켜있는 모습이다. 또한 조선초기로 넘어 오면서 쌍용에게 자리를 내어준 듯이 음통(음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천판(天板)은 종의 머리 부분인데, 조선시대 종은 신라와 고려종에서 볼 수 있는 연꽃잎은 사라지고, 천판의 중앙이 솟아올라 둥그스름한 머리 모양을 취하고 있다.
종신(鐘身)에도 시대에 따라 나타나는 모습이 다르다. 신라종에는 비천상이 대부분인데, 771년에 주조된 성덕대왕 신종은 무릎을 꿇고 합장 공양하는 비천상이고, 특히 725년에 주조한 상원사 범종에는 공후라는 악기를 주악하는 주악 비천상은 유일한 것이다. 고려종은 연꽃자리에 홀로 앉은 부처나 지장보살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조선시대의 종은 지장 혹은 관세음보살이 유곽과 유곽사이까지 올라와서 네곳에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범종의 우측에 새겨진 조성기 명문에는 "康熙 45年 四月日 雲興寺"라는 글과 시주자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강희 45년은 1706년(숙종 32)이다. 즉 1706년에 운흥사(雲興寺)에서 만들었음을 나타내는데, 이 범종도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옮겨졌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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