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김춘식)의 사찰이야기190 - 강가에 위치하여 풍광이 아름다운 여주 신륵사 본문

사찰이야기

서백(김춘식)의 사찰이야기190 - 강가에 위치하여 풍광이 아름다운 여주 신륵사

徐白(서백) 2019. 4. 9. 11:48


우리나라 고찰로는 유일하게 강가에 위치한 명찰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어느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절터로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절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졌다원효대사는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7일 기도를 마치자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고서야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고려 무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길에 마암(馬巖)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굴레 )로 용마(龍馬)를 다스렸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력의 신()과 제압의 뜻인 륵()을 합쳐 절이름을 신륵사(神勒寺)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 벽돌 )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강가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이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하는 등 신이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3개월 뒤인 1376(우왕 2) 8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전각도 건립되었다.

 

,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1381년에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현종 12)에 중건하였고, 1700(숙종 26)에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영조 2)에는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96(정조 20) 영돈녕 김이소와 예조판서 민종현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중각(泛中閣), 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철종 9)에는 순원왕후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하여 불전, 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는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경기도 여주 봉미산(鳳尾山) 신륵사 일주문 전경.

불이문

불전사물이 안치되어 있는 법종각.

구룡루(九龍樓)1689년과 1749, 1860년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나옹선사가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이 있는 누각이다. 

보물 제225호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적묵당은 선원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 구실을 하는 정면 6칸의 자형 건물로 선각당(禪覺堂)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 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 신중탱화, 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영조 49)에 주조한 범종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었고,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보물 제1791호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보살상의 보관과 대좌가 후보(後補)된 것을 제외하곤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주존인 불상을 좌상으로 하고 협시상을 입상으로 한 구성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전통이다. 불상과 보살상들은 모두 상호와 상체가 긴 편인데, 특히 불상의 육계는 유난히 길게 조성되어 이색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불상의 큼직큼직한 나발과 단순하게 처리한 법의 자락은 조선초기부터 내려오던 특징이다.


불상의 눈언저리에 보이는 다크서클 같이 처리한 음영 기법이나 아래 입술을 도톰하게 만들어 처지게 표현한 것 등은 조각승 인일(仁日)과 수천(守天)의 조형 미감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보살상들은 조성발원문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조선시대 1610년에 조성되었는데, 1620년의 약수선원 보살입상(현 동국대박물관 소장)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들 보살상 중 좌협시보살상은 천의식으로, 우협시보살상은 대의식으로 법의를 착용하고 있다. 한편 좌협시보살상의 양쪽 어깨 위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의 표현법과 하반신 중앙에 타원형을 그리며 드리워져 있는 화려한 장엄, 우협시보살상의 보발이 귀 밑에서 정리되는 표현법 등은 가장 중요한 특징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협시보살상의 보발 장식은 경기도 광주 수도사 보살상과 서울 보문사 관음보살상과 유사한데, 이들 보살상 역시 17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조성자와 조성시기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인일이라는 새로운 조각승의 이름이 확인되어 향후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작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1929년에 중수한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하고 있고 그 바깥쪽으로는 시왕과 판관, 녹사, 금강역사 등이 배치되어 있다. 

봉송각(奉送閣)에는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전면은 벽과 문이 없는 상태로 개방되어 있다. 이곳은 사십구재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떠나가는 영가들을 극락정토에 태어나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이다.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지공, 좌우에 나옹과 무학대사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조사당 앞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선사를 추모하며 심었다고 하니 이 향나무의 수령은 적어도 600년이 넘었을 것이다.

보물 제228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보물 제231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재료는 화강암인데 유독 화사석만은 납석을 사용해 운치를 더한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飛天像)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고려 우왕 5(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고려 우왕 5(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를 품고 있는 대장각기비각의 모습이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보물 제226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 신륵사 다층전탑은 사찰의 동남쪽 남한강(여강)가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데, 당시의 풍수지리 사상에 의하여 경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세웠다고 한다신륵사 다층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은 이중의 기단(基壇위에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 놓은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 4층 이상은 1단이며지붕돌 위로도 1층은 4,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명문이 나타나는데이는 조선 영조 2(1726)을 뜻하므로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다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무늬배열 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의 모습은 영조2년에 보수가 이루어진 것이지만 벽돌의 무늬로 보아 처음 조성한 시기는  고려시대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이 탑은 고려시대 유일의 전탑이다한편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 몇 기의 전탑이 남아 있다.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이 삼층석탑은 나옹선사가 입적하였을 때,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라고 한다.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江月軒)은 나옹의 당호이고 법호는 나옹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부산불교교육대학 7기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된 칠불산악회로서 벌써 2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오랜 세월의 역사만큼 소속된 회원들의 나이도 노령화되어 가고 있고, 또한 회원들의 구성원도 차츰 외부에서 들어온 회원들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래도 그 어떤 단체보다도 단합되고 정이 넘치는 산악회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정감이 가는 따뜻한 산악회로 발전해 가길 기대해 본다.


 포토 및 글쓴이 : 서백 김춘식 - 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한국의 사찰(대한불교진흥원), 전통사찰총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화재청, 신륵사 홈페이지,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