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김춘식)의 사찰이야기191 - 불을 밝히고 있던 석등에서 유래한 절이름, 현등사 본문

사찰이야기

서백(김춘식)의 사찰이야기191 - 불을 밝히고 있던 석등에서 유래한 절이름, 현등사

徐白(서백) 2019. 4. 9. 17:25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등사34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산163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신라 법흥왕 때 인도승 마라가미(摩羅訶彌)가 포교승으로 신라에 왔으므로 왕이 그를 위해 절을 창건하고 산 이름을 운악산이라 하였으나, 창건 당시의 사찰명은 전하지 않는다. 그 뒤 수백 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

 

898(효공왕 2)에 고려가 개경(開京)에 도읍을 정할 것을 미리 안 도선국사가 송악산 아래 약사도량으로 세 사찰을 창건하였으나, 완공 뒤 지세를 살펴보니 동쪽이 허()하였다. 이를 보진할 땅을 찾아 동쪽으로 여행하다가 운악산의 옛 절터에 이를 중창하였다.

 

1210(희종 6)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주춧돌만 남은 절터의 석등에서 불이 꺼지지 않고 있음을 보고 중창하여 현등사(懸燈寺)라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보조국사가 도봉산 원통암에 있을 때 동방에서 3주야간이나 빛을 발하고 있었으므로 이곳까지 찾아왔더니 잡초 우거진 곳에 관음당(觀音堂)이 있었고, 그 곁의 석등에서 빛이 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뒤 1411(태종 11)에 함허화상이 삼각산에서 오신산(五神山)으로 가다가 이 부근에서 길을 잃었는데, 홀연 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므로 따라가 보았더니 흰 사슴은 온데간데 없고 그곳에 옛 절터가 있었으므로 크게 중건하였다. 그 때 3대군(大君)의 원당(願堂)을 삼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1811(순조 11)에 화재로 승당(僧堂)과 관음전이 소실되었는데 이듬해 요사채와 누각, 극락보전, 삼보방(三寶房) 등을 지었다. 1825년에는 삼보방(三寶房)을 중건하였고, 1826년에는 위실각을 새로 지었다. 1891년과 1916년에 중수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대부분의 당우가 소실되었다. 1961년에 다시 중수가 있었고 1984년에 극락전을 중수하였다. 1987년에는 새로운 전각들의 건립이 마무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평 화판리 지진탑(문화재자료 제17) -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가 이 주위를 지나다가 석등에서 불빛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수백년 동안 폐허로 있었던 이 절터에 새로 절을 짓게 되었다. 이 때 터의 기를 진정시키고자 이 탑을 세워 두었다 한다. 이로 인해 지진탑(地鎭塔)’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승려의 이름을 따서 보조국사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탑은 원래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단의 일부와 탑신의 1층 몸돌이 없어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 바닥돌과 기단의 맨윗돌은 윗면에 경사가 흐르며 네 모서리 선이 뚜렷하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받침을 두었는데 1·2층은 4, 3층은 3단으로 불규칙하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서서히 위로 들리면서 느린 곡선을 그리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탑의 조각양식과 이름에 얽힌 이야기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현등사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63)

현등사 삼층석탑은 높은 지대석 상면에 2층 기단을 구비한 일반형 석탑이다. 하층기단은 불상의 대좌와 같이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하대석에는 판 내에 장식문이 있는 연화문과 장방형의 액()이 공통적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중대석에는 대나무형의 원주(圓柱)로 된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는데, 기둥의 사이에는 장방형의 액을, 상면에는 복연이 조각된 갑석을 놓았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탑신의 각 면에는 양 우주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원주2층은 4, 3층은 3단의 옥개받침이 두드려져 있다. 상륜부는 복발주연주문주보륜주보주 등이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이 탑에서는 조선 세조 5(1470) 현등사를 중수한 기록이 새겨진 사리함과 사리가 발견되었으며, 석탑을 구성하는 각 부의 양식과 문양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 전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

 

 

 

 

 

 

현등사 목조 아미타좌상(유형문화재 제183)

현등사목조아미타좌상은 전체 높이가 138, 조선 후기에 제작된 불상 가운데 중형에 속한다. 불상은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목조아미타좌상 뒤에 걸려 있던 아미타회상도의 화기(畵記)“1759(乾隆24)에 아미타불을 개금하고 후불미타회상도 1부를 조성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어 1759년 이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조선 후기 불상의 전형화가 이루어진 18세기 이전인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 후기 불상의 지역 양식이나 유파 연구에 중요한 유물이다.

 

 

현등사 신중도(유형문화재 제193) - 신중도는 가로 122, 세로 123이며 화면을 2등분 하여 존상의 크기를 비슷하게 그려 존상의 위계가 반영되지 않았다. 오른쪽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월천자와 복숭아와 병을 든 동자상을 배치하였다. 왼쪽 상단에 날개 깃이 올라간 투구를 쓴 위태천이 그려져 있는데, 얼굴은 이목구비가 명확하고, 코에 비하여 눈과 입이 작은 것이 특징이다

 

 

지장시왕도.

 

 

불단 위에 올려져 있는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라고 적힌 전패.

 

 

보물 제1793가평 현등사 동종

현등사 동종은 원래 현등사의 본사인 남양주 봉선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현등사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종은 73.5cm의 아담한 크기로, 종신(鍾身)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무늬, 파도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넣어 장식성을 강조한 범종이다.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을 맞대어 몸을 꼬아 만든 용뉴는 안정감을 주고, 두 발을 힘차게 내딛어 천판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역동감을 느낄 수 있다. 둥근 곡면을 이루는 천판에서부터 종의 입으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그 폭을 넓힌 종의 형태도 아름답다.

이 종은 고려 후기 연복사종에서 비롯된 중국종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종의 중심부를 세 개의 융기선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의 입 사이에 다양한 무늬를 시문하였는데, 작은 마름모꼴의 연곽에 구슬 모양의 연꽃봉우리와, 천판의 내림연꽃이 중앙을 향해 보상화문처럼 말려든 형태, 그 위로 표현된 구슬무늬, 종복(鍾腹)에 크게 자리잡은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 그리고 하대에 표현된 물거품이 일렁이는 파도무늬 등의 장식 문양은 1469년에 조성된 남양주 봉선사 동종(보물 제397)이나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 그리고 1491년에 만들어진 합천 해인사 동종(보물 제1253) 등 조선전기의 왕실발원 범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원래 이 종을 소장했던 봉선사 또한 왕실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만들어진 궁중양식 범종의 여러 가지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종의 배 부분에는 반듯한 해서체로 주종기를 돋을새김하였다. 주종기는 1619(광해군 11)에 천보(天寶)가 짓고 새기기까지 했으며, 종을 만들게 된 연유, 종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 발원하는 내용, 참여한 사람 등을 기록하였다. 주종장은 일반적으로 주종기를 작성한 천보로 보고 있는데, 그는 조선후기 승려 주종장(鑄鍾匠) 가운데 유일하게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승장의 계보나 범종의 양식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

이 종은 1619년에 조선 전기 궁중양식 범종의 전통을 계승하여 제작된 범종이며, 주조상태도 양호하고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있는 무늬들을 조화롭게 배열하여 범종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이 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선후기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지장전과 지장전 내에 모셔진 지장보살삼존상.

 

 

 

 

삼성각과 삼성각 내부에 모셔진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의 모습.

 

 

 

 

 

 

약사여래(藥師如來)는 불교에서 중생의 모든 질병뿐 아니라 무지(無知)의 병까지도 고쳐주는 부처님(여래)으로서 대의왕불이라고도 불린다. , 약사 부처님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10항하사수(갠지스강의 모래알 수) 불국토를 지난 곳의 동방 정유리광세계(유리로 만들어진 국토)를 다스리는 부처님이며 약사유리광여래불 또는 대의왕불이라고도 한다.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災禍)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하게 해주시며 손에는 약함(약항아리)를 들고 있다. 좌우협시는 일광과 월광보살이며, 12신장이 시립하기도 한다. 주존불인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의 좌협시로 봉안될때도 있다. 약함을 들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후불탱화에서 약함이나 약병을 들고 있는 부처님의 앞에 모셔진 분이 약사여래불이다. 

 

 

 

 

 

 

영산보전 내부 불단 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모셨고, 그 바깥쪽으로는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시립하고 있고, 16나한상도 함께 봉안하였다.

 

 

 

 

 

 

적멸보궁 내부의 모습.

 

민영환(閔泳煥) 암각서(巖刻書) - 일주문을 지나 한참을 힘들게 오르다 보면 계곡 바위 위에 '閔泳煥'이라고 새겨진 세 글자가 있다. 구한말 궁내부대신이었던 민영환(閔泳煥) 선생이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바위에 누워 하늘을 보며 탄식하고 걱정하던 곳으로, 1906년 나세환 외 12인의 의지로 이 바위에 閔泳煥이라고 새겼다. 이후 민영환이라는 암각서가 남아 있어 閔泳煥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포토 및 글쓴이 : 서백 김춘식 - 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그림으로 보는 불교이야기(풀빛), 한국의 사찰(대한불교진흥원), 전통사찰총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화재청,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