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김춘식)의 사찰이야기188 - 법상종의 근본 도량이었던 김제 금산사 본문
금산사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본사이다.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무왕 1)에 창건되었으며, 백제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규모나 사격(寺格)으로 볼 때 별로 큰 사찰이 아니었다. 1492년에 쓴 「금산사오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금산사 홍예문(석성문) - 금산사는 후백제 견훤과의 일화가 있는 곳이다. 부자지간의 권력다툼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된 후백제의 왕 견훤. 석 달 동안 유폐 생활을 하던 견원은 이곳을 극적으로 탈출하여 자신이 세운 나라를 적국(고려)의 태조 왕건이 차지하도록 협조해버린다. 왕건이 마침내 그의 아들들을 쳐 후삼국을 통일한지 며칠만에 견워은 번민과 울화로 등창이 나서 논산시 여산에 있던 황산사에서 죽었다.
금산사에는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석성문 또는 홍예문이라고 부르는 석문이 있는데, 이 석문은 스스로 미륵임을 자처했던 견원이 자기의 복을 비는 원찰로 삼고 중수했다는 설이 있고, 이 성은 금산사를 보호하기 위해 축성하였다고 하여 일명 견원문이라고도 부른다. 견원이 쌓았다는 석성문으로 인해 백제의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중창된 사찰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홍예교 다리의 홍예종석에 매달려 있는 용두(龍頭).
1999년에 건립된 성보박물관 전경.
보물 제828호 김제 금산사 석등 - 김제 금산사 대장전 앞뜰에 놓여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히는 부분인 화사석을 중심으로 그 밑에 아래받침돌, 가운데기둥, 윗받침돌로 3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어 놓았는데, 꼭대기의 머리장식까지 모두 온전히 남아 있다.
보물 제22호 김제 금산사 노주 - 이 노주는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대장각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데, 그 이름을 노주(露柱)라고는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臺座)처럼 보인다.
보물 제23호 김제 금산사 석련대 -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연화대좌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형태가 희귀하고 크기도 매우 거대하다. 상대는 윗면이 평평하며 중앙에 불상의 양발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두 개 있다. 밑면에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으며, 꽃잎 사이에도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어 더욱 화려하다. 중대는 육각형으로 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상대 윗부분에는 깊이 52센티미터 되는 네모진 구멍이 두 개 뚫려 있다. 불상의 발 아래 튀어나온 부분을 여기에 꽂아 세웟던 자취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사치스러운 조각 및 장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보물 제27호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다층석탑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에는 연꽃조각을 아래위로 장식하였다. 탑신부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몸돌은 각 귀퉁이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있다. 밑면에는 받침을 두었는데, 그 중심에 용과 풀꽃무늬를 새겨놓았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남은 것이 없었으나, 훗날 보충한 화강암으로 만든 장식이 놓여 있다.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원통전에 모셔진 십일면천수관음상(또는 42手관음보살) -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의 재난을 없애주는 천수관음은 관음보살의 무량한 자비심과 위신력을 극대화시켜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도상이다. 천수관음 신앙은 밀교가 성행했던 일본은 물론 순수 밀교적 전통이 거의 없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도 관음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천수관음을 조각상으로 표현할 때에는 이 관음상처럼 천수(千手)를 대표하여 40수(手)나 42수(手)로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의 정면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엄하게 하던 정중(庭中) 목탑이었다. 1922년 이 건물을 현 위치로 옮겨 지었지만, 지붕에는 전대 목탑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발과 보주 등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가섭과 아난의 제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1857년에 비구니 만택(滿澤)이 재건하였으며, 나한전은 방등계단 바로 옆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이곳에서도 계단을 참배할 수 있으므로 일명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은 방등계단 바로 옆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할 수 있으므로 일명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 건물 내에 모셔진 삼세불(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미륵보살, 우측에는 제화갈라보살)과 석가모니의 제자인 가섭과 아난존자가 시립하고 있는 모습이고, 뒤쪽으로는 오백나한상을 봉안하였다.
미륵전(국보 제62호)은 신라시대부터 미륵본존을 봉안했던 금당이다. 신라 때의 형태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거대한 불상의 좌대 아래에 있는 철수미좌(鐵須彌座) 등의 형태로 보아 임진왜란 전에는 거대한 미륵존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금산사 주지로 계시던 뇌묵처영대사가 승병 훈련소를 설치하여 왜군들에게 조직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에 왜군들이 금산사에 들이닥쳐 신라 혜공왕 때 세워진 미륵전과 혜덕왕사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던 전각들을 모두 불태워 버려 금산사는 진표율사가 봉안한 미륵장륙상 철제 대좌를 빼고는 모두 소실 되었다.
그후 조선 인조 때 수문대사에 의해 35년간 금산사는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수문대사에 의해 2개의 불전형(佛典形)으로 다시 중창 되었는데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한 화엄신앙이 그 하나이고, 삼층 미륵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이 그것이다. 미륵전은 삼층 건물로 만들어졌으나 1930년도에 이교도들의 방화에 의해 미륵장륙상이 크게 훼손되었고 이를 1937년도에 다시 복원하였고 그후 1993년에 이르러 완전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완료하였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이 세계가 생겼다 없어지기까지의 기간인 현겁 동안에 나타난다는 천 명의 부처 가운데 석가불은 네 번째이고 다섯 번째가 미륵불이다. 또한 관음신앙이나 지장신앙, 미타신앙 등 다른 신앙의 형태가 개인 위주의 신앙인데 비해, 미륵신앙은 민족이나 계층 등 집단적 신앙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미륵신앙 가운데서도 현세에서 공덕을 쌓아 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 미륵상생신앙이며, 보살이 빨리 이 땅에 와 구원해 주기를 기원하는 것이 미륵하생신앙으로 서양의 메시아 사상과도 비교된다. 상생신앙이 강한 인도나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하생신앙의 흔적이 많다.
고려시대로 접어든 이래, 미륵신앙을 중시하는 법상종이 선종과 화엄종 세력에 밀리면서 미륵신앙은 표면적으로는 두드러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관음신앙과 미타신앙 등과 함께 기층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한편, 역사에서는 후백제의 견원, 후고구려의 궁예, 고려 우왕 때의 이금, 조선 숙종 때의 여환처럼 스스로 미륵불임을 자처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민중들의 갈망을 가로챈 경우가 종종 있어서 미륵신앙의 부정적 측면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수문대사에 의해 화엄신앙과 아미타신앙, 약사신앙, 나한신앙이 한곳에 모여 `대적광전'이라는 명칭 아래 하나의 법당으로 건립되어졌으나 1986년 원인모를 화재에 소실되고 월주스님에 의해 대적광전(1992년 복원)과 나한전으로 따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적광전에 모셔진 5부처 6보살의 모습 - 향좌(向左)로부터 대세지보살, 아미타불, 관음보살, 석가모니불, 보현보살,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노사나불, 월광보살, 약사여래불, 일광보살이다. 원래의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고 근래에 새로 중건된 건물이다. 법당 안에 모셔진 여러 부처와 보살은 조선불교의 특징인 통불교적인 성격을 대적광전에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법화사상, 정토사상, 화엄사상, 미륵사상 등이 모두 표현된 모습이다.
미륵전이 용화삼회의 《미륵하생경》을 상징한 것이라면 고려때 조성된 '방등계단'은 《미륵상생경》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미륵전의 오른쪽 높은 지대(地代)에 고려시대의 석탑을 대표하는 5층석탑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석종형의 부도가 있는데 이곳을 '방등계단'이라 한다. 방등계단의 기단은 2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을 두르고 있는 난간은 도솔천과 그 아래 세계를 구분 짓고, 사천왕상은 도솔천 아래에 있는 사천왕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모든 일체중생이 존귀하고 평등하다”라는 평등사상을 표현하는 방등계단은 인간이 계법을 수지하고 십선행을 닦는다면 미륵보살이 있는 도솔천에서 왕생할 수 있으며 미륵보살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태어나실 때 같이 태어나 깨달음의 길로 인도 받을 수 있다는 《미륵상생경》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방등계단 앞에는 1998년에 적멸보궁을 지었다. 석조유물 중 미륵전 우측에 있는 방등계단에는 석종부도가 있다. 이 계단에 부도가 있으므로 탑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계단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방등계단 앞에는 오층석탑이 있다. 일반적으로 계단 앞에는 석등을 안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으나, 이곳에 석탑을 건립한 것은 불전의 정중탑(庭中塔:법당 앞의 탑)을 건립하는 방식으로 불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28호인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 -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그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지주는 높이 3.5m이며, 양쪽 지주의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는 반면에,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세로띠를 돋을새김하였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은 각각 지주의 위, 중간, 아래의 3곳에 뚫었다. 이처럼 구멍을 3곳에 두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적 특징으로,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23호),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6호)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당간지주 중에서도 가장 완성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8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진표율사 설화
진표는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매우 좋아하고, 또 활솜씨가 뛰어났다. 그래서 늘 활을 들고 들과 산을 누비며 사냥을 하였다. 어느 봄날, 사냥을 다니던 진표는 논둑에 앉아 쉬다가 개구리를 잡았다. 그 개구리를 버들가지에 메어 물에 담가 두고 산으로 가서 사냥을 하였다. 그리고는 개구리는 까맣게 잊은 채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 이듬해 봄이 되었다. 예나 다름없이 사냥을 하러 가던 진표는 구슬프게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들었다. 문득 지난해의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하여 그 자리로 가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개구리가 버들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어찌 먹기를 위하여 해가 넘도록 이런 고통을 받게 했단 말인가.」
진표는 크게 놀라 뉘우치면서 탄식했다. 그래서 불도에 뜻을 두고 결국 금산사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는 전설이 그 하나이다. (출처 : 불교용어 사전)
포토 및 글쓴이 : 서백 김춘식 - 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한국의 사찰(대한불교진흥원),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돌베개), 사찰의 상징세계(불광출판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화재청,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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