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86 - 차(茶)의 시배지로 알려진 하동 쌍계사 본문
하동 쌍계사는 절의 좌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의 물이 만나 합쳐지는 곳에 창건된 사찰로, 쌍계사(雙磎寺)로 사명이 지어진 이유를 가름할 수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로서 43개의 말사와 칠불암, 국사암, 불일암 등 4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리고 있는 대찰이다.
이 절은 723년(성덕왕 23)에 의상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 쌓인 계곡 위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육조의 머리를 취한 뒤 귀국하였다.
귀국 후 육조혜능의 정상을 봉안하기 위해 한라산·금강산 등을 두루 다녔으나 눈이 있고 꽃이 피는 땅을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리산에 오자 호랑이가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金堂) 자리에 이르렀다. 그곳이 꿈에 지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머리를 평장한 뒤 절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그 뒤 840년(문성왕 2)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중국에서 차(茶)의 종자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고 대가람을 중창하였다. 정강왕 때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벽암(碧巖)이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은 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차나무의 종자를 가져와 왕의 명으로 처음 심었던 곳이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50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국보 제47호 진감국사대공탑비, 보물 제380호 부도, 보물 제925호 팔상전영산회상도, 유형문화재 제28호 석등, 유형문화재 제185호 불경책판이 있다. 이밖에도 육조혜능의 초상화를 안치한 7층의 육조정상탑이 있고, 절에서 약 500m 거리에 있는 국사암 뜰에는 진감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았다는 천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고, 또한,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 도를 닦았으며, 1205년(희종 1) 보조국사 지눌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그 시호를 딴 불일암(佛日庵)이 있다.
일주문 편액의 글씨는 해강(海岡) 김규진의 필적이다. 해강은 18세 때 중국에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고 1902년경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익혀 1903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었다. 한편 '서화미술회', '서화협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의 서예부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근대서화 계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한 서예가이다.
전국의 궁전, 사찰 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해인사의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벽루의 '금수강산'(錦繡江山), 서울의 '보신각'(普信閣), '희정당대조전'(熙政堂大造殿) 등이 유명하다. 문인화가답게 山水와 花鳥를 그렸으며, 특히 호방한 필치가 돋보이는 묵죽이 뛰어나며 근대적 화풍이 엿보이는 '폭포'와 '말' 등의 작품도 있다.
入此門內莫存知解(입차문내막존지해) 이 문안에 들어서면 알음알이를 두지말라.
無解空器大道成滿(무해공기대도성만) 알음알이를 비운 그릇에 대도가 가득차리라.
일주문의 경내쪽에 걸려 있는 해강이 쓴 '禪宗大伽藍'이란 편액.
동방 지국천왕이 들고 있는 비파 가운데 특히 목이 꺽여 있는 비파는 당비파라고 하는 악기인데, 당비파(唐琵琶)는 사현비파로도 불린다.『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비파가 줄이 4줄로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비파의 목 부분이 ㄱ 자 처럼 굽었다. 현재는 연주되지 않고 악기만이 관련 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다.
금당(金堂)은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사리(頂相舍利) 안치하였다고 하여 정상사리탑전이라고 부른다. 처마 밑에 걸려있는 ‘六祖頂相塔’과 ‘世界一花祖宗六葉’ 이란 현판글씨는 추사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추사의 글씨가 이곳에 있게 된 사연은 이 절에 주석하던 차의 달인 만허스님이 차를 보내오자 그 보답으로 다종 일구를 보내어 육조전에 차를 공양케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때 글씨도 함께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
금당 안에는 육조정상석탑이 있다. 진감선사 비문에는 분명히 육조의 영당을 짓고 진영을 모셨다고 되어 있는데, 세상에는 육조 혜능의 두골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감선사가 육조영당을 지었다는 내용이 세인들에게 육조대사의 두골을 공양하는 것으로 와전 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육조정상탑으로 알려진 7층 석탑은 1886년 용당이라는 스님이 목압사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온 것이다.
금당의 좌우에 자리한 東方丈과 西方丈 건물.
팔상전의 본존인 석가모니불좌상.
영모전(永慕殿)에는 쌍계사의 실제 창건주인 진감선사의 진영을 비롯하여 지눌대사, 사명, 부휴, 벽송, 소요, 호원대사 등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팔상전과 마주하고 있는 청학루.
팔상전 구역의 청학루(靑鶴樓).
불전사물을 안치한 범종루(梵鐘樓).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위치한 요사채로, 요사채의 출입문 위에는 해탈문(解脫門) 편액이 걸려 있다. 그래서 사찰 가람배치에 관한 상식이 없는 답사객들은 해탈문이 왜 이곳에 있는지? 혼란스러울 것 같다.
신라 말기 최치원 선생이 손수 지은 비문이 1000년 넘게 세월이 흘렀음에도 보기 드물게 그대로 살아남은 국보라는 정도만 알면 된다. 대공탑비는 20여년이 지난 뒤 885년(헌강왕 11) 헌강왕이 입적한 혜소(慧昭)선사에게 진감(眞鑑)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어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887년(진성여왕 1)에 완성되었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이 쓴 것으로 우리나라 4대 금석문(金石文) 가운데 첫째로 꼽힌다. 제자들에게‘자신의 행적을 남기지 말라’고 한 승려로서 본연에 철저한 선사였다.
보기 드물게 귀부와 이수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다.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의 양식에 따라 거북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변했고 짧은 목을 하고 있다. 네모난 대석을 딛고 있는 귀부의 네발은 주름잡힌 긴 발로 되어 있다.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고 그 중앙에 마련된 비좌의 4면에는 운문을 조식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비신 정상에 놓인 이수는 양측이 비스듬히 역삼각형이 되고 4면에는 보주를 희롱하는 반룡이 힘차게 조각되었다. 이수 정면 가운데는 네모지게 제액을 만들어 <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비명이 양각되었으며, 그 위로 앙련판위에 보주를 얹었다.
석등은 화사석이 없어진 나머지 부재만 남아 대웅전 앞을 지키고 있다.
명부전 옆 바위에 마애불상이 고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안내문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큰 바위의 한쪽 면을 감실처럼 다듬어서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여래 상을 모셨다. 큰 머리에 육계가 벙거지를 쓴 것처럼 솟아있고 통통한 얼굴에 귀는 살아 있는 인물처럼 오목하다. 내려뜬 눈에 코와 입이 자그맣게 표현되어있다. 짧은 목에 두꺼운 법의는 가슴이 네모지게 파여 있고 옷 주름을 단순화 시켰다. 손은 법의로 두껍게 덮여 있어 수인을 알 수 없지만, 선정인을 짓고 있는 것 같다. 결가부좌한 다리도 불분명한데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비슷한 모습이다.
하동 쌍계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 제1378호) - 쌍계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삼계불좌상 중 아미타불을 제외한 석가모니불과 약사불, 그리고 약사불의 좌우협시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는 네 보살입상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왼편에 위치한 명부전 건물과 본존인 지장보살, 그리고 시왕들의 모습.
대웅전 건물 뒷벽에 그려진 반야용선圖.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나한전.
비로자불을 모신 화엄전.
<동국여지승람>에는 “정견모주가 대가야의 시조 아진아고왕과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을 낳았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이다. 가야산을 지킨다는 산신으로, 합천 해인사의 국사단에는 지금도 정견모주를 모신 산신도가 걸려 있다.
지리산 산신도 여산신이며, 보좌하는 시자들도 여성이다. 예로부터 원시 모계사회의 풍습으로 여산신이 많았을 것임에 불구하고 남아 있는 산신도는 거의 다 조선 후기 작품이다. 민속학자들은 대체로 가부장적인 유교의 확산으로,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면서 많은 여산신들이 사라지거나 할아버지로 대체됐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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