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84 - 산속에 숨었는가(隱), 자취(蹟)마저 알 수 없네, 은적사 본문
은적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대흥사의 말사이다. 해남의 진산인 금강산(481m) 북쪽 산중턱에 아담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은적사는 백제 초기에 창건된 고찰로서 삼남 일대에서는 명찰중의 한 곳으로 자리했었다. 이 절은 마산면 장촌리에 소재하며 마산면 면소재지 마을에서 약 4km 가량 올라가면 나타난다.
구전에 의하면 은적사는 강진 무위사, 해남 미황사, 대흥사 등의 큰집이라고 하나 확인하기 어렵다. 또한 이곳 바로 옆 계곡에 다보사(多寶寺)라는 큰 가람이 있어 은적사가 이 절의 부속 암자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다고 한다. 은적사는 『범우고(梵宇攷)』에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고 하여 그 위치만 나오며 그에 앞서 약사전에 철불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1883년에 작성된 「은적사사적기(隱蹟寺事蹟記)」에 철불에 대한 기록이 간략히 나온다.
은적사(隱寂寺)는 신라 진흥왕 21년(560)에 창건된 사찰로서 원래는 다보사(多寶寺) 은적암이였던 것이 19세기 중반 무렵에 다보사가 폐허가 된 이후 은적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중수 내용으로는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병화로 인해 응진각만 남고 폐허가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반세기가 지난 1648년(인조26)큰 석탑과 건물을 세워 중창 되었다.
강희연간(康熙年間)(1662-1722)에는 약사전의 종이 주조되기도 하였다. 그밖에 1856년(철종7)에 준활대사에 의해 행하여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김세신이 짓고 쓴 「은적암 약사전 중건기」 및 1872년(고종9)에 김익로가 지은 「은적사산신각창건문」등 절의 연혁을 전하는 현판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 은적사는 여러 차례에 걸친 중창불사가 이루어졌고, 또한 대흥사 승려들이 주석함으로써 자못 활기를 띠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약사전(藥師殿)에 봉안된 철불인 비로자나불상이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 불상을 통해 다보사의 창건시기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적어도 고려 초기에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에도 그 이름이 나와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는 다보사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은적사가 자리한 곳은 골짜기가 길고 그윽하여 풍경이 아름다우며 옛날부터 은사모종(隱寺暮鐘)이라 하여 은적사의 저녁 종소리를 해남팔경의 하나로 꼽기도 하였다.
전남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 64. 금강산 중턱에 자리한 은적사(隱跡寺) 전경.
약사전과 활선당, 그리고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은적사의 약사전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으로, 주심포계의 익공구조로 된 자그마한 전각이다. 이 전각에는 고려초에 봉안된 것으로 보이는 철조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2002년에 비로전을 신축해서 비로자나불은 그쪽으로 옮겨 모셨고, 현재는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다.
약사전의 약사불 모습.
약사전 불단 향우측 벽에는 가사장삼을 걸친 수염 난 스님이 덩치 큰 흰 호랑이 두 다리를 잡아 거꾸로 내동댕이 치면서 야릇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백호는 당황스럽고 괴로운 표정이다. 불법 수호차원의 경계를 넘어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18〜19세기 민중문화가 불교에 습합되어 만들어진 기상천외의 상상력이다.(옛 그림은 없어지고 지금의 벽화는 모사본이다.)
〈산해경〉에 따르면 백호는 오백살이 되면 털빛이 하얗게 변하고 천수를 누리는 동물이라고 한다. 민속신앙에서는 호랑이에 바탕을 둔 상상의 동물로 청룡(靑龍), 주작(朱雀), 현무(玄武)와 함께 사신으로 신격화 되었다. 사람이 태어나 집터나 생을 마치고 저 세상으로 떠나서도 청룡, 백호 명당자리를 찾게 되는데 여기에서 백호는 용처럼 신격화되어 있어 낯설지 않은 생활 문화 속 한 부분이다.
특히 백호는 사악한 것으로부터 지켜주는 벽사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백호의 영험함과 신성함은 수준 높은 종교적 차원에서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었으며,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의미를 부여하는 요인이 되었다.
약사전 마당에는 3층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이것 역시 처음부터 은적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계리 어느 집 마당에 있던 것이다.
높이 약2.2m가량의 이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꼭대기에 상륜을 올려놓은 일반형으로 상륜 부재가 남아 있지 않다. 조성연대는 고려 중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탑은 은적사의 전신인 다보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그리고 은적사를 둘러싼 주변의 풍경이 일상에 지친 마음을 치유해 준다. 입구에 커다란 전나무가 일주문 역할을 자처하고, 전나무 오른쪽으로는 비자나무들이 알싸한 향을 내뿜는다. 비로전 뒤쪽과 왼쪽으로는 커다란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다. 근처에는 차밭도 있다. 차밭은 무려 33만㎡에 이를 정도로 넓다.
활선당(活禪堂) 옆에 위치한 지장전 전경.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은적사에는 ‘유명인사’가 하나 있었다. 매스컴을 통해 여러 차례 알려진 하얀색 개였다. 스님들이 기거하는 심검당을 지킨다고 해서 이름이 ‘심검이’인 이 개는 진돗개와 시베리안허스키의 잡종으로 오른 눈은 갈색이고, 왼 눈은 파란색이다. 첫 인상은 사나워 보이지만 사람을 잘 따르는 편이라 은적사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한편 해바라기가 영글어갈 무렵의 은적사는 주위 2키로미터를 둘러싸고 있는 해바라기들로 장관을 이룬다.
근래에 새로 지어진 비로전의 본존불은 연화장(蓮華藏)세계의 교주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다. 연화장세계란 연꽃에서 출생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있는 세계라는 뜻으로 이상적인 불국토를 가리키는 말이다. 경전상으로 볼 때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의 교주이다.
『화엄경』의 연화장세계가 진리의 빛이 가득한 대적정의 세계라 하여 대적광전이라고도 한다. 소의경전인 『화엄경』을 근거로 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뜻에서 비로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해당 사찰의 부속전각에 모셔놓은 경우도 비로전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 빛처럼 우주에 가득 비치는 것을 형상화 한 것’이 비로자나불이다. 화엄신앙의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자체’를 뜻하는 법신불이기 때문에 형상화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7세기 무렵 중국에서 불상이 만들어졌다.
태양을 상징하는 철조비로자불은 하반신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다행히 상호(相好)에서 복부까지는 비교적 원형을 잃지 않고 잘 남아 있다. 조성연대는 비로자나불이라는 존명과 재료가 철이라는 점에서 통일신라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파손된 부분은 최근에 나무로 복원하였으나 비례가 맞지 않다. 상호는 대체적으로 원만상이나 양쪽 볼에 살이 약간 빠져 있어 자비스러운 인상은 약하다.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육계(肉髻)는 작고 낮아 머리와 구분하기 어렵다. 이마는 좁으며 중앙에 백호(白毫)가 있다.
눈은 반개하여 거의 일자형을 이루고 있다. 호형의 눈썹이 눈 밑 부분까지 내려와 특이하다. 콧날은 오뚝하다. 턱 밑에는 1조선의 음각선이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있다.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서 어깨에 거의 닿고 있으며 귓불 부분이 금동불처럼 관통되어 있다.
특히 법의의 형태나 두 팔에 걸쳐진 옷주름 등은 865년에 조성된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불, 858년에 만들어진 장흥 보림사 철불과 닮은 점이 많다. 이는 신라 하대 비로자나불의 전형 양식을 고수하면서도 오히려 고려시대로 연결되는 작품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조성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다. 오른쪽 어깨에서 복부로 내려간 의문(衣文 : 옷자락 무늬)은 거의 수직을 이루고 왼쪽 어깨에서 내려간 의문은 직선을 이루다가 복부에서 사선이 되어 오른쪽으로 흐른다.
겨드랑이 의문은 U자형의 3선이 반복되어 있다. 승각기는 가슴 위까지 올라와 있는데 일직선으로 평행을 이루며 띠 매듭이 없는 형식으로 보림사 철불과 일치하고 있다. 수인은 지권인을 결하고 있다. 통례와는 반대로 왼손이 위로 올라가 오른손의 집게손가락 첫째 마디를 잡고 있다. 이 불상은 양쪽 어깨가 당당하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상호를 보이는 통일신라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신축한 전각으로 현재는 비어 있는 건물.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삼성각 건물의 모습이다. 중앙에는 칠성여래를 봉안하고, 좌우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을 모신 구도이다.
삼성각에 모셔진 치성광여래와 산신, 그리고 독성님의 모습.
비로전 앞마당에서 본 심검당 전경.
비로전에서 본 약사전과 요사채의 모습.
▣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전설
은적사에는 철불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1890년대 어느날, 마산면 앞 바다(산막포구)에 불상이 나타났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공양을 드리며 서로 모셔가고자 하였으나 불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은적사 스님이 가서 공양을 하자 그때까지 꿈쩍도 않던 불상이 가볍게 들려져 은적사 대웅전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 포토 및 글쓴이 : 서백 김춘식 - 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한국의 사찰(대한불교진흥원),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허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민국 구석구석,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의 글, 해남군청, 일요신문, 불교신문,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
'사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백의 사찰이야기186 - 차(茶)의 시배지로 알려진 하동 쌍계사 (0) | 2019.03.23 |
---|---|
서백의 사찰이야기185 - 아홉 마리 용이 살던 곳, 九龍寺가 아닌 龜龍寺(구룡사) (0) | 2018.09.04 |
서백의 사찰이야기183 - 천축국의 영축산과 비슷해서 붙여진 절이름, 천축사 (0) | 2018.04.02 |
서백의 사찰이야기182 - 뛰어난 절경의 관악산 연주대에 오르다. (0) | 2018.04.02 |
서백의 사찰이야기181 - 궁녀 최복순이 기도로 영조를 낳았다는 절, 용흥사 (0) | 2018.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