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80 - 도심 속의 천년고찰, 서울 삼성동 봉은사 본문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80 - 도심 속의 천년고찰, 서울 삼성동 봉은사

徐白(서백) 2017. 6. 25. 10:55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인 봉은사는 신라 원성왕 10(794)에 연회국사가 창건한 견성사(見性寺)가 그 전신이라 전해지는 고찰이다. 그 뒤 고려시대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가 연산군 4(1498)에 성종의 능인 선릉의 동편에 있던 견성사를 크게 중창하여 원찰로 삼고, 절 이름을 봉은사(奉恩寺)로 고치게 되었다.

 

1501(연산군 7) 나라에서 절에 왕패(王牌)를 하사하였다. 중종 25(1530) 정현왕후가 승하하여 선릉에 합장되자 봉은사는 그 원찰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지게 된다.(왕패란 임금이 궁가(宮家)나 공신에게 논, , , 노비 따위를 주거나, 공이 있는 지방 관리에게 부역을 면제시킬 때 주는 증명서를 이르던 말)

 

명종 대에 와서 봉은사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명종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실권을 쥐게 된다. 그는 조정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승 보우(普雨)를 등용해 불교의 중흥을 꾀하는데, 봉은사가 바로 그 중심에 있게 된다. 문정왕후는 우선 중종에 의해 완전히 폐지되었던 선종과 교종의 부활을 명한다.

 

그리하여 1551(명종 6) 봉은사는 선종(禪宗)의 수사찰(首寺刹), 남양주 세조의 능인 광릉의 봉선사(奉先寺)는 교종의 수사찰로 삼았으며, 보우(普雨)를 주지로 삼아 불교를 중흥하는 중심도량이 되게 하였다.

 

또 문정왕후는 보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승과(僧科)를 다시 실시케 한다. 승과는 명종 7(1552) 현재의 코엑스 자리인 봉은사 앞 벌판(승과평)에서 첫 시험이 치러진 뒤 문정왕후가 승하한 이듬해까지 3년마다 한 차례씩 실시됐다. 보우는 1562년에 봉은사를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고, 절이 있던 자리에는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옮겨 온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명종 18, 명종의 유일한 혈육인 왕세자가 죽자 후사를 잇기 위해 보우의 권유에 의해 양주 회암사에서 대대적인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준비하던 도중 문정왕후가 갑자기 승하한 것이다. 조정 안팎의 반대 속에서 오직 문정왕후에 의존하여 불교 부흥을 꾀하던 보우는 하루아침에 요승으로 지목되어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어 제주목사에 의해 장살(형벌로 매를 쳐서 죽이던 일을 이르는 말)되었다.

 

비록 보우의 노력은 중도하차 하였지만 조선시대 불교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조선시대하면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잘 알고있는 서산대사(휴정)나 사명대사(유정)가 명종 대에 실시한 승과를 통해서 배출된 인재들이며, 이들에 의해 조선 불교의 굵은 물줄기가 발원하게 되었다 할 수 있다.

 

보우의 몰락과 더불어 봉은사의 사세도 급격히 기울게 되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1637(인조 15)에 다시 중건하였고, 다시 화재로 소실된 이후 중건과 중수를 거치면서 법등을 이어왔고, 일제강점기 때는 경성 일원을 관장하는 31본산이 되었다.

 

1939년 화재로 板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고, 1972년 동국역경원의 경전번역소가 이곳에 들어왔다. ‘大雄殿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특히 板殿편액은 김정희가 죽기 3일 전에 쓴 것이다. 절의 판전에는 화엄경소를 비롯한 많은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는데 현재 총 163749매에 달한다.

 

봉은사 부속시설로 역경원이 설치되어 있으며 판전 서쪽의 명성암과 승방 등에서 대장경의 한글 번역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봉은사 일대 18000여 평이 사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민간인 유료공원으로 개설허가가 나자 최초로 봉은사가 신청한 것인데, 이 계획에 의하면 18000여 평의 부지에 기존의 종교시설과 주민 휴식시설, 산책로 등을 조성하고 공원 내에 식수사업(植樹事業)을 하여 도시 속의 녹지대로 만드는 것 등으로 되어 있다.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奉恩寺)에 도착하면 맨 먼저 만나는 건물이다. 건물의 평방 위에는 '奉恩寺' 편액이 걸려 있다. '修道山 奉恩寺 首禪宗(수도산 봉은사 수선종)'이라 쓴 이 글씨는 승려 출신 서예가로 주로 경남 지방에서 활동했던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峯) 선생의 필적이다.  

왼쪽 비석은 봉은사주지 나청호대선사 수해구제공덕비(奉恩寺住持羅晴湖大禪師水害救濟功德碑)이다. 1925년 한강을 범람케 한 을축년 대홍수는 유래없는 엄청난 재난이었다고 하는데, 그때 봉은사 주지로 있던 나청호 스님은 사중을 불러 모아 배를 띄우고 사람들을 건져냈다. 한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무려 708명이나 구해냈다.

 

그리고 절의 재물을 모두 풀어 이재민을 구호하였다. 조선총독부조차 손을 놓고 있던 상황에서 한 승려와 사찰의 힘만으로 이렇게 많은 인명을 구해냈으니, 당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스님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오른쪽은 남호대율사비(南湖大律師碑)이다. 이 비의 주인공 남호 영기(南湖 永奇, 1820~1872) 스님은 1855년 봉은사에 와서 판전의 화엄경판을 판각하신 분이다. 스님은 거의 평생 동안 경전을 베껴 쓰고, 그것을 판에 새기는 일에 열중했다.

 

화엄경80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의 경전으로 불교에서는 대승경전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서적이라 한다. 스님이 판각한 것은 정확히 말하면 화엄경 주석서의 일종인 화엄경수소연의초, 조선시대 이래 화엄경 연구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교재였다고 한다.

 

아마 스님의 판각 작업이 없었다면 판전도 지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유명한 추사의 板殿글씨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문화사적으로도 스님의 화엄경판각은 소중한 의미를 띠고 있다지금도 그때의 판전과 경판, 그리고 추사의 글씨가 남아 있고, 그 내력을 담고 있는 비석까지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법왕루 전경.

법왕루의 누하진입 모습.

대웅전 마당쪽에서 보면, 법왕루 처마 아래에 선종종찰대도량(禪宗宗刹大道場)’이라는 전서체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선종의 으뜸가는 도량()’이라는 뜻의 이 글씨는 특유의 전서 글씨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창 오세창(1864~1953)의 필적이다. 관서(款書)에 불기 2970년에 썼다 하였으니, 그해는 1943년이 된다.

1975년에 조성한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한 삼층석탑과 석등이 위치한 대웅전 앞마당이다.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를 위해 달아놓은 흰 연등들이 대웅전도 삼켜 버리고 하늘도 덮었다. 봉은사의 하얀 연등들의 장관에 매료되어 한동안 넋을 놓고 말았다.

궁궐에 가면 월대를 오르는 계단 가운데에는 봉황이 새겨진 사각형 돌이 있는데, 이것을 답도(踏道)라고 부른다. 답도란 '가마를 탄 임금이 그 위로 지나가는 길'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조형물이다. 궁궐에서 볼 수 있는 답도가 봉은사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에도 조성되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

대웅전 편액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데,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진관사 대웅전 현판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그리고 현판과 단청한 목조건물의 보존을 위해 그물을 쳐 놓았는데, 이를 '그물 부'와 '가리게 시'를 써서 '부시'라고 부른다. 단청된 목조건물은 날짐승들의 배설물에 의해 부식되거나 썩기 때문에 새들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1982년에 중창한 봉은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본존불로, 좌우에는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후불탱화는 삼여래회상도를 안치하였고, 위로는 도솔천 내원궁으로 이루어진 닫집을 두었다.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신 것은 약사여래불께 현세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아미타불께는 내세의 안온함을 기원하는 우리 불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함께 담았기 때문이다.

범천과 제석천, 위태천을 함께 모신 신중탱의 모습.

대웅전 안에 있는 범종이다. 이 범종은 고려가 멸망한 해이자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 에 만들어진 것이다. 범종 천판 가장자리에는 고려 후기 범종의 주요 특징인 입상의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 범종의 보살상이 한결같이 입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는 기점이 바로 이 종 이후부터이니 크기는 작지만 소중한 문화재이다. 또 유곽 아래 두 귀에 자그마하게 늘어진 술 장식도 이 종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이다. 명문에 의하면 고려시대 천녕현(경기도 여주)에 있던 장흥사(長興寺)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종이라 한다.

영산전 내부 불단 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좌우에는 부처님의 제자를 대표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협시하고 있고, 그 바깥으로는 16나한을 모신 모습이다.

굵은 글씨에 예서체로 靈山殿이라고 쓴 편액은 글자의 구성이나 배치를 사전에 충분히 고려한 듯 자에서는 가운데의 자 하나를 빼버려 복잡함을 피했고, ‘자는 위로 바짝 올려붙여 굵은 글자 셋이 나란히 놓일 때의 답답함을 시원스럽게 극복했다. 이 글씨는 종두법을 실시했던 지석영의 형이자 20세기 초에 활약했던 문인화가 백련 지운영(白蓮 池雲英, 1852~1935)이 쓴 것이다.

 

가는 예서체 글씨로 적은 北極寶殿’ 편액.

1996년에 조성한 미륵대불의 모습.

봉은사 판전은 정면 5,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이익공집이다. 건물 안에는 불단을 제외한 삼면 벽에 설치된 판가에 경판들이 가득하게 들어차 있다.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경판은 모두 합하여 3,749장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3,175장이 남호 스님이 판각한 화엄경판이고, 나머지 유마경, 금강경, 아미타경을 포함한 15종의 경전 목판이라 한다.

추사는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52년 풀려나 과천의 별서인 과지초당(瓜地草堂)으로 돌아온다. 이때부터 추사는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학문과 불교에 몰두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추사는 죽기 몇 달 전인 1856년 여름 무렵에는 아예 봉은사에 거처를 마련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18569월 판전이 완공되자 추사가 생애 마지막 불꽃으로 피워올린 글씨가 板殿이란 두 글자이다. 이 글씨는 추사가 죽기 사흘 전에 썼다는 말이 전해지는 절필작이다. 편액에는 板殿이란 큰 글자 옆에 세로로 七十一果病中作(칠십일과병중작)’이라고 덧붙였다. 추사가 1856년,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병을 앓는 중)에 쓰다'라는 뜻이다.

 

이때 병을 앓는다는 말은 단순히 몸이 아프다는 뜻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추사는 불가와 관련이 있는 글씨을 쓰거나 승려들에게 글을 보낼 때 흔히 病居士임을 자처했다. 이 말은 병을 핑계로 부처님의 제자들과 자주 토론을 하여 그 내용을 경전으로까지 남긴 유마경의 주인공인 유마거사에 자신을 빗댄 것이다. 추사는 이 글을 10월 7일에 썼고 10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추사 김정희 선생 기적비(紀績碑).

고종 7(1870)에 세운 흥선대원군 불망비를 보호하는 비각.

興宣大院位永世不忘碑(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라고 적힌 불망비이. 예서체의 비문 내용은 봉은사의 땅이 남의 농토에 뒤섞여 여러해 송사에 시달렸는데 흥선대원군 덕택에 해결되어 그 은혜를 돌에 새겨 영구히 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정 스님께서 봉은사에서 수행하실 때, 집필 활동을 하시며 머물렀던 곳의 앞마당 전경.

 

[포토 및 글쓴이 : 서백 김춘식 - 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한국의 사찰(대한불교진흥원), 답사여행의 길잡이 서울편(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봉은사 홈페이지,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