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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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176 - 천등산에 내려앉은 천년고찰 금탑사

徐白(서백) 2017. 6. 6. 19:29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봉림리 700. 천등산(天燈山)에 위치한 금탑사(金塔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天燈山千燈山(천등산)’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인도의 가섭존자가 어머니를 위하여 천등 불사를 한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때인 7세기 말경에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초창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절 이름은 창건 당시 금탑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인도 아육왕이 건립한 보탑을 가리키는 것으로, 건립 고사를 기리기 위하여 금탑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현재 금탑사에 소장되어 있는 목음각판재(木陰刻板材)의 기록을 통해 정유재란(1597, 선조 30) 때 불타버린 것을, 1603(선조 36)에 궁현과 옥순이 중건하여 수백명의 승려가 머물렀고, 1644(인조 22) 무가와 계환이 극락전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1692(숙종 18) 화재로 극락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고, 1767(영조 43) 경징, 획심, 독일이 극락전을 중건하였으며, 1834(순조 34) 해월이 다시 극락전을 중건하였다. 1845(헌종 11)에도 천재지변을 당해 1846(헌종 12)에 중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61(철종 12) 유명이 중창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급속히 쇠락하였다.

 

최근에는 다시 중건 불사가 이어져, 1988년 무너진 산신각을 삼성각으로 고쳐지었고, 1991년에는 요사를, 1992년에는 극락전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된 극락전을 비롯 명부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한편 극락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건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이다.

 

그 밖에도 약 250여 년 전에 제작된 보물 제1344호 고흥 금탑사 괘불탱이 보관되어 있고, 1,000여 년 전에 그렸다는 원효와 의상의 영정이 있어 주목을 끌지만, 그 연대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없다. 이 절에는 지상 약 5m의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약수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마시기 위하여 찾아온다. 또한 절 주변에는 비자나무숲과 독치성(禿峙城) 등 유서 깊은 곳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쇠락했으나 그 자세한 연혁을 알 수 없으며, 최근에 들어와서는 1974년 범종이 봉안되고, 1982년 신중탱화의 개수 불사가 있었다. 1991년 이후 지금까지는 서림(瑞林) 스님이 주석하시면서 1992년에 극락전 및 축대를 보수함과 아울러 진입 도로를 확장하고 이후 건물에 대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보수를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관이루(觀耳樓) 모습.

 

금탑사 극락전은 금탑사의 주불전으로 앞면 3, 옆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에 다포식의 건물이다창방과 평방은 굵은 부재로 하여 길게 좌우를 빼냈고 그 위에 기둥 사이에 포를 배치하였다. 기둥과 평방이 결구된 부분의 내부에 몸통을 휘감은 용 모양을 만들었고, 밖으로 용머리를 만들었으며, 포는 외3출목에 내4출목이다.

 

기단을 쌓는 석재의 모양과 층의 모양에 따라서는 막돌로 층의 줄눈을 맞추지 않고 쌓는 막돌허튼층쌓기, 막돌로 층을 맞추어 쌓는 막돌바른층쌓기, 그리고 다듬은 돌로 쌓는 다듬은돌허튼층쌓기, 다듬은돌바른층쌓기의 수법들이 있다. 금탑사 극락전은 막돌허튼층쌓기로 높은 기단을 쌓앗고, 건물의 주춧돌도 덤벙주초라고 하는 자연석초석을 사용하여 두리기둥을 세웠다.

 

극락전 어칸 양쪽 기둥 위에는 청룡과 황룡의 용두를 생동감 있게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독특하다. 대개 법당 어간문 좌우 기둥 위에 바깥으로는 용의 머리 부분을, 내부에는 용의 꼬리 부분을 조각한다. 이는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이 중생들을 태우고 극락세계로 인도해 가는 반야용선임을 상징한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타락한 이들을 심판하고자 하느님이 대홍수를 내려 모든 생명이 전멸했지만, 선하고 정의로운 노아의 가족과 동물만이 방주(方舟)에 타서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노아의 방주가 기독교에서 회자되는 구원의 배라면 불교에서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 구원의 배이다.

 

극락전 내부 수미단 위에는 아미타삼존불(좌우협시는 관세음과 대세지보살)을 모셨으며, 특히 관세음보살은 왼손으로 줄 달린 정병을 들고 있어서 다른 사찰의 관음보살과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면서 중앙 부분만 우물천장으로 보개천장을 설치하였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2분합의 빗살문은 규모가 대단히 크다.

 

극락전의 신중탱.

 

천장은 중앙부분만 우물천장으로 보개형천장을 꾸몄는데, 연꽃과 게, 물고기 등의 문양들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다른 사찰에서 보지 못한 재미있는 그림이 있었지만 천장이 높아 근접촬영을 하지 못해서 아쉽다. 사진에 표시된 초록색 원 안의 그림인데, 한 쌍의 토끼가 방아를 찧는 모습을 그렸다. 보름달 속에 나타나는 바로 그 토끼들과 같은 모습이다.

 

극락전 내부에는 용의 꼬리 부분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위 사진은 귀공포에 조각된 용미의 모습이다.

 

어간문 기둥 위의 용두.

 

극락전의 동쪽에 위치한 무위당(無爲堂).

 

'無爲堂' 편액.

 

극락전의 서쪽에 위치한 응향각(凝香閣) 건물이다. 이 건물에는 '凝香閣' 외에 '金塔寺'라는 사명(寺名)을 적은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金塔寺' 편액의 관서(款書)에는 '十三世'라는 글과 '孫文暻'이라고 새긴 낙관을 찍었다. 이 글씨는 13살 소년 손문경이 적은 것이다. 손문경(1913~1972.1. 1)은 고흥군 도덕면 도덕리에서 출생하였고, 어릴 때부터 서예가 신동으로 소문이 나서 고흥 금탑사 현판과 쌍충사 현판 등을 썼다고 한다. 국회의원을 지냈고 호는 구암(龜巖)이다. 

   

응향각에서 '凝香'이란 '향소리가 그윽하다' 혹은 '향소리가 은은하게 베어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극락전 앞에서 본 관이루(觀耳樓)의 모습이다. 전형적인 산지가람인데도 불구하고 누하진입이 아닌 우각진입을 하도록 관이루를 세웠다.

 

금탑사의 약수 

 

부처님 입멸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일체중생을 제도하도록 부촉(咐囑)받은 지장보살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시왕을 함께 봉안한 법당이 명부전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다 구제한 다음 부처님이 될 것을 서원한 보살로서, 아주 큰 서원을 세웠다하여 대원본존이라고도 한다.

 

지물은 대개 육도를 상징하는 육환장(석장)을 짚고, 어떤 때는 보주(寶珠)를 들고 있으며, 부처님 입멸후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6도의 중생을 제도할 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부촉받은 보살이다.

 

'冥府殿' 편액

 

명부전의 지장보살은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좌우협시로 모시고, 열 분의 명부시왕(시왕은 도교의 신이었는데 불교에 수용되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초기에 유입되었다.)을 봉안하였다.

 

서림 스님이 거처하는 요사채 전경

 

 

나한전의 불단 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제화갈라와 미륵보살을 봉안하였고, 그 좌우 바깥쪽에는 부처님의 제자인 가섭과 아난존자를 시립케하고, 16분의 나한상을 모셨다.

 

 

삼성각에는 제물을 주는 산신과 자식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 그리고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는 독성을 함께 모셨다. 이 삼성은 불교 고유신앙이라기 보다는 도교나 토착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경우이다.

 

 

관이루(觀耳樓)에서 서림 스님과 차담을 나누며 빗살문의 아름다움을 한 컷씩 ~ 찰깍! 그리고 '觀耳樓' 편액의 글씨는 초헌(艸軒) 정문길(鄭文吉)의 필적이다.

   

'고흥 금탑사괘불탱'은 야외에서 법회를 할때 걸어놓고 예배하는 의식용 불화이다. 이 금탑사 괘불탱은 1778(정조 2) 조선 후기의 화승 비현, 복찬, 쾌윤 등이 함께 조성했다. 이 불화는 세로 506, 가로 638의 크기로, 괘불로는 드물게 옆으로 긴 횡폭으로 석가불, 약사불, 미타불의 삼세불을 그린 간략한 구성이다. 각 협시보살이 시립한 삼세불은 화면을 횡으로 삼등분하여 중앙에 석가불을 조금 크게 그렸고,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하였다. 석가불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가섭과 아난존자가, 아미타불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약사불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그리고 천부중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괘불은 둥글고 넓은 얼굴 윤곽에 작은 이목구비와 건장한 신체, 붉은 바탕 위 사용되는 흰 선 등 18세기 후반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본존은 큼직한 정상계주, 각이 진 어깨, 발목의 치견 장식이 특징적이다. 이 괘불을 조성한 비현과 쾌윤은 흥국사 괘불(1759)과 만연사 괘불(1783)을 조성한 화승이다. 당시 최고의 불화 실력을 갖추었던 이들의 작품을 통하여 18세기 후반의 불화, 특히 전라도 지역의 불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포토 및 글쓴이 : 서백 김춘식 - 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한국의 사찰(대한불교진흥원),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허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