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61 - 눈병 완치와 소경의 눈을 뜨게 해준 절, 천등산 개목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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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161 - 눈병 완치와 소경의 눈을 뜨게 해준 절, 천등산 개목사

徐白(서백) 2017. 1. 2. 21:20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 중턱에 자리하고 개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본사 고운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681) , 능인대사가 대망산 바위굴에서 진리 탐구에 전념한 지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밤 천녀(天女)가 나타나 말하기를 소녀는 천국 상제의 명을 받고 이 세상에 강림하였는데 귀랑(貴郞)의 벗이 되고자 하오니, 원컨대 함께함이 어떠하오하니 능인대사는 크게 화를 내며 이 사람은 안위를 원하는 자가 아니고, 또 천명지위(天命之謂)는 부당지사(不當之事)니 즉시 귀가하라하고 천녀의 유혹을 뿌리치면서 깨달음을 주어 돌아가게 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하늘의 천녀가 내려와 밤에도 공부에 지장이 없도록 등불을 비추어 능인대사(혹은 의상대사)가 공부를 마치고 득도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산 이름을 '하늘이 불을 밝혔다'는 뜻으로 '천등산(天燈山)으로 개칭하고, 수도하던 바위굴은 천등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절도 창건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천등산은 개목산(開目山)으로도 불린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의상대사가 산 정상 근처의 큰 바위 아래에서 수도를 하는데, 하늘에서 큰 등불을 비춰주어 99일만에 도를 깨우치게 되었다. 그래서 의상은 신통한 묘술로 하루에 1시간씩 99일 동안 99칸의 거대한 절을 짓고, '하늘이 불을 밝혔다'는 뜻으로 천등사(天燈寺)라고 불렀으며, 그 후 이 절은 부처의 영험이 많이 나타나 많은 불자들이 찾아와 기도하였으며, 기도의 영험으로 소원을 성취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포은 정몽주가 이 절에서 10년간 공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고, 또 개목사의 이름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영가지(永嘉誌)>에 실린 내용으로 원래는 절 이름을 흥국사(興國寺)였다. 당시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많았는데 이 절이 건립된 후 소경들이 없어졌다 하여 이름을 개목사(開目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개목사 덕분에 소경들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우리 중생들이 눈을 뜨고 있어도 실상을 보지 못하면 여전히 소경임을 개목사가 일러 준다.  

나머지 하나의 이야기는 조선 초기의 재상인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오게 되었다.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와 보니 이상하게도 안동 지방에 눈병 환자가 많았다. 풍수지리에 밝은 맹사성은 안동 지형을 가만히 살펴보았는데, 안동의 지세를 보니 눈병이 많은 지세였다. 그래서 당시 흥국사(興國寺)라 불리던 절을 중수하면서 개목사(開目寺)로 사명(寺名)을 바꾸었는데, 그 후부터는 차츰 눈병 환자가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맹사성의 자와 개목사의 개목에 주목하여 풍수지리적인 단점은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당시 천대받던 사찰이 전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눈병을 낫게 해 줄 정도로 중요한 신앙 형태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원통전(圓通殿)과 요사채, 그리고 출입문으로 사용되는 건물 등이 있다. 이 중 원통전은 보물 제242호로 지정된 정면 3, 측면 2칸의 조선 초기 건물이다. 이 법당의 건물 전면은 툇마루를 깔았고, 후면에는 온돌방을 만들었으며, 중앙의 후벽에 불단을 설치하였는데, 법당에 온돌방을 만든 것으로는 조선 초기 건물 중 아주 희귀한 것이다.

 

개목사 원통전(圓通殿)1969년 중수할 때 나온 상량문의 천순 원년(天順 元年)으로 보아 1457(세조 3)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찰 출입문으로 이용되는 당우는 1819(순조 19)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창건 당시에는 큰 규모의 사찰이었으나 점차 쇠락해져 갔으며, 개목사 창건 이후의 연혁도 전하는 것이 없다.

 

하늘의 천녀가 등불을 비추어 주어 능인대사(혹은 의상대사)가 공부를 마치고 득도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하여, 원래의 대망산에서 산이름을 천등산으로 바꾸었고, 수도했던 바위굴은 천등굴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천등산 정상의 표지석이다. 아래의 바위굴은 능인대사가 수도했던 천등굴의 모습이다.

 

 

 

 

개목사의 출입문에 해당하는 당우로, 좌측에는 문간방을 만들었고, 우측은 마루로 만들어 작은 범종을 두고 있다.

 

출입문 위에 걸려 있는 '천등산 개목사' 현판.

 

원통전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요사채.

 

절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바로 개목사의 주불전인 원통전이 위치하고 있고, 우측 뒷편에는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건물은 막돌 위에 긴 돌을 쌓은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기단 윗면에는 넓적한 다듬지 않은 자연석 주춧돌을 놓았다. 포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둔 주심포식으로 결구되었다. 기둥은 배흘림이 매우 약한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다.

앞면의 각 기둥 사이에는 ()’자 모양의 살문을 달았는데, 가운데 정간은 4분합이고 좌우 협간은 2분합이다. 나머지 3면은 뒷면 북쪽 협간에 1짝의 정자살문이 달린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벽으로 처리되었다. 툇간의 바닥과 건물 안의 바닥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개목사의 원통전은 보물 제242호로 지정된 목조건물로, 정면 3, 측면 2칸, 맞배지붕에 측면에 풍판을 단 조선 초기의 건물이다. 이 법당의 건물 전면은 툇마루를 깔았고, 후면에는 온돌방을 만들었으며, 중앙의 후벽에 불단을 설치하였는데, 법당에 온돌방을 만든 것으로는 조선 초기 건물 중 아주 희귀한 것이다.

 

측면에서 본 원통전.

 

건물의 앞면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지만, 옆면은 앞쪽에 1칸의 툇간을 덧붙여 마치 유교건물인 대성전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가운데 칸인 정간만 법당이었고, 좌우의 협간은 돌방이었으며, 건물 서쪽에는 1칸반 규모의 부엌이 덧대어 있었다. 1969년에 해체하여 보수하면서, 방과 부엌을 모두 없앤 법당으로 바꾸었다.

 

원통전 전면 툇마루와 원통전 편액 모습.

 

원통전 건물은 건물은 1969년에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천순원년(天順元年)’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457(세조 3)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은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존불인 관세음보살의 좌측에는 확인이 곤란한 보살좌상을 모셨고, 우측에는 주존불과 같은 관세음보살을 함께 봉안한 모습이다. 뒤쪽의 후불벽에는 석가모니불을 그린 탱화가 걸려 있으며, 보살좌상 위에는 간략한 모습의 보개형 닫집이 설치되었다.

 

▲ 원통전 서쪽 벽면에 걸려 있는 천수관음보살도.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즉 대승불교의 꽃은 관음보살이며 관음보살 중에서도 천수관음보살이다. 천수관음보살은 천개의 팔과 천개의 눈을 갖추고 있으며, 육도 중에 주로 지옥을 관장하고 있고, 관음 중에서도 가장 힘있는 구제자로 신봉되고 있는 보살이다.

 

주존불의 우측(향좌)에 모셔진 지장시왕도.

 

주존불의 좌측(향우)에 모셔진 신중탱.

 

원통전 툇마루에서 본  출입문이 있는 당우의 모습.

 

출입문 우측 마루 위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범종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는 종이지만, 천판 위의 용뉴는 포뢰를 앉혔고, 상대와 하대, 그리고 아홉 개의 도들꼭지가 있는 유곽에는 덩굴무늬(당초문)이 새겨져 있고,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구름 위를 날고 있는 비천상을 조각하였다.

 

 고려 후기 충신인 포은 정몽주가 한때 개목사에서 수학했다고 하며, 훗날 정몽주가 당시 흥국사(개목사의 옛 이름)를 추억하며 지은 시구가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흥국사에서 공부할 적에 / 때때로 밤이면 꿈속에서 청산에 놀러 갔네.

옛적 친하던 주지 스님 생각 간절하니 / 틈내어 나를 위해 한 번 다녀가구려.

(사진촬영 및 글쓴이 : 서백 김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