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63 - 십승지지의 한 곳에 속하는 명당 사찰, 공주 마곡사 본문
정유년 새해가 밝은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유난히 포근한 겨울이라 바깥 활동에는 무척 좋은 날씨였다. 1월 8일 두 번째 일요일, 오랜만에 사단법인 미소원 회원들과 충남 공주 마곡사로 문화답사를 다녀 왔다.
공주는 본래 ‘곰 熊’, ‘내 川’자의 웅천(熊川)으로 불렀는데, 백제가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곰 熊’, ‘나루 津’자를 써서 웅진(熊津)이라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당나라에서 이곳 웅진에 웅진도독부를 두었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를 몰아낸 후에는 웅천주로 하였다가 경덕왕 때 웅주(熊州)라고 하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을 공주(公州)라고 고쳐 불렀다.
또한 지명 유래에 다음 두 가지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먼저 공주의 진산인 공산(公山)이 있는데, 산 모양이 공산의 ‘公’자와 비슷하기 때문에 공주(公州)라고 불렀다고 한다. 두 번째 설은 「곰주(웅주)」가 음이 비슷한 ‘공주’로 바뀐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본사 마곡사는 640년(백제 무왕 41년, 신라 선덕여왕 9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신라의 승려가 백제 땅에 세운 절이라 하니, 다소 의구심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흔히 하는 말로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있다. 봄의 풍경은 마곡사요, 가을 풍광은 갑사란 얘기다. 그럼에도 마곡사의 가을이 봄보다 더 좋다는 이들이 많다. 절을 둘러싸고 태극 모양의 계류가 휘감아 돌아가니 더없는 명당이다. 두 물줄기는 천왕문 앞에서 만나 흘러 내려간다.
「택리지」나 「정감록」에서는 “유구와 마곡의 두 물골(물이 흘러 빠져 나가는 작은 도량)의 둘레가 2백리나 되니 난리를 피할 수 있다”며, 충남 공주 마곡사를 풍수지리적인 십승지지(十承之地)의 명당으로 꼽는 곳이다. 실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던 곳으로 유명하여, 전란도 비켜간 극락세계 마곡사로 알려져 있다.
마곡사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하다. 절 이름은 보조국사가 고려 명종 2년(1172)에 이 절을 재건할 때에 구경 온 사람들이(혹은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麻)과 같이 무성"하여 마곡사(麻谷寺)라고 하였다고도 하고,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의 스승인 마곡 보철화상을 기려 이름을 땄다고도 하고, 주변에 마(麻)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양 장곡사와 지금은 절터만 남은 예산 안곡사와 함께 삼곡사라고 부른 덕분이라는 설도 제법 그럴 듯하다. 전각들은 빛이 바래고 금이 갔다고 덧칠하거나 보태지 않았다. 가장 보존이 잘 된 사찰로 꼽히는 이유다. 저마다 나이가 다른 전각과 건물들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마곡사는 80여개 말사를 관장하는 사찰로, 고려 때 보조국사가 중창하면서 번성했다. 마곡사는 사찰 전체가 보물과 유형문화재, 문화재자료이다. 그래서 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한다고 하며, 201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마곡사 일주문은 최근에 세워진 건물로, 일주문에 걸려 있는 '泰華山麻谷寺(태화산마곡사)' 편액은 如初 金膺顯(여초 김응현 1927 ~ 2007)선생의 필적이다.
이 영역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담 너머로 보이는 영산전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 맞배지붕이다.임진왜란 뒤 효종 2년(1651)에 중수하였다. 또 앞쪽은 겹처마이고 뒤쪽은 홑처마인데다가 지붕 길이도 같지 않아 옆에서 보면 앞으로 쏠린 느낌을 주어 건축적으로 매우 독특하여 보물 제800호로 지정되었다.
군왕대(君王垈)의 영험한 기운(地氣)이 가장 응집한 곳, 영산전은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현판은 조선시대 세조가 쓴 글씨라고 전한다. 세조는 「금호신화」를 쓴 매월당 김시습이 이 절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찾아 왔는데, 정작 김시습은 만나지 못하고 글씨만 남기고 갔다고 하며, 그 때 그 글씨가 영산전 편액이라고 한다.
다만 영산전의 개축 연대와 비교할 때, 15세기 때 임금인 세조의 글씨가 16세기인 임진왜란 때에도 무사히 살아 남았을지는 알 수 없다. 물론 낙관은 세조어필이라고 남아 있다. 건물 안에는 과거칠불상을 둘러싸고 현겁천불상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이제 부처님 나라, 불국정토이다. 진리를 상징하는 문으로 사찰로 들어가는 산문(山門) 중 마지막 문이며, 해탈을 얻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해탈을 추구하는 구도자가 천왕문을 지나 수미산 정상에 오르면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도리천 위에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혹은 해탈문)이 있다. 그런데 마곡사에서는 해탈문이 먼저 나타나고 그 뒤쪽에 천왕문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이다.
해탈문의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동쪽 방향에는 청사자를 탄 문수보살상과 금강역사상이 봉안되어 있다. 금강역사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수문장,문지기)으로 불교의 수호신이다. 금강과 같은 지혜로서 번뇌를 꺽어 없애므로 금강역사라고 한다. 법당쪽에서 볼때, 사찰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훔금강),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아금강)이 서있다.
나라연금강은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100만배나 된다고 한다.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번개를 상징)라는 무기를 쥐고 있고,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고 있으며,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모두 듣겠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나라연금강은 입을 크게 벌려 ‘아’하는 소리를 내면서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아금강역사라하고,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문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훔금강역사라고 한다. 이때의 ‘아’는 범어의 첫글자이고 ‘훔’은 끝글자이다. 두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과 완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불교에서 해탈은 바로 부처님의 경지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지니고 있는 지혜와 실천행의 모습을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표현하여 봉안하였으며, 해탈문에 금강역사를 모신 이유는 해탈문이 금강문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천왕상을 모셔놓은 마곡사 천왕문의 모습이다. 사천왕은 원래 대웅전 석가모니 후불탱화에 그려지거나 혹은 불상 옆에 세워지는 불법(佛法) 수호상(守護像)으로 조성되었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주문과 불이문 사이에 새로운 천왕문이 세워지면서 천왕문에 안치되어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신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방 지국천왕과 남방 증장천왕의 모습.
서방 광목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의 모습.
부처님 입멸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일체중생을 제도하도록 부촉(咐囑)받은 지장보살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시왕을 함께 봉안한 법당으로 명부전 또는 시왕전이라고 한다. 시왕전 뒷편의 건물은 산신각이다. 우리 고유의 토속신이 불교에 수용된 것으로 할아버지 산신과 할머니 산신을 함께 모시고 있다.
산신각을 지나 비탈길을 따라 능선에 오르면 넓은 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군왕대(君王垈)이다. 이곳은 마곡사에서 가장 지기(地氣)가 강한 곳으로, 가히 군왕이 나올만 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에 몰래 매장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말에 암매장된 유골을 모두 파낸 후 돌로 채웠다고 한다.
조선 세조가 군왕대에 올라 "내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이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인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라며 한탄하였다고 전한다. 마곡사는 풍수지리상으로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줄기가 삼태극을 이룬 태화천으로 뻗어내리며 지기(地氣)가 뭉쳐진 곳으로 군왕이 나올 천하의 대혈(大穴) 자리라고 한다. 바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영산전이 군왕대의 영험한 기운이 가장 강하게 응집된 명당이다.
마곡사는 금강역사상과 문수, 보현동자상이 안치된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극락교다.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남원과 북원으로 나뉜다. 영산전이 있는 남원에는 수행 공간인 선원이 있고, 다리 건너 북원은 대웅보전, 대광보전 등 수행과 중생교화를 하는 공간이다. 지리적으로 화합을 중시하는 다른 절집과는 달리 둘로 나눠놓은 것이 독특하다.
불전사물이 안치되어 있는 범종루.
법당쪽에서 볼 때 왼편에 위치한 심검당과 요사를 포함한 여러 당우의 모습.
근대의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이 그림을 곁들여 쓴 마곡사 편액.
정조 때 청백리였던 송하 조윤형이 쓴 심검당 편액.
심검당 뒷편으로 늘어선 당우들 모습.
대광보전 앞 보물 제799호 오층석탑은 고려 말기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탑으로 다보탑이라고도 불린다. 2층 기단 위에 5층의 몸돌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렸다. 머리장식으로 라마탑에 보이는 풍마동(風磨銅) 장식을 두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이다. 원 간섭기에 마곡사가 친원세력의 후원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1층 몸돌 남면에는 자물쇠를, 2층 몸돌에는 사방을 지키는 사방불을 새겼다. 사방불이란 동서남북의 방위개념으로 모든 방향을 포괄하는 상징이자 모든 공간에 부처가 거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5층 지붕돌에 풍탁이 달아 놓은 듯 하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는 고려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석탑이다.
또한 5층석탑 꼭대기의 풍마동은 라마교의 청동제 보탑인데, 특히 눈여겨 볼 일이다. 우선 풍마동이란 뜻을 찾아보면, 사전적 의미는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면 광택이 마치 불처럼 이글거린다는 구리'라는 뜻이다. 형식은 원나라의 라마양식의 것으로 1972년에 이 탑을 해체 복원할 때 동탑(銅塔) 부분에서 쇠로 만든 향로 2개, 문고리 3개, 卍자가 새겨진 금포 등등이 나왔다고 한다. 알음알이로 알려진 풍마동은 도굴꾼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하다.
석탑(石塔)의 높이는 동탑(銅塔)까지 총 8m 70cm이다. 그런데 5층석탑 위에 얹어진 동탑(銅塔) 부분이 대단한 보물 중의 보물이다. 이 동탑(銅塔)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풍마동이라고 하며, 한국, 인도, 중국 등 세계에서 3개 밖에 존재하지 않은 귀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단순하다. 마곡사 관계자가 인터뷰했던 말을 빌리자면, 바로 풍마동이 고려 때 원나라에서 제작되어 들여왔기 때문에 우리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응진전과 백범당 건물이며, 그 옆에는 김구 선생이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응진전 전경.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는 제화갈라와 미륵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양 협시보살 바깥쪽으로는 16나한을 봉안한 응진전 내부의 모습.
독립운동을 '테러활동'이라 하는 역사교과서 탓에 순국 애국지사들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마곡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독립운동가인 김구(1876~1949) 선생의 은거로도 유명하다. 백범당은 김구 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로 황해도 안악에서 일본군 장교 쓰치다를 살해하고 인천형무소 감옥에서 사형수로 갇혔다가 1898년에 탈출하여 마곡사에 은신하며,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해 6개월 가량 잠시 수도한 곳이다.
백범당 마당 한 켠에는 조국 광복 후 선생이 1946년 다시 마곡사를 찾아 대광보전 주련의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却來觀世間 猶呂夢中事)를 보고 감개무량해 그때를 회상하며 심었다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는 원각경에 나오는 이 말이 50년만에 찾은 백범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백범당에는 선생이 즐겨 쓰던 서산 대사의 선시를 적은 휘호도 걸려 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덮인 들판을 밟고 갈 적에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어지러이 걸어선 아니되겠지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걸었던 길을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뒷사람이 그대로 따를 테니까.
백범당 전면부 한가운데에는 당시 마을사람들과 함께 찍었다는 사진이 걸려 있다. 선생 뒤로 완장을 찬 좌익과 넥타이를 맨 우익이 나란히 보인다.
개산조 자장율사를 비롯한 15분의 고승들 영정이 모셔져 있는 조사전의 모습.
대광보전은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이다. 보물 제802호 대광보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장중한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불 타 없어진 것을 순조 13년 1813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200년 된 건물이다.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광보전의 측면 모습.
대광보전 측면 벽에 그려진 금강역사 그림(벽화) - 벽화는 단청과 더불어 사찰을 장엄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전각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이들 그림은 예배의 대상인 불·보살의 존상 뿐 아니라 불교의 교리적 내용이나 석존의 전생이야기 등을 예술성 있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을 교화하고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글씨인 대광보전 편액.
건물 내부에는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특이하게 동쪽을 바라보도록 봉안돼 있다. 이는 법당을 더 효유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지만 뒷건물의 대웅보전 부처님과 겹쳐지는 것을 피할 의도로 비로자나불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보도록 안치한 것이다. 이 비로자나불은 자장율사가 당나라 왕으로부터 선물받은 인도의 향단목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는 하지만, 양식으로 보아서는 조선시대 불상이다. 또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유형문화재 제191호)가 봉안돼 있다.
내부 바닥에는 참나무로 만든 삿자리(피나무 껍질로 추측됨)가 깔려 있으며, 이 삿자리에는 그야말로 ‘지성이면 감천’을 입증하는 앉은뱅이 전설이 전한다. 150년전 쯤에 한 앉은뱅이가 장애에도 불구하고 기도 중에 틈틈이 참나무를 이어 앉은자리를 짜며 치성을 드린 덕에 백일 뒤 법당을 나올 때는 자기도 모르게 걸어서 나갔다는 얘기다.
또 법당 내부에는 세조가 마곡사에 은거한 김시습을 만나러 왔을 때 타고 왔다는 연(輦, 임금이 타는 가마의 하나)이 있다.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마곡사에 왔는데 김시습이 이미 떠나고 없자 ‘김시습이 나를 버리니 나도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라고 하면서 타고 왔던 연을 절에 두고 소를 타고 돌아갔다고 한다.
불전 뒤로 돌아가면 뒷벽에 관음보살 벽화가 있어 눈길을 끈다. 자세는 한 다리는 내리고 한 다리는 다른 한 다리에 포개 앉은 반가부좌 모습이다. 오른쪽 옆의 선재동자가 고려시대라면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을 텐데 조선시대의 동자여서 인지 검소한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청조(靑鳥)를 바치고 있다.
관세음보살께 청조(靑鳥)를 바치고 있는 남순동자의 세부도.
대광보전에 걸린 위태천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
대광보전에 걸린 칠성탱의 모습.
칠성탱에 표현된 남극노인성 모습을 담았다.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은 남극성 혹은 노인성으로도 부르며, 천문학적 의미로 볼 때, 남극 부분의 하늘에 있는 별이다. 노인성은 서양 별자리로는 용골자리의 ‘카노푸스’라는 별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만 수평선 위에서 이 별을 관측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이 별이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하여 이를 보면 오래 산다고 하였다. 그래서 수성(壽星)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별은 이미 진시황 때부터 사당에 모셔져 숭배를 받았는데, 일반적으로 그림에서 모습은 하얀 수염에 지팡이를 짚고 이마가 높이 솟은 노인으로 묘사된다.
한편,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새벽에 떠 오르는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여 불교에서 별은 깨달음의 상징이다.
마곡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801호로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조선 효종 2년 1651년 각순대사에 의해 중수됐는데, 또 불이 나 그 뒤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중수기에는 대장전으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언제부터 대웅보전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당당한 건물로, 현존하는 전통 목조건축물 가운데 많지 않은 중층 건물이며, 목조 건축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원래 경전을 모셨던 곳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명필 김생이 썼다는 공주 마곡사의 대웅보전 현판이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이를 제외하면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안동군청 청사에 걸려있는 안동웅부, 강릉객사 객사문 문루에 임영관 (현재는 임영관 건물에 걸려 있음)등의 현판이 가장 오래되었다. 이 글씨들은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민왕의 친필이다.
대웅보전 안에는 가운데에 석가모니불을, 서쪽으로 아미타여래를, 동쪽으로 약사여래를 모셨다. 그런데 약사여래는 약함을 들고 있지 않고 아미타여래와 똑 같은 손 모양을 하고 있어 약간 혼란이 있었다고 한다. 대웅보전 안 기둥 4개는 싸리나무(실제는 느티나무나 소나무일 것으로 추측됨)인데 두 아름쯤 되는 이 기둥을 안고 돌면, 아들을 낳고, 6년씩 수명이 연장된단다.
또한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고 물어 보는데, 많이 돌았을수록 극락길이 가깝고, 아예 돌지도 않았다고 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둥을 붙들고 돌아서 손때가 묻어 윤기가 난다.
대웅보전 본존불로 모셔진 석가모니불.
대웅보존에 모셔진 아미타불.
대웅보전에 모셔진 약사여래불.
대웅보전으로 오르기 전 오른쪽 담장 너머의 굴뚝이다. 이 굴뚝에는 사연이 있는데, 조선시대 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어 옹기를 구웠다고 한다. 그때의 옹기가마 굴뚝을 본떠 진흙과 기와를 사용해 굴뚝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최근에 새로 지어진 관음전 모습.
관음전 편액과 함께 관음전에 걸려 있는 '연화당' 편액은 월하 스님의 필적,
극락에 가고 싶은 분들은 대웅보전에서 앞쪽 대광보전 지붕을 잘 살펴보시라. 꼭대기 중간에 파란 기와가 한 장 있다. 이 청기와가 이른바 ‘극락행 티켓’이다. 죽으면 염라대왕이 “마곡사에 가서 청기와를 봤느냐”고 묻는단다. 보았다고 대답하면 극락으로 보내준다는 것이다.
대웅전 지붕 위의 용마루 중간에 있는 청기와는 해설사에 따라 설명이 다르다. 설명을 들어보면, 왕실을 위해 기원하고 선왕의 명복을 비는 절이라는 뜻으로, 한편으로는 왕실의 보호를 받는 원당사찰, 승병이 있는 사찰, 또는 청기와가 한 장이면 본존불이 한 분이며 세 장이면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하지만, 용마루 위의 청기와는 해설사들의 그럴듯한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청기와는 대웅전을 지을때 부터 기상과 관련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천둥번개와 벼락에 대비해서 피뢰침 역할을 하는 기능을 가진 기와이다.
〔참고문헌〕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답사여행의 길잡이4 충남편(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저), 한국의 사찰(대한불교진흥원),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허균), 사찰의 비밀(자현), 헤럴드경제, 경향신문,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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