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65 - 구산선문 가운데 첫 산문을 연 실상산문의 실상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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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165 - 구산선문 가운데 첫 산문을 연 실상산문의 실상사

徐白(서백) 2017. 1. 19. 13:22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위치한 실상사(實相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며, 현재 사적 30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의 사찰들이 대부분 산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달리 실상사는 지리산에서 흘러나오는 만수천을 끼고 들판 가운데 자리잡은 평지 사찰이란 것이 특이하다. 또한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국보와 보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실상사사적기(實相寺事蹟記)에 의하면 828(덕왕 3)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열면서 창건했다고 한다. 홍척은 도의(道儀)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禪法)을 깨우친 뒤 귀국하였다. 그 후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서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다.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이 태자와 함께 이 절에 귀의할 정도로 왕실의 관심을 받은 절이라 이후 선종이 크게 일어나 실상학파를 이룰 정도가 되었다. 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問)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선종의 대표 사찰이다.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볼 때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468(세조 14)에 화재로 모두 불타버린 후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 뒤 1679(숙종 5)에 벽암(碧巖)3창하였고, 1684년 계오(戒悟)가 현재의 극락전(極樂殿)인 부도전(浮屠殿)을 지었다. 1690년에 침허(枕虛)를 중심으로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숙종 26)36동의 건물을 세웠다.

 

또한 1821년에는 의암(義巖)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1882(고종 19)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東赫)에 의해 사찰 건물들이 불타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으며, 1884년에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였다. 1903(광무 7) 익준(益俊)이 승당을 지었으며, 1932년 칠성각을 세웠다.

 

특히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일찍이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었다. 그 불상의 복장(腹藏)에는 효령대군의 원문(願文)과 사경(寫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들어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高麗板華嚴經疏) 등 보기 드문 서적도 몇 가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 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1986년 요사로 사용 중인 선리수도원(禪理修道院)을 건립하였고, 1989년 천왕문을 세웠다. 1991년 범종각을 짓고, 1996년 화엄학림(華嚴學林) 강당과 학사를 건립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 소장된 중요문화재로는 백장암삼층석탑(국보 제10)을 비롯하여,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 보물 제33),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 실상사석등(보물 제35), 실상사부도(보물 제36),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 2기가 있다.

 

그리고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 보물 제38),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 백장암석등(보물 제40), 실상사철조여래좌상(보물 제41),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百丈庵靑銅銀入絲香爐, 보물 제420), 실상사약수암목조탱화(實相寺藥水庵木彫幀畵, 보물 제421), 실상사위전개량성책(實相寺位田改量成冊,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8) 등이 있다.

 

또한 실상사는 1998년에 문을 연 귀농학교로도 유명하다. 당시 주지스님이었던 도법스님이 만든 학교로서 1997년 우리나라에 IMF로 인해 실직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 농촌으로 돌아와 정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모든 작물을 유기농으로 재배하는 등 생태환경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인드라망생명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지리산 실상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첫 번째 석장승은 실상사로 가면서 만수천을 가로 지르는 해탈교를 건너기 전의 석장승으로,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고, 두 번째는 해탈교를 건너 왼쪽에 있는 석장승이고, 세 번째 장승은 오른편에 위치한 석장승인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의 모습이다. 실상사 석장승들은 장승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절 일원이 사적 제30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전쟁 중에는 지리산을 무대로 한 빨치산과 토벌군의 전투로 수난을 겪었으나 다행히 사찰과 문화재는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실상사가 조선 시대에 전소된 것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한 것이라는 구전이 있는 등 왜구와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도 있다.

 

해탈교 건설에 힘을 보탠 신도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해탈교가설공덕비'의 모습.

 

천왕문은 佛法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전북 출신의 서예가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선생이 쓴 천왕문 편액.

 

사천왕은 대웅전 석가모니 후불탱화에 그려지거나 혹은 불상 옆에 세워지는 불법(佛法) 수호상(守護像)으로 조성되었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주문과 불이문 사이에 새로운 천왕문이 세워지면서 천왕문에 안치되어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신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전통사찰들의 주련과 비교할 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천왕문 주련 모습.

 

천왕문에 안치된 북방 다문천왕과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

 

최근 학계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사천왕상과 조선후기 사천왕상의 존명에 대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존명을 파악할 때, 각 천왕이 들고 있는 지물(持物)로 구별하였다. 최근까지 사천왕상 방위는 통일신라에 제작된 석굴암 사천왕상에 의거해 비파를 타는 천왕은 동방 지국천왕, 검을 든 천왕은 남방 증장천왕, 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은 서방 광목천왕, 탑을 든 천왕은 북방 다문천왕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2013910일에 발견된 직지사 사천왕의 지물과 묵서에 따르면, 조선후기에는 비파를 타는 천왕은 북방 다문천왕, 검을 쥔 천왕은 동방 지국천왕, 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은 남방 증장천왕, 탑을 든 천왕은 서방 광목천왕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귀면상(鬼面像

 

사천왕의 발밑에 깔려 있는 생령좌는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는 주로 청나라 만주족으로 표현되고, 남쪽에서는 일본인으로 묘사된다는 것이 많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이 당했던 비극과 수치가 다시금 반복되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어떤 경우에는 탐관오리가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혹독하고 포악한 정치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실상사 보광전과 삼층석탑을 포함한 전경.

 

발굴조사시 실상사에서 출토된 고기와를 모아 만든 기와탑.

 

강암 송성용이 쓴 범종각 편액이 걸려 있는 범종각과 주변 전경.

 

                    

 

실상사의 목탑지에 남아 있는 석재로, 목탑의 심초석으로 추정되는 석물이다.

 

실상사 목탑지에는 생명평화 깃대와 세월호 희생자를 상징하는 304개의 빛을 밝혀 어두움을 밝힌다고 한다.

 

실상사 동탑과 명부전 전경.

 

부처님 입멸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일체중생을 제도하도록 부촉(咐囑)받은 지장보살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시왕을 함께 봉안한 명부전이다.

 

명부전(冥府殿) 편액.

 

실상사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구심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존재가 철조여래좌상이다. 보물로 지정된 여래좌상은 높이가 269에 이르는 당당한 모습이다여래좌상은 손 모양(手印)으로만 보면, 중생을 극락세계로 이끄는 아미타여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실상사에서 이 여래좌상은 약사여래로 불린다. 그러니 약사여래가 모셔진 전각도 약사전이다.

 

수철 스님이 4,000근의 철을 들여 주조한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이다. 약사전의 철조여래좌상(보물 제41호)은 시선을 일본의 후지산과는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지리산 정상 최고봉인 천황봉에 두고 있으며, 밑을 받치는 좌대가 없이 흙바닥에 앉아 있다. 그것은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지리산에 뭉친 우리나라의 정기와 지기가 바다건너 일본 땅 후지산까지 뻗어나간다고 하여 이를 막기위해 땅바닥에 거대한 철불을 모셔 그 지맥을 누르고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2013년에 발견된 철조여래좌상의 잘린 손 부분으로, 수인의 모습은 중품중생을 표현하고 있다.

 

철제여래좌상과 천장의 용들 모습.

 

약사전 후불탱은 우리 불교문화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로 떠오를 것이 분명하다. ‘지리산 생명 평화의 춤이라는 제목으로 후불탱을 제작한 불모(佛母)는 동양화가 이호신 화백이다. 수묵에 채색을 가미한 후불탱은 전통 불교 미술의 범주를 크게 벗어난다. 그럴수록 전통을 잃어버린 시대, 불교 미술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작지 않다

 

이 화백은 아프고 병든 이를 치유하는 약사여래와 내 손이 약손이오하던 어머니 마음을 품은 지리산 마고할멈의 만남을 시절인연으로 삼았다으며, “새 탱화는 지리산이 품고 있는 자연과 문화유산의 역사성을 고찰하고 이를 소재와 배경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보물 제37호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 -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탑은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실상사삼층석탑은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으로, 경주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를 복원할 때, 이 탑을 본떠 복원하기도 하였다. 198022일 도굴꾼에 의하여 크게 파손된 것을 문화재관리국의 기술진들이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보물 제35호 남원 실상사 석등 -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석등에 불을 밝힐 때 딛고 올라가는 돌계단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석조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모습을 한 보광전 모습이다. 보광전이라는 이름은 80권본 『화엄경』에서 1부(部) 39품(品)을 일곱 곳의 아홉 회상에서 말하였다고 하는 7처9회 가운데, 1회는 보리도량(菩提道場), 2, 7, 8회는 보광명전(普光明殿)에서 설하셨는데보광전(普光殿)이란 명칭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보광전(普光殿) 편액의 낙관 글씨는 '병신정월일우신서(丙申正月 日又新書)'라고 남아 있으나 정확하게 누구의 글씨인지는 분명치 않다.

 

普光殿(보광전) 안에 자리잡은 범종은 실상사(實相寺)가 호국사찰로 꼽히고 있는 이유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실례다. 이 범종은 1694(숙종 20)에 주조된 것인데 무게가 8백근, 높이가 1.3m, 둘레가 2m나 되는 동종(銅鐘)이다. 이 종의 표면에는 네 좌의 불상과 용이 새겨져 있고 지혜의 부처인 문수보살의 육자진언이 새겨져 있어 불교계의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지만 일본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범종이 주조된 이후 매일 아침 저녁으로 종을 쳐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 열도가 각인된 부분은 닳고 깎이어 무늬가 희미해졌고 북해도 부분의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다.

 

일제 말기에는 이것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주지가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관동지방 부분을 두들김으로써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지기를 교란하고 일본을 흔들어놓겠다는 의도가 담겨있다.

 

보광전 안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좌우 협시는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보살들이며, 베트남에서 이운해 왔다는 종이로 만든 보살입상이 있다.

 

좌로부터 보광전과 약사전, 명부전의 모습.

 

칠성각과 보광전.

 

치성광여래를 모신 칠성각의 모습이며, 편액은 전북 진안 출신 거암(居巖) 김봉관의 필적이다. 1960년대 경찰서장을 지낸 독특한 이력을 지닌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칠성각에는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배치하고 위쪽 좌우로는 칠성여래, 아래쪽 좌우로는 칠원성군을 모신 구도의 칠성탱이 모셔져 있다.

 

극락전을 포함한 여러 승탑과 탑비가 별도의 구역을 형성, 자리하고 있어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또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1832년에 의암이 중건하면서 부도전에서 극락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극락전 내부에는 지불(紙佛)인 아미타여래좌상과 1985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국토를 지난 곳에 있는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 극락전, 극락보전, 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 한다.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정토에 가게 하는 부처이다. 무한한 진리의 빛을 상징하여 무량광불로 불리며, 도교의 불로장생 신앙과 결부되어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보물 제39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흥덕왕 1년(826)에 귀국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이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의 신라 무열왕릉비와 같이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대사의 묘탑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보물 제38호)은 탑비의 뒤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보물 제33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

탑은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基壇)은 아래받침돌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가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다. 8각의 탑몸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문(門)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얇고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부분에는 엷은 곡선을 이루고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경사면에는 기와골을 표시하였고, 그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다. 꼭대기에는 몇 층의 단이 있고, 그 위에 원형이 작은 돌에 있을 뿐 모두 없어졌다.

 

보물 제38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증각대사 탑비에 새겨진 사천왕과 자물쇠가 달린 문비(門扉)의 모습.

 

보물 제38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팔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탑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이다.

탑은 기단(基壇)은 팔각형의 석재를 여러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門)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38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 수철화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재위 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사진 및 글쓴이 : 서백 김춘식

 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한국의 사찰(대한불교진흥원), 우리의 문화유산(학연문화사),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허균), 서울신문,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