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58 -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군산 동국사 본문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인 동국사(東國寺)는 1909년 8월 일본 승려 우치다(內田佛觀) 스님이 포교소를 개설하면서 동국사의 역사는 시작됐다. 1913년 군산 지역의 대농장주 구마모토와 미야자키 등 29명의 신도로부터 시주를 받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으며, 처음 이름은 금강선사(錦江禪寺)였고, 또한 금강사라고도 줄여서 불렸는데, 금강(錦江)이란 사찰 이름은 군산 앞바다로 흘러가는 금강에서 유래했다.
무엇보다도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대웅전과 요사채가 실내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형식으로 일본 에도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화려한 단청이 있는 우리나라 절집과는 달리 아무런 장식이 없는 처마와 대웅전 외벽에는 많은 창문을 달았고 처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가파른 지붕은 일본 사찰의 특징이다. 그래서 동국사의 대웅전은 2003년 7월,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 때, 군산은 사회, 경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일본 문화를 많이 받아들여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1913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승려 우치다에 의해 창건되었고, 한국의 전통사찰과는 다른 양식을 띠고 있다.
금강사는 해방이 되어 일본인이 물러간 후 미군정을 거쳐 정부에서 관리했다. 해방직후에는 일본인들이 다수 머물며 귀국을 기다렸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군이 군산을 점령하면서 북한 군대의 숙소로 잠시 이용됐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퇴각한 뒤에는 미군이 사용하는 등 한국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감당한 역사적 공간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침탈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군산에는 일본인들이 상당수 거주했다. 이들은 금강사를 중심으로 신행활동은 물론 불교식 혼례, 장례 등을 치렀다. 소위 대동아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일본 군인 가운데 군산과 연고 있는 자들의 위패와 유골을 봉안했다. 대웅전 뒷벽에 있던 봉안당은 해방 후에 철거했으며, 유골은 절차를 거쳐 서해 앞바다에 수장(水葬)했다. 지금은 대웅전 뒤쪽에 시멘트 기단만 남아 옛일을 소리 없이 전하고 있다.
동국사의 주요 건물은 대웅전, 요사채, 종각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1956년 재단법인 전북불교종무원에서 인수할 당시 종무원장 김남곡 스님이 동국사로 사찰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동국사(東國寺)라는 이름은 ‘우리나라(海東國) 절(寺)이다'라는 뜻으로 동국사라고 이름지었고, 1970년 선운사에 등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여튼 동국사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져 8‧15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까지 격동기의 풍상을 온몸으로 겪은 역사적 공간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기지에서 이제는 한일 과거사를 청산하고, 화합과 상생의 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는 동국사이기도 하다.
도로변에 바로 접해 있는 동국사 입구
동국사 입구에는 두 개의 돌기둥이 서 있다. 오른쪽에는 ‘조동종(曹洞宗, 일본 종단 명칭) 금강사(錦江寺)’ 명패가 새겨져 있었는데, 일본 종단인 조동종 명칭 역시 지워진 채 흔적만 전한다. 또한 ‘차문불문(此門不門)’이란 목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은 문이 아니다’는 뜻으로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이란 의미다. ‘차문불문(此門不門)’이란 글은 군산 출신으로 중학교에 다닐 때 동국사를 자주 찾았던 고은 시인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고은 시인은 1951년 당시 동국사 주지인 혜초스님과 처음 인연을 맺었는데, 1952년 열 아홉 되던 해에 동국사로 출가해 ‘중장’이라는 법명을 받고 2년 동안 동국사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한국 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구조물이다. 왼쪽 돌기둥에 ‘소화 9년 6월 길상일(昭和 九年 六月 吉祥日)’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일본식 연호인 소화는 해방 후에 지워졌고 흔적만 남아 있다. 부연 설명을 한다면, 일제시대에는 일본 천황의 연호인 大正과 昭和를 썼는데, 대정 1년은 1912년이고 소화 1년은 1926년을 나타낸다. 결국 이 돌기둥은 1912년+(9년-1년)=1920년 6월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웅전 모퉁이에서 정문쪽으로 본 전경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방형 단층 팔작 지붕으로 일본 에도(江戶)시대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75도의 급경사를 이룬 대웅전 지붕과 다수의 창문이 있고, 용마루가 일직선을 하고 있다. 대웅전과 요사가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등 전형적인 일본 사찰 형식을 보이고 있다. 지금의 대웅전은 1935년 개축한 건물이다.
법당을 지을 당시 대다수 목재는 일본에서 습기에 강한 삼나무(스기목)를 들여 왔는데, 대들보는 백두산 금강송을 사용했다. 일제강점기에는 ‘月明山(월명산)’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군산을 상징하는 월명산에 사찰이 자리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대웅전 뒷산에는 대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 대나무는 명종죽 계열의 일본산 대나무로, 죽순용이다.
종각 앞에서 본 동국사 전경
대웅전에는 진흙으로 조성한 석가여래삼존상(소조석가여래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가섭존자, 오른쪽에 아난존자가 시립(侍立)하고 있다. 조선 효종 1년(1650년) 응매스님이 조성한 삼존불상은 시주자와 시주물목, 발원문 등이 복장에서 나와 조선 후기 불상연구는 물론 복장 의식과 사원경제를 짐작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보물 1718호로 지정된 소중한 성보문화재이다. 본래 김제 금산사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해방 후에 동국사로 이운했다.
종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좌측의 대웅전과 우측의 요사채를 연결하는 실내 복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화살표가 가르키는 추녀마루 막새기와에는 '錦(금)'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1913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동국사의 처음 이름이 금강선사(혹은 금강사)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다.
대웅전에서 실내 복도를 통해 다니도록 지어진 동국사의 요사채 모습이다. 고은 시인이 출가해서 혜초 스님의 상좌가 되어 불경 공부를 했던 방이다.
근래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 향적원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식당이 있는 곳이다.
대웅전 앞에서 바라보면, 오른쪽 마당에는 일본식 종각(鐘閣)이 눈길을 끈다. 대웅전을 지을 때 같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직사각형 팔작지붕의 범종각은 국내 유일의 일본 전통 양식의 종각으로, 일본 교토(京都)에서 제작해서 옮겨온 범종이 달려 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까지 군산 시민들에게 매일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본래 종각이 있던 자리는 대웅전 앞마당보다 높은 언덕이었는데, 텃밭을 조성하면서 턱을 낮추었다.
동종은 1919년(대정 8년) 일본 교토에서 장인 다카하시가 주조한 것을 반입했다. 세계적으로 특징이 있는 조선종과 달리 일본 동종인 동국사 종은 상부에 잡음을 없애 주는 음관이 없고, 종 머리에 고정하는 용뉴는 일체 쌍두용을 구부려서 배치하였으며, 종신에는 하늘을 날아가는 비천상 대신 종복에 보상연화문 당좌 2개와 가로 세로 띠 모양을 한 문양을 양각으로 장식했다. 이 공간에 범종 제작에 시주한 시주자 명단, 금강사의 창건 내력, 일본 천황을 칭송하는 축원문이 음각되어 있다. 또, 유곽 없이 유두만 108개를 배치하여 백팔번뇌를 상징하고 있다.
가까이서 본 일본 범종의 모습
종의 몸체 바로 밑에 항아리를 묻어놓은 부분으로, '울 鳴'과 '골 洞'자를 쓴 '명동(鳴洞)'이라고 한다. 명동(鳴洞)은 범종 타종 시에 종소리의 공명효과(맥놀이)를 극대화 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종각 주위로 돌아가면서 석조 33관세음보살상과 석조 12지상이 도열해 있다. 이 석상들은 1919년에 만들어진 석조상들이다. 보살상에는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해방 이후 철거되어 민가의 주춧돌로 사용한 이력이 있어 그을림 자욱이 보이는 석상도 눈에 띈다.
종각 앞쪽에 별도로 안치된 석조보살상의 모습
동국사에는 일본 조동종이 과거사를 참회하며 사죄하는 참사문이 새겨져있고, 그 앞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한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평화의 소녀상 앞에는 2015년 8월 15일은 광복 70주년이다. 그래서 70주년을 상징하여 77개의 검정 타일로 조성한 사각 연못이 있는데, 검정 타일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한해협을 표현한 것으로, 소녀상의 얼굴이 연못에 비치도록 설계됐다고 하며, 특히 서있는 소녀상은 일본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제작됐다고 한다. 소녀상은 일제말기의 우리나라 17세 전후 여학생을 모델로 158㎝ 높이의 단발머리와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 입은 모습을 형상화 했으며, 고광국 작가가 제작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거친 세월의 흔적을 증언하는 공간도 있다. 방공호이다. 연합국 비행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웅전 뒤편 대나무 숲에 2개의 방공호를 조성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무너져 내려 폐쇄했고, 나머지 하나는 토굴식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자료출처 및 참고자료 : 한국의 사찰,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시선뉴스, 불교신문, 새전북신문, 금강일보)
'사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백의 사찰이야기160 - 미래세에 용화세상이 될 도량, 통영 미륵산 용화사 (0) | 2016.12.23 |
---|---|
서백의 사찰이야기159 - 미륵부처님이 오실 절집, 통영 미륵산 미래사 (0) | 2016.12.22 |
서백의 사찰이야기157 - 하늘이 감춘 땅, 하늘 아래 첫 암자인 묘향대(암) (0) | 2016.07.30 |
서백의 사찰이야기156 - 사찰건축의 새로운 모델이 된 부산 안국선원 (0) | 2016.07.21 |
서백의 사찰이야기155 - 천 명의 성인이 나온 산, 천성산에 위치한 원효암 (0) | 2016.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