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51 - 왕건이 피신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팔공산 염불암 본문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 중턱에 위치한 염불암(念佛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이다. 동화사에서 서북산정으로 3㎞ 지점에 위치하며 928년(경순왕 2)에 영조선사가 창건하였다.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가 중창하였으며, 1438년(세종 20)에 중창하였다.
그 뒤 1621년(광해군 13)에는 유찬이 중창하였고, 1718년(숙종 44)과 1803년(순조 3), 1841년(헌종 7)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1936년에 운경이, 1962년에 혜운이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과 동당, 서당, 산령각 등이 있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봉안하였고, 후불탱화는 부드럽고 섬세한 기법으로 그린 것으로 1841년의 중수 때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중요문화재로는 극락전 옆의 암석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이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된 청석탑(靑石塔)이 있다. 특히 염불암은 927년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만 살려 이곳까지 도망쳐 왔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후백제 군대가 경주에서 동화사로 진격해 왔다는 사실과 염불암이 동수대전 이후에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왕건이 염불암에 머물렀다는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일 수 밖에 없다.
팔공산 염불암 전경
서당(현 수월당)의 측면 모습
염불암 편액이 걸려 있는 동당(東堂)의 모습
동당(東堂)에는 "염불암(念佛庵)"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편액은 일본 도쿄 법정대학에 유학하고 방직공장을 경영하기도 했던 소당(小堂) 김대식(金大植, 1896~?)의 글씨이다. 또한 대구시 동구 효목동 금호강변에 자리한 통천사에 걸려 있는 "萬古淸風(만고청풍)" 편액도 소당의 글씨이다.
원래는 서당(西堂)의 명칭을 사용하였지만, 현재는 수월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당우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의 건물인 극락전은 염불암의 중심법당으로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동화사 염불암 청석탑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 문화재청 자료 사진)
동화사 염불암 청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 청석탑은 극락전 앞마당에 있는데, 보조국사가 쌓았다고 하며, 아랫부분 3단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위쪽 10단이 수마노석으로 된 높이 1.4m의 13층탑이다. 현재는 상층부 5층이 깨어져나가거나 갈라져 있다.
3단으로 높직하게 이루어진 화강암 지대석 위에 탑신 없이 옥개석만 층층이 포개져 있는데, 옥개석의 크기로 보아 탑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는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탑 정상부의 상륜(相輪)은 옥개석과 재질이 다른 돌로 만들어진 점으로 볼 때, 원래의 것이 아니고 결실된 후에 다시 만들어 얹었음을 알 수 있다. 검푸른 빛깔의 네모꼴 점판암으로 만든 옥개석은 현재 열 개가 남아 있으나 본래는 몇 층이었는지 알 수 없다.
검푸른 빛을 띠는 청석으로 자그마한 다층탑을 조성하는 예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였다. 해인사의 원당암 청석탑이라든가, 김제 금산사 경내의 청석다층탑 등은 이의 좋은 예들로, 이 염불암 청석탑 역시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의 완만한 체감률과 적당한 비례감으로 인해 안정감을 주는 고려탑으로 추정된다.
이 탑에는 이 절 일대에 칡덩굴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와 관련된 전설이 얽혀 있다. 보조국사가 이 탑을 쌓기 위하여 나무로 말을 만들어 타고 서해의 보령과 대천에서 수마노석을 운반해서 돌아오던 도중에 산길을 오르던 목마의 다리가 칡덩굴에 걸려 부러지고 말았다. 보조국사는 이에 크게 노하여 산신을 불러서 암자 부근에 있는 칡덩굴을 모두 없애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이후로 이 암자 아래의 양진암에서 상봉에 이르는 산등성이에는 칡이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협시는 관세음보살이고 우협시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후불탱화는 1841년에 제작된 관경변상도가 걸려 있다.
대구 동화사 염불암 관경변상도(극락전 후불탱)는 1841년(헌종 7) 작품이다. 모시 바탕에 채색. 세로 130㎝, 가로 121㎝. 정토삼부경 중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도상화한 관경변상도이다. 특히 설법하는 삼존좌상은 16관경변상도 중의 상품삼배지전(上品三輩之殿)인 제14 상품과 비교된다.
극락의 연못 좌우에는 전각을 배치하였다. 아래에는 구름으로 구획을 하여 보살 및 비구승, 주악천녀, 사천왕, 신중 등이 향화공양(香花供養)을 올리는 제단 주위에 둘러서서 찬탄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림의 상단부에는 수많은 연화생(蓮花生)들이 그려진 연못을 묘사하였다. 이 연못에서 솟아난 연화좌에 앉아 법회를 열고 있는 삼존좌상 주위에 설법을 듣기 위하여 무수한 시방제불(十方諸佛)과 공작, 학, 가릉빈가(불경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 등 상서로운 새들이 모여드는 장면이 표현되었다.
아미타삼존상 중 아미타불은 높은 육계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었다. 얼굴과 신체가 모두 사각형의 형태로서 평판적으로 처리되어 비사실적인 인체 표현이 두드러진다.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 보살들은 앞 시대에 비하여 장식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가슴에 석 줄로 늘어진 목걸이 장식이 돋보인다.
화기(畫記)에 의하면, 염불암의 상단탱(上壇幀)으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관경변상도가 상단탱으로서 후불탱화의 구실도 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정면과 측면 각 1칸에 맞배지붕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산령각의 모습
산령각에 봉안되어 있는 산신탱의 모습
마애불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이 암자에 있던 한 승려가 이 바위에 불상을 새길 것을 발원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암자 주변에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데 7일 동안이나 걷힐 줄을 몰랐다. 7일 만에 안개의 걷힘과 함께 법당에서 나온 승려가 바위 곁에 가보니 발원하였던 불상이 바위 양쪽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 불상은 문수보살이 조각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염불암이라는 이름은 이 불상이 새겨진 바위에서 염불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 높이는 여래좌상 4m, 보살좌상 4.5m. 염불암 경내에 우뚝 솟은 암석의 서·남면에 얕게 부조되었으며, 서면의 여래좌상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남면의 보살좌상은 관음보살(觀音菩薩)로 추정된다.
두 손은 무릎 위로 모아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서로의 엄지를 마주 대며, 검지를 꾸부려 손가락 등을 맞닿게 하는 아미타불의 미타정인(彌陀定印)을 맺고 있다. 결가부좌한 무릎 밑으로 흘러내린 법의 자락은 세 겹의 횡적인 옷주름으로 마무리되었다. 2중의 연꽃잎으로 구성된 대좌 밑으로 구름무늬를 새겨 천상계를 표현하였다.
관음보살상은 머리에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하지만 착의법(着衣法)은 상의(天衣)와 하의(裙衣)를 걸치는 일반적인 보살 옷과는 달리 우견편단으로 입혀진 법의 모양이어서 주목된다. 이러한 복장은 백의관음(白衣觀音)을 표현하려는 의도로도 보이나 보살상의 복장으로서는 이례적이다.
보관 밑에는 나발의 머리가 이마 위에 돌려져 있다. 네모진 비만형의 얼굴 크기에 비하여 이목구비는 작게 표현되었다. 입과 코가 맞붙어 둔중한 인상을 풍긴다. 목은 거의 생략된 채 가슴 언저리에 삼도(三道)가 선각되어 있다. 손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서 들고 왼손은 무릎 위에 놓아 긴 연꽃가지를 잡고 있다. 조성 시기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마애여래좌상 앞에 있는 배래석이다. 배례석이란 말 그대로 예를 올리기 위해 사용하는 돌판이다. 법당이나 탑, 석등 앞에 주로 있다. 여건상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이가 삼보께 여법하게 정성을 다해 예를 올릴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이다. 염불암의 배례석은 전체적인 모양으로 볼 때, 예를 올릴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으로 봐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보충설명) 대개 사찰의 석등 앞이나 석탑 앞, 또는 법당 앞에서는 직사각형의 돌판이 놓여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돌판은 지각없는 해설사들에 의해 무조건 배례석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런데 대개의 배례석을 살펴보면 절하기엔 너무나 부담스런 모양이다.
장방형의 직사각형에 중앙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전면과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특히 중앙에는 활짝 핀 연꽃이 새겨져 있는데, 불교에서 활짝 핀 연꽃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불보살은 연꽃이 활짝 핀 연화좌대 위에 모셔진다. 이러한 연꽃에 미혹한 중생이 올라서서 머리를 댄다는 것은 이치적으로 맞지 않다.
안상이라는 문양도 역시 높은 위계의 장식이다. 안상은 실제로 코끼리를 정면에서 바라본 것과 같은 모습을 말한다. 하지만 인도와 달리 중국에서는 코끼리가 없었다. 이런 연유로 안상이라는 개념을 형상화 하기 어려웠기에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양식적인 변화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받침대가 배례석이 아니라는 것이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나타난다. 이 책에는 배례석을 봉로대(奉爐臺)로 설명한다. 봉로대란 향로를 올려놓는 돈대(墩臺)라는 의미다. 지금은 불전 안에만 향로가 있지만 과거에는 불전 밖에도 향로가 있었다.
옛날에는 신도들이 함부로 법당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향을 밖에서 피우고 그곳에서 기원을 올리고 참배를 하였다. 지금에 와서 과거의 유산인 받침대만 남아있게 되다보니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유전되어 배례석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앞으로 빠른 수정이 있어야할 잘못된 이름이다.
산령각쪽에서 본 서당의 측면 모습
이 밖에도 서당 뒤편에는 오인석(五人石)이라 새겨진 책상 세 개 정도의 네모난 바위가 있는데, 이는 고려태조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도망갈 때 그의 신하 5명이 쉬었다는 설과, 옛날 다섯 고승이 견성(見性)을 하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염불암은 동봉 남쪽 아래 해발 900여m에 위치하여 팔공산 내의 암자 가운데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위 글은 한국의 사찰, 답사여행의 길잡이-8(팔공산 자락), 문화재청 자료와 글,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글쓴이 : 서백(徐白) 김춘식)
'사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백의 사찰이야기153 - 수정같은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는 의성 수정사 (0) | 2016.04.27 |
---|---|
서백의 사찰이야기152 - 달이 머문 절이란 뜻을 가진 의성 주월사(住月寺) (0) | 2016.04.23 |
서백의 사찰이야기150 - 반달곰이 살고 있는 절집, 지리산 문수사 (0) | 2016.03.20 |
서백의 사찰이야기149 - 도선국사가 창건한 진주 월아산 두방사 (0) | 2016.02.16 |
서백의 사찰이야기148 - 해돋이의 명소, 여수 금오산 향일암 (0) | 2016.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