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안동 여행길에 만난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일명 제비원 미륵불, 제비원 석불) 본문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노란 은행잎 떨어지는 거리를 걸으면서 옛 추억에 잠겨보고 싶은 가을이다. 지난 26일, 사단법인 미소원 회원들과 함께 경북 안동 지역으로 문화유적 답사를 다녀 왔다. 그날의 여러 유적답사에서 오늘은 안동시 이천동에 위치한 '보물 제115호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을 포스팅한다.
안동에서 영주 방면으로 5km쯤 가다보면 제비원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 산자락에 거대한 이천동 석불이 자리잡고 있다. 이 석불의 공식 명칭은 ‘보물 제115호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제비원 미륵, 제비원 석불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옛날의 제비원(燕飛院)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쉬어가던 원(院, 요즘의 여관)이었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나 한양으로 갈 때에는 험준한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고, 이 산을 넘기 전 잠시 쉬어가던 그 길목에 제비원이 있었다.
17세기 초의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불상 위로 기와지붕이 덮여 있었다고 하며,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석의 바위 위에 부처님 얼굴을 따로 조각해 올렸고, 그 부처님 앞에는 또 다른 바위 하나가 놓여 있는데, 옛날에는 불상을 지붕으로 덮었을 것이고, 그러면 바위와 바위 사이에 석굴 같은 법당이 만들어진다. 이때 지붕의 모습이 제비와 비슷해 ‘연자루(燕子樓)’라 했고, 제비의 꼬리 자리에는 요사를 짓고 ‘연미사(燕尾舍)’라 했으며, 석굴 같은 법당은 제비 부리에 해당하니 ‘연구사(燕口寺)’라 이름 지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한 사찰은 국가적 차원의 숙소인 ‘원(院)’으로 활용되었다. 연구사도 원으로 지정되어 ‘연비원’ 또는 ‘연미원’으로 불렸다. 그러나 조선 중기 불교의 억압으로 연구사는 폐사되었다. 그 이후 남은 것은 석불과 원(院)의 역사뿐이다. 지금 제비원 석불의 뒤편에는 1934년 연미사(燕尾舍) 자리에 새로 지은 ‘연미사(燕尾寺)’가 있다.
파주 용미리 용암사 마애불, 고창 도솔암 마애불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마애불로 불리는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은 자연암벽에 신체는 선으로 새기고 머리를 따로 올려놓은 모습으로, 전체 높이 12.38m의 고려시대 만들어진 거대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보물 제93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쌍미륵)입상도 이와 비슷한 수법을 보여준다. 단지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올렸을 뿐인데도 자연석인 몸통 부분이 서로 어우러져 거대한 석불이 되었다.
그리고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고 풍만하며 눈썹 사이에 백호를 양각으로 크게 새겼다. 목은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수직 암벽에 새긴 몸체는 굵은 직선으로 음각하여 단순하게 보인다.
법의는 통견(通絹)으로 왼쪽 어깨에서 완만하게 흘러내린 옷주름이 오른쪽에서 수직으로 드리워진 법의 자락과 교차되어 접히고, 넓게 트인 가슴 밑으로 내의(內衣)의 띠가 보인다. 수인(手印)은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을 복부에 대고 왼손은 손들이 보이도록 가슴 위로 올렸는데, 아미타구품인의 수인에서 하품중생인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의 발밑에는 큰 단판의 연꽃이 음각된 대좌가 있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석불의 분리되어 있는 불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온 장수 이여송이 칼로 내리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여송은 난이 평정된 후에도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나라에 큰 인물이 날 명당자리를 찾아다니며 혈을 끊었다. 어느날 제비원 앞에서 그가 타고 가던 말의 발굽이 갑자기 땅에 붙은 듯 꼼짝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길가의 미륵석불을 발견하고 석불의 목을 칼로 내리치자 미륵석불의 목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고,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여기에는 조각 솜씨를 겨루어 지는 쪽이 죽기로 한 형제의 무서운 내기도 전해온다. 동생은 부지런히 돌을 갈고 다듬었지만 약속한 날까지 미륵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형은 빈둥빈둥 놀며 머리만 다듬어 바위 위에 얹었다고 한다. 결국 동생은 죽었고, 형이 완성한 미륵이 지금의 제비원 석불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외에도 절을 지은 목수가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는 전설도 있고, 큰 바위 둘이 먼저 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었다는 전설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불리는 성주풀이는 지역에 따라 노래의 투나 내용은 달라도 성주님께 치성드리는 성주굿 노래에서 그 첫 대목은 대개 성주의 근본(본향)을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답은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다. 이 노래의 내용대로라면, 우리나라에서 집을 짓는 재목으로 쓰는 나무는 모두 제비원의 솔씨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성주란 집을 지키고 보호하는 신령이다.
성주풀이는 그러한 성주신의 내력을 노래한 무가(巫歌)이다. 다음의 노랫말은 ‘성주풀이’의 한 대목이다.
“성주 본향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제비원에 솔씨 받아/ 이산 저산에다 던졌더니/ 밤이며는 이슬 맞고/ 낮이되면 벼살받어/ 그 솔이 점점 자라나서/ 청장목이 되었던가/ 도리목이 되었던가...”
제비원에는 세조가 ‘통정대부’ 벼슬을 내린 ‘대부송’이라는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소나무가 솔씨의 근본이라 전한다. 제비원 석불 주변에는 소나무가 많다. 이들은 대부송의 후손인 셈이다. 석불 앞에는 솔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에는 울진의 금강송과 안동 옥동의 육송 등이 식수되어 있다.
근래에 새로 지어진 연미사의 대웅전 건물이다. 건물의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건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법당 내부 불단 위에는 전법륜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연꽃을 들고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참고문헌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향토문화전자대전, 영남일보, 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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