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봉황이 날아드는 산이라는 뜻의 영도 봉래산 본문

山行,행사,기타

봉황이 날아드는 산이라는 뜻의 영도 봉래산

徐白(서백) 2012. 9. 24. 00:29

어느새 우리들 곁에 가을이 성큼 다가와 결실을 준비해야 하는 계절,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해진 9월 하순이다. 오늘은 부산불교방송산악회 정기산행을 하는 날로서 목적산은 영도 봉래산이다. 그러나 집에서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함께 하지 못하고, 몇명이 자연과 함께 하며 봉래(蓬萊山, 해발 395m)을 올랐다. 봉래산은 부산에서 곤충이 가장 많이 서식하고 있는 산으로 환경부 보호대상인 고려집게벌레와 늦반딧불이 등 희귀종이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영도의 원래 이름은 절영도(絶影島)였다. 절영도(絶影島)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가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못따라 올 정도라 하여 끊을 절(絶), 그림자 영(影)을 붙여 절영도라 불려졌다. 뭍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서식하고 있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이 곳 영도는 섬이기 때문에 맹수들이 없어 안전하였고, 또한 먹이(조개, 생선, 열매)를 구하기 좋았고 기후가 따뜻하여 살기에 알맞은 곳이었으며, 신라시대부터 조선조 중기까지는 목장으로 말을 방목한 곳으로 유명하다. 해방 후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옛이름 "절영도"를 줄여서 현재의 "영도"로 부르게 되었다.


봉래산(蓬萊山)은 봉황이 날아드는 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예로부터 신선이 살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있다. 봉래산에 관해서는 두 가지 속설이 전해져 오는데, 하나는 이 산의 지세가 마치 아늑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자식들이 어머니 품을 떠나면 못살게 된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봉래산 산신령이 욕심이 많아 이곳으로 들어오는 것은 좋아하나 밖으로 떠나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이 영도를 떠나면 좋지 않다는 설이다. 이러한 속설은 사람들이 영도로 들어오면 좀처럼 떠나지 않고 한평생 사는 사람이 많다는데서 비롯된 이야기로 여겨진다고 한다.  

 

태종대를 포함한 부산 앞 바다를 끼고 도는 주변 경치가 한 폭의 풍경화같이 일품이며, 부산의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산으로 정상에는 우리나라 토지측량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이 있다. 일행은 주공아파트에서 시작해 정상을 거쳐 목장원 쪽으로 내려와 목장원 아래의 절영해안산책로를 걸으며 남해안의 절경과 바다 내음에 취하는 최상의 산책코스를 만나는 행운을 갖게 되는 멋진 코스였다.

 

 

이곳은 봉래산 정상이다. 정상석 뒤의 바위는 '봉래산 영도할매 전설'이 서려있는 할매바위이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봉래산에는 영도 할매가 있어 주민들을 평안하게 지켜주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이 영도를 떠날 때에는 영도 할매가 심술을 부려서 못살게 한다는 속설이 있다. 봉래산 정상에는 영도 할매의신체(身體)인 할매 바위가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신성시하고 있다.

 

영도 봉래산 ‘할매 바위’를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겨 함부로 올라가지도 않고 주변에서 합장을 하거나 기도를 하기도 한다. 주민들과 등산객들 사이에서는 할매 바위 위에 앉아도 되느냐 안 되느냐로 종종 승강이가 벌어진다. 봉래산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자식들이 어머니 품을 떠나면 못살 듯이 영도 주민들은 영도를 떠나서는 잘 살 수 없다. 또한 봉래산 산신령은 욕심이 많아서 영도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만 밖으로 떠나는 것은 싫어한다고 한다.

 

▲ 영도의 전설을 품고 있는 '영도 할매바위'의 측면에 새겨진 낙서

 

특히 영도에 살았던 주민이 영도를 떠나서 영도 할매가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가면 3년 안에 망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주민들은 봉래산 정상에 있는 할매 바위를 신성한 장소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바위에 함부로 올라가지도 않으며, 할매 바위 주변에서 합장을 하거나 기도를 하기도 한다. 봉래산 영도할매는 봉래산의 산신으로 해석된다. 봉래산은 영도의 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으로서 영도 전역에 걸쳐져 있다. 이곳에 좌정한 영도 할매는 영도주민의 운명을 좌우할만한 영험한 산신인 것이다.

 

영도할매에 얽힌 속설은 섬으로서 영도의 자연 지리적 환경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영도의 주민들은 섬사람으로 대체로 육지의 주민들에 비하여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영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상부상조하며 단결력과 협동심도 높은 편이었다. 따라서 영도에 한번 정착해서 살게 되면 향토색이 강해지고, 다른 곳으로 잘 이사를 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도에서 살다가 육지로 이주해 나갈 때는 잘 모르는 사람 때문에 속임을 당하거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봉래산은 자식을 품어주려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영도에 살 때는 보호를 해주고 밖에 나가면 고생할까 걱정을 해준다. 영도에서 살다가 삼신할매 덕에 부자가 돼서 나간 사람이 많다 그러다가 영도 밖으로 나가면 그 재물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영도할매가 영도를 떠난 사람들에게 해꿎이를 한다는 속설은 일본인들의 간계(奸計)에 의하여 생겨났다. 일본인들은 영도의 지형이 일본으로 날아가는 새의 형상이라고 호도하며 이곳에서 돈을 모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절명한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린 것이다. 실제로 영도 할매는 영도를 떠난 사람에게 심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외지로 나간 영도출신 사람들이 겪을 어려움을 미리 예견하고 방지해주려는 것이다. 실제로 봉래산 할매는 산삼과 불로초를 기르고 있으며, 영도 사람의 안위를 지켜주며, 국가적 위난이 닥쳐올 때 부산사람을 지켜줄 비밀을 감추고 있다.

 

▲ 봉래산 정상에는 KBS송신탑과 MBC송신탑이 나란히 서 있다.

 

▲ 좌측 멀리에는 용호동 SK아파트가 보이고, 그 앞으로는 해군작전사령부이다. 앞쪽 바닷가에 배가 정박해 있는 곳은 국제크루즈터미널이고  그 옆으로는 부산해양박물관과 아치섬이다.

 

우측에 볼록하게 솟아오른 아치섬은 1974년 이곳에 거주하는 103세대의 주민들을 동삼동 하리에 집단 이주시킨 후 해양대학교가 설립되었으며, 학교와 바다와 자연경관이 함께 어울어진 무척 아름다운 섬이다. 아치섬은 이곳이 부산에서 제일 먼저 아침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하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어 조도(朝島)라고도 불린다. 아치섬이라고 하는 지명의 유래에 관한 것으로 또 다른 설들이 있다.

 

예쁘고 작은 것을 표현할 때 「아지」라는 말을 쓰는데 이 섬이 동생같이 작고 귀엽다는 뜻으로 아지섬→아치섬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부산포 해전 때 이 곳에 주둔했던 적의 기치를 끌어 눕혔다 해서 와치섬 또는 와치도라고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음되어 아치섬이 되었다고 하는 추리도 있다.


▲ 용호동 SK아파트 앞 바다의 섬은 오륙도이고, 아래 왼쪽은 국제크루즈터미널이다.

 

▲ 건너편 왼쪽으로 보이는 산은 장산이고, 앞쪽은 감만부두이다.

 

▲ 5부두 뒤로는 금정산, 6부두 뒤로는 황령산과 금련산, 바다 건너 북항대교 주탑 우측은 연합철강, 연합철강 앞쪽은 감만부두, 바다를 가로질러 건설 중인 북항대교이다.

 

▲ 왼쪽 멀리 보이는 산은 승학산, 승학산 우측 봉우리는 구덕산, 가장 우측은 엄광산이다.

 

두 개의 다리 중에 우측은 부산대교이고, 좌측의 다리는 영도대교이다. 1934.11.23 개통된 영도대교는 부산 최초의 연육교로서 당시 총 공사비가 360만원이었다 한다. 개통식 이후 뭍쪽 다리의 일부인 도개부가 하루 7차례씩 들어올려졌으며 이 웅장한 모습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인파들로 인하여 영도대교는 부산제일의 명물 관광거리로 변하게 되었다.

6.25 동란 당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던 시절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의 애절한 사연이 얽히는 무대가 되었고, 이때 영도출신 가수 현인선생의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대중가요가 부산시민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그러나, 영도의 인구증가 및 교통난 등으로 인하여 1966.9.1 도개식 영도대교는 그 들림기능을 멈추게 되었고, 조선업체의 물동량 증가등으로 인한 교통난을 해소하고자 1980년도에 부산대교가 완공되므로서 영도대교의 명성은 잊혀져 갔다. 또한 현재는 롯데의 초고층빌딩 공사로 인해 기존의 다리는 헐리고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는 중이다.

영도대교 부근에는 당시 부산 제일의 명물이었던 도개식 영도대교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한 「도개식 영도대교 기념비」와 6.25 당시 피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대중가요「굳세어라 금순아」의 시대적 배경을 담아 건립된「현인노래비」등이 있어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 송도와 영도를 잇는 남항대교,방파재 오른쪽은 공동어시장, 그 뒷산은 천마산이다. 

 

▲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곳은 다대포이고, 앞으로 보이는 곳은 송도해수욕장이다.

 

▲ 봉래산 자봉(해발 387m)의 팔각정

 

 

 

 

절영해안산책로는 부산의 갈맷길로서 영선동 반도보라아파트에서 산책로가 시작되어 태종대 감지해변까지 연결된다. 이곳은 과거에는 지형이 가파르고 험난한 군사보호구역으로 접근이 어려웠으나 근래에 공공근로사업으로 조성한 산책로로서, 대마도와 송도 쪽으로 드넓은 바다 풍경을 배경삼아 연장 3㎞의 해안산책로를 2시간 정도 굽이굽이 거닐 수 있는 거리이다. 전국 어느 도시에서도 느낄 수 없는 꿈과 낭만이 가득한 해안산책로에서 바다를 마음껏 품어 볼 수 있는 멋진 갈맷길이다.

 

 

 봉래산과 서복 전설

봉래산(蓬萊山)은 영도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해발 393m의 높이를 가진 산이다. 영도의 봉래산은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해 고갈산(沽渴山혹은 枯蝎山으로 표기)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전체가 대체로 원추형을 하고 있고, 마치 봉황이 날아드는 것 같은 산이라 해서 봉래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봉래산은 도교의 신선이 살고 있는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산이란 상징성을 갖고 있다. 서복은 진시황제의 명령에 따라 동쪽의 봉래산에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떠난 인물이다.

 

원래 봉래산(蓬萊山)은 중국 전설에 나타나는 영산(靈山)인 삼신산(三神山)가운데 하나이다. 동쪽 바다의 가운데 있으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 서복(徐福)은 문헌상으로 서복 또는 서불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중국을 천하 통일한 진나라의 진시황제는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사방으로 보냈으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했다. 제나라 출신의 서복은 기원전 255년 제나라에서 태어나서 진나라의 방사(方士)로 일했다. 그의 생애 동안 불로초를 찾아 동해를 두 번 가게 된다. 자기가 불로초를 구하러 갈 차례임을 알고 기원전 219년(시황 28년황 진시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가야 할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이에 시황은 크게 기뻐하여 동남동녀 수천을 뽑아 그에게 주고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아오게 하였다. 서불의 상소문에 있는 봉래산(蓬萊山)은 금강산이요, 영주산(瀛洲山)은 한라산이다. 그리하여 기원전 219년에서 210년 사이에 시작된 그의 행적은 일본까지 이어진다. 60척의 배와 5,000명의 일행, 3,000명의 동남동녀와 각각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한 그 여행은 기원전 210년까지 이어졌으나, 이후 그는 다시 황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봉래산은 영도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원추형의 산으로 지형적으로 영도를 상징하는 곳이다. 봉래산 이름은 절영진의 3대 첨사인 임익준(任翊準)이 붙였다고 한다. 봉래산은 금강산의 또 다른 이름이며, 금강산 외에도 우리나라에서도 몇 군데가 있다. 그러므로 봉래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을 가진 대명사로 이해할 수 있다. 서복이 다녀갔다는 산은 금강산과 한라산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서복의 기행 범위는 일본까지 포괄하는 동아시아 지역이므로 신령스러우면서도 일본과 가까운 절영도의 봉래산 일대도 그 안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봉래산은 역사적으로 신비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왔지만, 현재는 영도 주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생활과 체육의 공간이며, 많은 생태자원을 보유한 산이다.

 

영도 봉래산은 주위에 청학동이나 신선동 등 도교적 분위기를 풍기는 지명을 거느리고 있다. 도교가 성행하던 당시 중국에 살던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서복을 동으로 보냈던 곳이다. 서복이 바다 가운데 섬으로 불사약을 보았다고 보고한 곳이 봉래선산(蓬萊仙山)인 것이다. 제주에는 서복이 지나갔다는 전설이 남아있고, 남해에는 “서불과차”로 해석되는 문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으며, 남쪽 일본 사가현에는 서복신사, 서복묘, 서복궁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도 봉래산은 중국을 떠나 제주와 남해를 거쳐 온 서복이 최초로 불사약을 발견한 곳이다. 오늘날 영도에 장수비결과 장수마을이 존재하기 때문에 장애인을 치료하거나 노인들을 위한 요양시설이 자꾸 들어서는 것도 이 지역에 불로초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인용자료 : 영도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