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63 - 사불산 대승사 본문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63 - 사불산 대승사

徐白(서백) 2011. 6. 18. 12:52

 사불산은 산 이름 자체가 시방세계의 부처님이 상주하는 곳이며, 사불산의 공덕봉은 불교에서 유래한 이름이기도 하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8번지 사불산 기슭에 위치한 대승사(大乘寺)는 김룡사를 창건한 운달조사가 그보다 한해 앞선 진평왕 9년 587년에 개산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망명비구(亡名比丘)에 의해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기록으로는『삼국유사』「사불산 금불산 만불산조」에 관련되어 자세한 이야기가 전한다. 진평왕 9년 갑신년에 홀연히 큰 돌 하나가 삼면이 모두 한 길이나 되고 사방에 여래상이 있는데, 붉은 비단으로 싸여 하늘에서 이 산의 정상에 떨어졌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수레를 타고가 우러러 예배하고 마침내 절을 창건하고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 법화경을 강론하는 스님을 청하여 절에 머무르게 하면서 석불을 청소하고 공양과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산 이름을 역덕산 또는 사불산이라 한다. 스님이 죽은 뒤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서 연꽃이 피어났다.

 

신라가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법흥왕 14년 대승사 창건 60여년 전의 일로 볼 때 귀족세력과 불교의 힘을 빌려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의해 세워진 사찰인 듯하다. 그러므로 대승사는 신라불교의 개척자와 같은 존재로 왕이 직접 행차하여 창건을 명한 중요한 사찰이었다. 창건 이후 조선시대 득통 기화스님이 대승사에 머물며 반야경을 공부하고 유학자들의 배불론에 맞서 교학사상을 선양했고, 임진왜란으로 절은 대부분 소실, 1604년(선조37)부터 1701년(숙종27)까지 약100년간 중건과 보수가 이어졌다.

 

1725년에는 의학이 삼존불사를 개금하였는데 이때 아미타불의 복장에서 사리 1과와 신룡(神龍) 원년(705)에 금으로 쓴 『화엄경』 7권이 나왔다. 1862년(철종13)에 명부전과 응진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자 의운(意雲), 취월(就越), 덕산(德山) 등이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4)에는 누각 등을 건립하였다. 1872년에는 의운이 극락전을 중건하였다. 1956년에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1966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승사는 한때 아홉 암자를 거느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고려말 나옹 혜륵선사(1320-1376)가 출가하여 득도한 곳으로 알려진 묘적암, 윤필암, 보현암, 총지암이 있다.

 

 

근세의 학승이자 동국대학교 초대총장을 역임하셨던 퇴경당 권상로(退耕堂 權相老,1879~ 1965년) 대종사가 쓴 '四佛山大乘寺(사불산대승사)'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퇴경당 권상로는 문경 출신으로 1896년 김룡사(金龍寺)에서 출가하였고, 사불산 대승사(大乘寺) 주지, 조선불교월보사 사장,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일주문은 남섬부주(우리가 살고 있는 국토)에서 7山8海의 산과 바다를 건너와 이제 수미산 기슭에 도착하게 되는데, 바로 이 일주문이 서 있는 자리가 수미산 기슭에 해당한다. 이 일주문을 경계로 문 밖을 속계라 하고 문 안을 진계라고 한다. 세속의 세계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를 들어서는 첫번째 문으로 기둥이 한 줄로 세워진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일주문은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일주문 뒷편에는 己亥五月(1959년 5월)에 金炳光이 쓴 '不貳門(불이문)' 편액이 걸려 있다.

 

 

이중기단에 3층석탑으로 상층 기단의 면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모각되어 있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의 몸돌은 각 층 모서리마다 우주(隅柱)를 새겨 놓았으며 1층 탑신의 남쪽 면에는 불상을 봉안한 듯한 감실이 만들어져 있다.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4단이지만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하여 어느 때 만들어진 석탑인지 알 수가 없다.

 

 

 

 

대웅전 앞마당 좌우에는 정료대(庭燎臺)가 있다. 화광대 또는 노주석(爐柱石)이라고도 하며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부른다. 한밤중 행사 때, 관솔불을 피워 올려 놓던 곳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자리하고 있는 대승선원은 참선을 하는 장소인 선방을 말하는 것으로 월산(月山)의 글씨인 '대승선원(大乘禪院)' 편액이 걸려 있다.

 

 

대승선원에 봉안되어 있는 보물 제991호 "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聞慶 大乘寺 金銅觀音菩薩坐像)"으로 유리상자를 씌워 모셔 놓았다. 불상 속에서 나온 관음보살원문(觀音菩薩願文)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조선 중종 11년(1516) 불상에 새로 금을 칠하기 이전인 1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으며, 양쪽 귀에 걸친 머리카락은 여러 가닥으로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귀는 약간 짧고 목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가 명확하게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팔에 걸쳐 내려 무릎을 덮고 있으며, 전신에 걸쳐 화려한 구슬 장식이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고, 왼손은 팔꿈치와 수평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가슴, 배, 무릎에 표현된 구슬 장식이 경상북도 영덕의 장육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과 흡사하지만 어깨와 등의 번잡한 장식이 옷속에 감추어진 점이 다르다. 특히 띠매듭 바로 위의 치마상단이 긴 상체의 가운데에 표현되어 마치 보살상을 둘로 나눈 것처럼 보이게 한 것 또한 이 불상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승선원(大乘禪院)에 裵吉基(배길기)가 쓴 '天降四佛(천강사불)'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대승사 뒷산의 사불암(四佛巖)의 설화와 관련지어 편액을 쓴 것을 알 수 있다.

 

 

대승선원(大乘禪院)에 天降四佛(천강사불) 편액과 나란히 걸려 있는 또 다른 편액으로, 땅에서 한 쌍의 연꽃이 솟아 올랐다는 뜻의 '地聳雙蓮(지용쌍연)' 편액이다. 대승사(大乘寺)를 창건하고, 법화경을 강론하는 스님을 청하여 절에 머무르게 하면서 석불을 청소하고 공양과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는데, 그 스님이 죽은 뒤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서 연꽃이 피어났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내용의 편액이다.

 

 

대승선원(大乘禪院)에 걸려 있는 '無量壽殿(무량수전)' 편액

 

 

 

월산(月山)이 쓴 '靑蓮堂(청련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건물은 종무소와 요사채로 쓰이고 있다.

 

 

대웅이란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하는데서 유래된 부처님의 덕호(德號)이며 『법화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에 다포식 건물로 1960년 이후 중건했다. 전면 좌우 협칸의 창호는 4분합의 문을 달았으며, 어칸은 6분합의 문에 꽃살을 장식하였다. 천정은 반자로 마감처리하였고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하고 화려한 후불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웅전 목각후불탱은 조선후기에 조성한 아름답고 섬세한 목각의 후불탱으로, 그 관계 문서 등과 함께 보물 제575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1869년(고종 6) 무렵 대승사로 옮겨왔다. 이 목각탱은 아미타후불탱을 나무에 부조(浮彫)와 투조(透彫)의 기법을 혼용하여 조각한 것인데 비단에 채색하는 일반적인 아미타후불탱과 구도나 형태 면에서 거의 흡사하다. 중앙에는 광배와 연꽃 대좌를 부조하고 여기에 별도의 본존 아미타불상을 안치하였다. 이 좌우로 5단에 걸쳐 협시상들을 배치했는데, 좌우 3위씩 4열을 맞추어 좌우대칭으로 배열하고 있다. 사천왕, 관음․대세지․문수․보현․제장애(除障碍)․금강장(金剛藏), 지장․ 미륵의 팔대보살, 2천상(二天像), 일궁(日宮)과 월궁(月宮)의 이천자(二天子), 6대제자상 등이 졍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들 불보살상의 자세는 입상과 좌상 외에 무릎 꿇고 앉은 공양상 등 매우 다양하다. 한편 각각의 불보살상에는 이름을 적은 명패가 붙어 있어 도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상단 좌우에는 화불(化佛)과 비천(飛天) 등을 장식하였다. 불보살상 각각의 양식은 대체로 사각형에 가깝고 또한 평판적(平板的)이며 투박한 모습을 지녔다. 이는 18세기 불교 조각의 공통적 경향이었다. 그러나 구도와 조각의 조화, 세밀함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환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조선 후기의 이러한 목각탱은 예천 용문사와 상주 남장사 등에만 유례가 남아 있다. 여기에 원래의 봉안처였던 영주를 포함하면 목각탱의 조성지는 모두 경상북도 북부에만 한정된다. 아무튼 대승사의 목각탱은 남아 있는 유례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또 조각이 가장 뛰어난 걸작이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대웅전 문의 아름다운 꽃창살

 

 

기단석 사이에 연꽃을 양각한 옛 석재를 끼워 세월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건물양식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익공형식의 맞배지붕이다. 창호는 빗살무늬로 양 협칸은 1분합문이고, 어칸은 2분합문을 달았다.

 

 

삼성각 내부에는 목각의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독성탱과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양식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5단의 불단을 마련하여 석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삼존상의 좌우와 위로는 오백나한상을 가득히 봉안하였다.

 

 

 

극락전은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수명장수하고 극락왕생을 보장하며 자비를 베푸는 분이다.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안에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을 봉안하였다.

 

 

명부전 또는 지장전(地藏殿)으로 명부의 세계를 관장하는 지장보살과 시왕이 모셔지는 전각을 말한다.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이다. 안에는 목조 지장보살상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 협시로 소조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을 봉안하였다.

 

 

 

윤필암(閏筆庵)의 전경과 사불전(四佛殿)의 모습이며 사불전은 따로 부처를 모시지 않고 사불산 정상의 바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유리로 창을 마련해놓았다. 다만 바위에 새겨져 있는 불상들의 흔적은 오랜 세월의 비바람에 다 마모되어 사방불의 모습이 명확하지 않다.

 

 

사불전에서 바라본 사불암(四佛巖)

 

 

 

 

가까이에서 본 사불암(四佛巖)이며, 아래 사진의 향(向) 좌측에 입상의 부처님 모습이 보인다.

 

 

사불전 유리창에 반사된 사불암이 있는 봉우리의 모습

 

 

사불전 법당 안에서 바라 본 사면석불(사불암)

 

 

 

"대승사 마애여래좌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로 지정되어 있고, 윤필암에서 묘적암 가는 산길 오른쪽에 높이 6m, 너비3.7m의 거대한 마애여래좌상이다.  앞으로 약간 기울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고 윗부분에 갓을 설치하여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머리 상부에는 화염문을 변형시킨 2개의 연꽃형 뿔 모양을, 갸름한 얼굴에 눈은 거의 감고 입술은 두터우며 귀는 길다. 목에는 2줄의 띠를 두르고 옷은 통견이고, 시무외인의 모습이다. 7엽의 연꽃을 새긴 대좌 위에 서 있으며 광배에는 불꽃 무늬를 새겼다. 이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마애불상 계열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