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62 - 칠갑산 장곡사 본문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62 - 칠갑산 장곡사

徐白(서백) 2011. 6. 3. 23:29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칠갑산(七甲山, 해발 560m)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본사 마곡사의 말사인 장곡사는 寺誌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850년(문성왕 12년)에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창건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칠갑산 장곡사는 대웅전을 두개나 가지고 있는 반면 탑은 하나도 없다. 또한 대웅전에 봉안된 부처님도 기존 사찰과 다르다. 대웅전에는 일반적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데, 장곡사 하대웅전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을, 상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습니다. 약사여래부처님을 주불로 모신고 있는 전각은 약사전이라 하고, 비로자나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전각을 대적광전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른다. 그런데 장곡사는 왜 모두 다 대웅전이라고 했을까. 그리고 대웅전을 두개나 지니고 있을까.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약사불을 주불로 모신 하대웅전은 우리들이 사는 예토세계를, 비로자나부처님이 주불로 모신 상대웅전은 부처님 나라인 정토세계를 조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사불은 병들어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쾌유의 희망을 주는 부처님이고, 비로자나부처님은 우리들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면 가는 연화장세계에 계신 부처님이다. 장곡사는 약사불과 비로자나불을 통해 중생들이 사는 예토의 세계와 깨달음을 이룬 정토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장곡사는 약사불이 봉안된 하대웅전을 통해 중생들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현실의 아픔을 해결해 주고 있다.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상대웅전을 통해서는 모든 수행자들이 열심히 수행정진하여 깨달음을 증득할 것을 경책하고 있다.

 

아래쪽에는 운학루(雲鶴樓), 하대웅전(보물 제181호), 지장전, 봉향각, 범종루, 설선당, 위쪽으로는 상대웅전(보물 제162호)와 응진전, 삼성각이 있다. 하대웅전에는 고려시대의 금동약사불좌상(보물 제337호)이 봉안되어 있고, 상대웅전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철조약사불좌상부석조대좌(국보 제58호)와 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보물 제174호)가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충남 청양 칠갑산 장곡사의 일주문이다. 건물의 양식은 맞배지붕을 올렸고 겹처마에 다포식 일주문이다.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 문은 사찰로 들어 가는 첫 번째 문으로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일주문이다. 만법(萬法 : 모든 법)이 하나로 통한다는 법리를 담고 있어 삼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七甲山長谷寺(칠갑산장곡사)'라는 편액은 산명과 사찰명을 밝힌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한 범종루이다. 자연석으로 축대처럼 높게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누하주, 누상주 모두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익공으로 짜고 기둥 사이는 모두 트여 있고, 상층 외곽은 계자난간을 둘렀다.

 

장곡사 범종각에서 한가지 특별한 점은 이곳에 있는 법고이다. 장곡사 법고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소가죽이 아닌 코끼리 가죽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 옛적에 인도지방에 살고 있는 코끼리 가죽을 가져 와서 북을 만들었다고 하니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하여튼 우리나라에서는 코끼리 가죽으로 만든 북은 장곡사 밖에 없다고 하니 특별한 스토리텔링이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현재 그 법고는 찢어진 채로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이지만, 장곡사 역사의 일정 부분을 안고 가는 특별한 법고임에는 틀림 없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운학루이다. 범종루처럼 자연석으로 축대를 높게 쌓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누하주, 누상주 모두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운학루(雲鶴樓)의 편액이 걸려있다.

 

 

운학루에 내벽에 걸려 있는 옛 편액들

 

 

하대웅전 앞마당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설선당과 마주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우고 맞배지붕을 올리고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다. 전면의 출입구는 유리문으로 개조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자연석을 1단 쌓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정면 3칸은 모두 문을 달았는데 모두 2분합으로 띠살로 짰다. 내부 바닥은 마루를 깔고, 천장은 구조를 드러낸 연등천정이고 불단 위에는 지장삼존상을 봉안하였다. 가운데 있는 지장보살상은 승문형의 머리에 법의는 통견이고, 수인은 오른손에는 석장을 들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올려놓았다. 지장보살상을 향해서 오른쪽에 선 도명존자는 합장의 자세로 시립하고 있으며, 왼쪽에 선 무독귀왕은 사각형 함을 받쳐 들고 있다.

 

 

 

‘說禪堂(설선당)’ 편액이 걸려 있어 선실(禪室)인 동시에 승방임을 알 수 있으며, 조선 중기에 건립된 건물로 추정된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높게 쌓고 자연석 초석을 놓은 다음 원형기둥을 세웠다. 전면 3칸 앞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여 방으로 드나들기 편하게 만들었다. 

 

 

설선당 건물에 걸려 있는 '長谷寺' 사명이 적힌 편액이다. 임자년 10월은 유신체제가 탄생된 1972 년이므로, 5공시절인 1972년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씨가 쓴 글이다.

 

 

장곡사의 하대웅전으로 불린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의 건물로 조선 중기에 지은 건물로 추정된다. 2출목의 다포계 공포를 짜고 천정은 우물반자를 설치하였으며 반자 면에는 황룡이 그려져 있다. 정면의 가운데 칸은 4분합을, 좌우 협칸에는 2분합문을 설치하였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하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금동약사여래좌상은 보물 제337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는 88cm이다. 1959년의 학술조사 시, 이 불상에서 금동경, 화엄경 등의 불경과 축원문, 백동경, 그리고 조선시대 불경류 및 비단주머니 등의 복장물과 함께 조성문이 발견되어 그 조성 년대가 지정6년(至正 六年, 1346년)임을 알 수 있어, 고려후기의 대표적 금동불상으로 꼽힌다.


불상의 양식은, 머리는 나발의 형태이며 육계는 커서 머리와의 구별이 뚜렷하지 못하다. 상호는 긴 타원형으로 윤곽이 뚜렷하고 우아하며, 목에 삼도가 뚜렷하다. 불의는 통견으로서 두터운 옷주름이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U자형으로 크게 드러낸 가슴에 꽃무늬와 점으로 장식한 내의인 승각기의 고리 및 치레장식과 띠매듭 등이 특징 적이다. 수인은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과 무릎사이의 중앙에서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자연석으로 기단과 초석을 만들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상부는 창방을 결구하고 이익공을 짜고 주간(柱間)에는 소로로 받쳤다.

 


 

하대웅전보다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상대웅전은 보물 제162호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의 특성을 구비한 다포계 맞배집이다. 자연석을 다듬어 3단 정도 쌓아 기단을 조성하였다. 기단 위에 역시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건물 내부에는 중앙의 불단에 비로자나불좌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불좌상을,  오른쪽에 아미타불좌상을 봉안하였다. 중앙에 위치한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및 석조대좌는 보물 제174호,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는 국보 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174호 '청양 장곡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및 석조대좌(靑陽 長谷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및 石造臺座)'은 장곡사의 상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는 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삼각형에 가까운 작은 얼굴에는 긴 눈썹과 가는 눈, 작은 코와 입 등이 표현되어 다소 세속화된 모습이다. 어깨는 넓지만 볼륨은 약화되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싸고 있는데, 드러나 있는 오른쪽 어깨가 너무 소홀하게 처리된 느낌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이는 비로자나불만이 취하는 독특한 손모양으로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의미를 지닌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원래의 것이 아니라 석등 대좌를 가져다 놓은 것으로 불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색한 모습이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머리광배·몸광배 안에 꽃모양의 장식이 채색되어 있다. 광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채색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옆에 놓여 있는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의 광배와 같은 양식이다. 전체적으로 평범한 얼굴, 빈약한 체형, 허술한 오른쪽 어깨의 처리 등에서 9세기 중엽 비로자나불 양식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각연사 비로자나불(보물 제433호)과 거의 같은 유형의 작품으로 보인다.(출처 : 문화재청) 

 

 

 

국보 제58호 '청양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靑陽 長谷寺 鐵造藥師如來坐像 및 石造臺座)'는 장곡사 상대웅전(보물 제162호) 안에 모셔져 있는 철불좌상으로, 나무로 된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거대한 사각형의 돌로 만든 대좌(臺座) 위에 높직하게 앉아 있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모습이다.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편이지만 양감이 풍부하지 않고 탄력적인 부피감도 줄어 들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무릎 위에 놓인 왼손에는 약항아리가 얹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싼 옷은 느슨하게 처리되었고, 옷주름 또한 드문드문 표현되었다.

4각형의 대좌는 불상보다 훨씬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중·하 3단 형태의 이 대좌는 하대가 넓고 높은 반면에 중대와 상대는 상대적으로 낮고 작은 편이다. 바닥돌은 매우 넓은 편인데, 사방 모서리에 기둥을 세운 흔적이 있어 불상을 모시던 공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대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새기고 각 모서리에는 귀꽃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다. 중대의 각면에는 큼직한 눈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상대에는 활짝 핀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광배는 원래 돌로 되었을 것이나 파손되어 조선시대에 나무광배로 대체한 것 같다. 광배 중심부에는 꽃무늬를, 테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어 신라말과 고려초에 유행하던 광배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은 특이한 탑 모양의 대좌와 감실형의 구조, 그리고 단아한 철불양식을 보여주는 9세기 말 양식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뛰어난 불상으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삼성각 내부에는 중앙에 칠성탱(七星幀)을 중심으로 좌우에 독성탱(獨聖幀)과 산신탱(山神幀)이 봉안되어 있다. 이 세 폭의 불화는 모두 불기2541년(1997)에 조성된 것으로 화기의 기록이 모두 한글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