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10 - 팔공산 동화사 본문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10 - 팔공산 동화사

徐白(서백) 2009. 4. 22. 11:47

 

「동화사사적비(桐華寺事跡碑)」에 의하면, 493년(소지왕 15)에 극달존숙(極達尊宿)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년(흥덕왕 7)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건할 때 가져온 간자(簡子)를 던져 그 떨어진 곳에 불당(佛堂)을 이룩하니 지금의 참당(籤堂) 뒤 작은 우물이 있는 곳인데, 때마침 오동(梧桐)꽃이 천우(天雨)와 어울린 아름다움에 동화사라 부르게 되었다한다.

 

이후 933년(경순왕 7)에 영조선사(靈照禪師)가 삼창(三創)하였는데, 영조선사는 당나라 설봉의존선사(雪峰義存禪師)의 법을 이어받아 중국에서도 이름을 떨친 분으로 이때부터 동화사가 선불교를 표방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짐작케 한다. 그런데 영조선사에 앞서 고려 태조(太祖)가 동수(桐藪)에서의 전쟁 시 사리탑에서 방광(放光)하고 선사(禪師)를 만나서 화를 면하게 됨에 이를 감사하여 절을 크게 도왔다고 하는 중창설도 전한다.

 

1190년(명종 20)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사창(四創)하였으며, 고려 말 1298년(충렬왕 24)에는 홍진국사(弘眞國師)가 오창(五創)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동화사를 영남승군(嶺南僧軍)의 본부로 삼았는데, 이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이 되어 팔공산성을 쌓고 승군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종료된 1606년(선조 39) 사명대사에 의한 육창(六創)이 이루어졌다. 그 뒤 1677년(숙종 3)에는 상은대사(尙恩大師)에 의한 칠창(七創)이, 1732년(영조 8)에는 관허(冠虛), 운암(雲岩), 낙빈(洛濱), 청월(晴月) 등의 스님들에 의해 팔창(八創)이 이루어 졌다.

 

이 이후로는 사찰의 여력이 있을 때마다 면면히 건물들을 신축 · 중수하였고, 1992년에는 일명 통일대불(統一大佛)을 조성하였으며, 이 시기를 전후하여 많은 당우(堂宇)들을 새로 지어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한편 동화사에서 선원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중창한 고려초기의 영조선사(靈照禪師), 고려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 고려 말의 홍진국사(弘眞國師), 조선중기의 사명대사(泗溟大師) 등이 모두 선사(禪師)였던 점을 감안해 볼 때 고려 초기나 중기에는 이미 수선도량으로 자리 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대웅전 오른편에 일곽을 이룬 금당선원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석우(石友), 효봉(曉峰), 성철(性徹) 등 해방 이후 불교정화의 주체가 되었던 스님들이 용맹정진하였던 의미 있는 선원이다. 현재 동화사는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八公山)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근래에 새로 지어진 동화문, 동화사 산문(山門)이다.

 

 

"八公山 桐華寺 鳳凰門"(팔공산 동화사 봉황문) : 실질적인 동화사의 일주문이다. 편액은 ‘팔공산동화사봉황문(八公山桐華寺鳳凰門)’이라 쓰여 있는데, 동화사의 터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기에 일주문의 이름도 봉황문이라 붙였다. 원래 일주문은 지금의 옹호문 자리에 있었으나 근래 사역을 확장하면서 지금 자리로 옮겼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후기의 건물이다.

 

                     

 

옹호문 위쪽에서 바라본 동화사 전경

 

  

옹호문이라는 편액으로 천왕문을 나타내는 옹호문 내부에 걸린 '팔공산동화사옹호문중건기'에 따르면, 원래 옹호문은 지금 봉서루 자리에 있었던 것을 지금 자리로 옮겼고, 이 자리에 있던 일주문은 통일대전 아래로 이전하였다. 대개 천왕문으로 부르지만 승군이 머물렀던 주둔지에는 사찰과 백성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담긴 옹호문으로 거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사찰에는 인간들을 잘 살피겠다는 뜻의 회전문(回轉門)도 있고,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겠다는 뜻의 법왕문(法王門) 편액도 간혹 볼 수 있다. 

 

                     

 

옹호문 내부에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좌우 협칸은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지붕 좌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전면 기둥에는 주련을 걸었고, 어칸 처마에 옹호문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주로 각종 법회와 행사를 치루며 대중 스님들의 소임을 적어 놓은 용상방이 있는 설법전이다. 지상 1층이지만 지형차를 적절히 활용하여 하부에 지하층을 만들어 공양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봉황이 깃드는 누각이라는 뜻의 봉서루는 오동꽃이라는 동화사의 절 이름과 짝을 이루고 있으며 대웅전 정면에 있는 건물이다. 봉서루로 오르는 계단 한가운데는 가운데가 옴폭 파인 암반이 놓여 있고 그 안에 둥근 모양의 돌이 있는데, 암반은 봉황의 꼬리에 해당되고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 즉 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튼다는 봉황을 상징하는 누각임을 알 수 있다.

 

 

봉서루 계단의 봉황의 꼬리에 해당하는 암반과 봉황알이다. 원래는 바위 위에 얹혀져 있었는데, 지금은 아래쪽에 놓아 모든 사람들이 쉽게 만져볼 수 있게 하였다.

 

 

 

"통일 범종루"라는 편액이 붙어있는 범종루

 

 

봉서루의 배면에 걸린 현판은 ‘영남치영아문’이라 써 있는데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서 영남승군사령부를 두어 승군을 조련 지휘하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 승군들이 활약한 대표적 시기는 말할 것도 없이 임진왜란 와중이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산대사(1520~1604)는 선조의 부탁으로 창의 궐기문을 전국 사찰에 보낸다. 대사의 호소를 받은 승려들은 분연히 의승군(義僧軍)에 참여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73세나 된 고령의 서산대사 본인도 1500여 승병을 이끌고 평양성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동화사와 남지장사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1544~1610)가 대구에 남긴 임진왜란 유적이다. 1595년부터 동화사에서 활동했던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중 이 절을 영남 지역 승병의 총본부로 사용했다. 대웅전 앞 봉서루 뒷면 벽에 걸려 있는 현판에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衙門)'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승군은 다른 말로 치군(緇軍)이라고도 한다. ()가 승려들의 옷을 뜻하는 한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남치영아문은 '영남 지역에 설치된 승려 군영의 문'을 의미하고, 이 현판이 봉서루에 걸려 있는 것은 동화사가 임진왜란 중 영남 지역 승군 본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원래의 "영남치영아문" 현판은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대웅전 앞의 마당에 놓여 있는 배례석(拜禮石)은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된다. 존귀한 부처님이기에 중앙에서 옆으로 살짝 비켜난 곳에 배례석을 놓았다.

 

 

동화사의 주불전이다. 내부 중앙 불단에 주존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방정토의 약사여래, 서방정토의 아미타여래를 모셨다. 불상 뒤로는 후불탱을 걸었는데 영취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불이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을 모셨다. 양쪽 측면 벽에는 삼장탱과 지장탱, 신중탱 등을 모셨다. 2008년 6월에 보물 제1563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이란 편액은 서산대사의 글씨라고 한다.

 

 

중앙 불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방정토의 약사여래, 서방정토의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그 뒤에는 후불탱으로 영취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불이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을 모셨다. 그리고 측벽에는 삼장탱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 등을 모셨는데, 석가삼존불은 상호(相好)나 양식이 서로 같고, 다만 법의(法衣)의 착의법과 수인(手印), 그리고 크기가 약간 다르다. 나발의 머리에는 낮고 평평한 육계와 중앙계주, 정상계주가 갖춰져 있다. 법의는 중앙 석가모니불이 왼쪽어깨에 걸쳐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는 변형식 우견편단으로 걸치고, 좌우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걸쳤다. 수인은 중앙 석가불이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좌우 협시불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수인을 대칭적으로 결하였다.

 

 

천장의 닫집에는 세 마리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봉황이 날개를 달고 극락세계로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대웅전 내부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탱

 

 

대웅전 내부에 봉안되어 있는 신중탱

 

 

대웅전 내부에 봉안되어 있는 삼장탱이다.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측은 지지보살, 우측은 지장보살이다. 천장보살의 협시는 진주와 대진주보살, 지지보살의 협시는 용수와 다라니보살, 지장은 본래대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다.

 

 

대웅전 꽃살문

 

 

 대웅전 꽃살문

 

 

 대웅전 꽃살문

 

 

 대웅전 꽃살문

 

 

 

위쪽 사진은 화엄당, 아래는 법화당 건물인데 스님들의 거처로 쓰인다.

 

 

 

산신각과 산신탱

 

 

 

 

조사전에는 공산개산조(公山開山祖) 극달스님을 비롯해 27폭의 조사(祖師) 진영을 모셨다.

 

 

현재 주지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시는 곳이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안에는 뒷벽과 좌우 벽에 잇대어 'ㄷ'자형 불단을 놓고 석가삼존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원음각은 범종각의 다른 이름으로 부처님은 하나의 음성을 내지만 그 음성은 원음이 되어 울려 퍼지며, 모든 중생이 근기에 따라 이익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에서 유래한다. 즉, 원음은 부처님의 음성을 뜻한다.

 

 

"팔공산 동화사적기"를 기록해 놓은 곳이다.

 

                     

 

보물 제254호, 동화사 당간지주 :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운 돌기둥을 말한다. 당간은 당을 달아두는 장대이다. 이곳의 당간은 없어지고 당간지주만 남아있는데, 돌로 만든 지주의 안쪽 위와 아래쪽에는 기둥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두 군데 있는데, 위쪽에는 장방형이고 아래쪽은 원형으로 마련되어 있다. 동쪽 지주의 아래쪽에 만들어진 둥근 구멍은 관통되어 보조대로 고정되도록 되어있다. 지주의 바깥 면은 모서리를 죽이고 중앙에 가로로 음각대가 두 곳에 새겨져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악당(仁岳堂)’이란 편액이 걸린 허름한 비각 안에 봉안되어 있는 비석으로 인악대사의 전기(傳記)를 기록한 것이다. 귀부를 거북으로 하지 않고 봉황으로 조각한 점은 다른 비석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이런 형태는 널리 알려진 대로 동화사의 지세가 봉황이 알을 품은 형세[鳳凰抱卵形]라고 말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비문은 1808년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 김희순(金羲淳)이 짓고 글씨도 썼는데, 왕희지 풍의 필체로 서법이 매우 유려하다.

 

 

                     

 

 

 

동화사 마애여래좌상은 보물 제24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대체적으로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섬세하고 화려한 이 마애불은 동화사의 중창주인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그 양식상으로도 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고 수인을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이다. 머리와 몸 뒤의 광배는 선으로 표현하였고, 그 가장자리를 불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표현이 정교하다. 연꽃대좌는 구름 위에 떠 있어 사뿐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구름 무늬의 사실적인 표현으로 불상이 더욱 생동감 있게 느껴진다.

 

 

 

 

약사여래불 입상을 중심으로 그 앞에 삼층석탑 2기를 좌우로 두고 전면에 지상 3층 규모의 전각인 통일대전을 지었다. 통일대전은 상층 불전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하층은 성보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92년 조성한 통일기원(統一祈願) 약사대불(藥師大佛)을 중앙에 봉안하고, 석불 맞은편에 통일대불전(統一大佛殿)을 조성하였다. 이 대불은 분단의 벽을 허물어 민족의 고통을 치유함과 동시에 한민족의 하나됨을 염원하여 조성된 것으로 전북 익산(益山)의 황등석(黃橙石)을 사용하여 108명의 석공들이 약7개월 동안 조성하였다. 높이는 33m, 둘레는 16.5m로 대불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2과를 모셨으며, 앞쪽에는 2기의 통일석탑과 2기의 통일석등을 건립하였다.

 

이 대불은 원만한 얼굴에 민머리에 육계를 갖추고, 법의는 두 어깨를 덮는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치고, 한손에는 약합(藥盒)을 한손은 설법인(說法印)을 취한 약사불의 수인을 결하고 있는 전형적인 약사불의 형식으로 각계 전문가들의 고증과 조언을 거쳐 조성되어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