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9 - 황악산 직지사 본문
직지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적기 자료는 여러 종류가 전한다. 이들 자료는 대부분 1980년에 영인된 직지사지에 종합적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1681년 조종저(趙宗著)가 지은 「금산황악산직지사사적비명(金山黃岳山直指寺事蹟碑銘)」과 1776년 급고자(汲古子) 스님이 지은 「경상도금산군황악산직지사고선종대가람사적(慶尙道金山郡黃岳山直指寺古禪宗大伽藍事蹟)」이 대표적 자료라고 하겠다. 물론 이전에도 학조대사(學祖大師)가 편찬한 사적기와 율곡 이이(李珥)가 1577년에 편찬한 사적기가 있었으며, 직지사의 역사는 대부분 위의 두 자료에 의존하여 설명되고 있는 상태이다.
이들 사적기 자료에는 직지사가 418년(신라 눌지왕 2년)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아도화상이 구미의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할 때 이곳 직지사도 함께 창건하였다는 설인데, 직지사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각종 사적기에서는 예외 없이 이 설을 밝히고 있다.
직지사의 창건과 관계된 내용 가운데 주목되는 또 하나의 사항은 ‘직지(直指 : 곧을직, 손가락지)’라고 하는 절 이름의 유래다. 직지는 보통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참된 마음 곧, 불성(佛性)을 똑바로 깨치고 밝히면 부처를 이룬다)’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전설로는 그 첫 번째는 창건주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이후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만한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한 데서 절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다음 두 번째는 고려 초 능여(能如) 스님이 사찰을 중창할 때 자(尺)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의 손으로 땅을 재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찰명이 지어졌다는 설이다.
아울러 고려시대 이전까지의 직지사 역사로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자장 율사(645년), 천묵 화상(930년)의 중창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과 능여(能如) 대사와의 깊은 관계 때문인데, 사적기에 의하면 태조의 지원에 의한 대규모의 직지사 중창이 936년에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고승 학조(學祖) 대사가 이 곳에 주석하며 중창불사를 이룩함으로써 사세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1596년 왜적의 방화로 사찰 대부분이 소실된 것은 사명대사가 출가한 절이라하여 왜군에게 혹독한 보복을 받은 것이다. 1602년부터 다시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이후 60여년 간 사찰의 면모를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나갔으며, 1662년 마침내 중창불사를 회향하게 되었다.
사명대사가 입적하자 1610년 스님의 유골을 이곳에 모셔와 부도를 봉안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국난극복에 큰 공적을 남긴 서산대사와 사명 대사가 관계된 사찰에 적지 않은 지원을 하고 있었는데, 직지사 역시 이때 조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8년 녹원(綠園)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후 옛 사격을 되살리기 위한 대대적 중창불사를 진행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옛 사격을 되찾으려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직지사는 현재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자료제공 :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이란 편액이 걸려있는 근래에 새로 지은 솟을삼문형식의 위풍당당 황악산문으로 편액의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의 필적이다.
황악산(黃岳山)의 황자는 청(靑), 적(赤), 백(白), 흑(黑), 황(黃)의 오색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사찰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籃)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직지사로부터 김천까지는 12㎞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 부산까지는 218㎞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내의 부처님 뵈러 들어가는 길
스님의 행적비와 사적비, 공덕비를 함께 모아 놓은 비림이다.
일주문 :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일주문이다. 현판의 "黃岳山 直指寺" (황악산 직지사)글씨는 조맹부(1254∼1322)가 썼다.
일주문의 사액이 걸려있는 아래 안쪽에는 자하문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아래의 안쪽에는 자하문이란 또다른 편액이 걸려있는데, 자하문이란 자주빛 안개가 서려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자주빛은 자금색의 준말이며 부처님의 몸 빛깔이 자금색이라고 한다. 동양에서 자색은 길상을 상징하는 최고의 색으로 일생에 한 두번, 생애 최고의 경사가 있을때 자색(붉은 빛의 금색)이 잠깐 사람의 얼굴에 비친다고 한다.
부처님의 큰 광명을 상징하는 문으로 일주문과 금강문 사이에 있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문 양쪽에 인왕이 그려져 있다.
만덕전 편액이 걸려있는 건물이다. 국제간의 불교 교류와 불교연수를 위한 회관입니다. 편액은 현존하는 중국 4대 명필 중 한분인 중국불교협의회 회장 조박초 거사의 필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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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문은 금강저를 들고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를 모시는 전각입니다. 금강역사는 힘뿐만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갖춘 불교의 수호신으로 현겁 천불의 법을 수호한다. 법당쪽에서 볼때 사찰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과 문수보살,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과 보현보살이다.
금강문과 불이문 사이에 있는 문으로 임진왜란의 병화를 모면한 중요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불법(佛法)을 사방에서 수호하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안치한 곳이 천왕문이다. 사천왕은 발심하여 불법에 든 수행자를 외호하며, 그들이 불이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한다. 김천 직지사의 대웅전 편액과 천왕문 편액은 친일파 이완용의 글씨임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2008년에 발견되어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한편 직지사 '사명각' 편액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
동방을 지키는 지국천왕은 손에 비파를 들고있으며, 인간의 기쁜 감정과 봄을 관장하고, 얼굴색은 푸른색이다. 또한 선한 자에게는 복을 악한자에게는 벌을 내리는 천왕이다.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손에 칼을 들고 있으며, 인간의 사랑 감정과 여름을 관장하고, 얼굴색은 붉은 색이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푸는 천왕이다.
서방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인간의 노여운 감정과 가을을 관장하고, 얼굴색은 백색이다.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구도심을 일으키게 하는 천왕이다.
북방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손에 보탑을 들고 있으며, 인간의 즐거운 감정과 겨울을 관장하고, 얼굴색은 검은색이다. 그리고 어둠 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하는 천왕이다.
만세루는 대웅전 앞쪽에 있는 2층의 누각으로, 원래는 37간의 거대한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백여 년 전에 화재로 전소되어 1978년에 신축된 것이다. 정면 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건물양식을 살렸다.
직지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지(道川寺址)에 무너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온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 3기 가운데 2기이다. 이렇듯 한 절터에 크기나 양식, 세부가 똑같은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 경우는 매우 특별한 예이다. 두 탑 모두 각 부분의 양식이 같아서 단층으로 형성된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여러 장의 넓적한 돌로 짠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층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탑신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1층 지붕돌에는 추녀 끝마다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져 있다.
얇고 평평한 옥개석의 층급받침으로 1·2층은 5단, 3층은 4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탑은 74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으며, 1976년에 상륜부를 추정 복원하였다.
탑신의 1층 몸돌 높이가 지나치게 높긴 하나, 전체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기단이 1단이고, 지붕돌의 들린 정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9세기)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크기는 높이 약 900㎝이다. 1976년 보물 제606호로 지정되었다.
탑의 상륜부이며, 1976년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장식해 놓은 것이다.
탑신부의 2층과 3층의 옥개석 사진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으로 1·2층은 5단, 3층은 4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탑의 기단부에 해당하는 1단의 기단인데, 여러 장의 넓적한 돌로 짠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기둥(우주)와 가운데기둥(탱주)이 새겨져 있다.
대웅전(大雄殿)은 팔작지붕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조선시대 후기 1735년(영조 11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1985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15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이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이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대웅전이라고 한다. 안에는 불단 중앙에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아미타여래를 봉안한 삼불상을 모셨다. 후불탱은 각각의 여래상 뒤에 한 폭씩 있어서 모두 3점인데, 1744년(영조 20)에 진기(震基)와 지영(智英) 금어가 조성하였다. 1980년 각각 보물 제670-1·2·3호로 지정되었다.
법당을 중심으로 대웅전 계단 오른쪽 소맷돌 용의 모습은 입을 크게 벌리고 '아'하는 형상이고, 왼쪽 용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훔'을 나타낸다. 두 용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과 완성을 상징한다.
대웅전의 주존불인 석가모니불이고, 가사는 통견이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후불탱은 영산회상탱으로, 보물 제670-1호로 지정되었다. 석가여래가 영축산(靈鷲山)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화면 중앙에 석가여래가 앉아 있고 그 양옆으로 팔대보살, 십대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으며 둘레에 많은 범문(梵文)을 써 놓았다. 석가여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우견편단으로 착용하였다. 비교적 균형 잡힌 체구와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두광과 신광이 매우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협시하고 있는 약사불좌상과 보물 제670-3호의 후불탱 약사회상탱화이다. 손에 약합이나 보주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 불상에는 특징이 나타나지 않아, 후불탱화를 통해 약함을 들고 있는 약사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후불탱은 적.녹.황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석가모니불의 우협시인 아미타불이고, 가사는 통견이고 아미타구품인인 하품중생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아미타회상도 후불탱은 오른쪽에 위치한 아미타회상도로 보물 제670-2호로 지정되었다. 화면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관음보살, 대세지보살과 신장상 등이 주위를 둘러싼 구도이다.
불단 중앙에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여래불의 삼세불을 모셨다.
성좌각 안에는 독성(獨聖)과 산신(山神), 칠성(七星)을 모시고 있는데, 삼성각(三聖閣)과 같은 역할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전면의 측칸은 각 1분합의 문, 어칸은 2분합의 문을 달았다.
성좌각 내부의 산신탱, 칠성탱, 나반존자의 모습.
늘어진 배에 길상의 모습을 한 포대화상이다. 지팡이에 자루를 매달고 다니면서 인간의 번뇌와 고통을 자루에 담고, 포대에서 웃음과 기쁨을 내주시는 스님이다.
대한불교조계종과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 지정한 한국의 33관음성지 중에서 제20호로 지정된 관음전이다. 관음전(觀音殿)은 원통전이라고도 하는데,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를 하고 있다. 안에는 금동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관음보살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오른손으로 연꽃을 들고 왼손으로 받치고 있다. "관음(觀音)"이란 "소리를 본다"는 뜻으로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고통받는 소리를 듣고 구제해 주는 보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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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진이란 "존경받을 만하다", "공양받을 만하다"라는 의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16나한을 봉안하였다.
석가여래의 수기를 받은 16나한의 본존불은 수기불(授記佛)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앙 본존불은 석가여래, 왼쪽에는 제화갈라보살이 협시로 봉안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장차 미래에 부처님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미륵보살이 모셔져 있다.
명부란 저승세계를 뜻하게 되는데, 따라서 명부전(冥府殿)안에는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문인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고, 그 주위로 시왕과 판관·녹사·사자·인왕 각 2위가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은 원래 인도의 지신(地神)에서 유래한 보살입니다. 이 보살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등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꿑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서원을 세운 분이다.
비로전(毘盧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7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조선시대 중기에 지어졌으며 1990년대에 중수되었다. 천불전(千佛殿)이라고도 한다.
안에는 비로자나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여래과 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삼신불 둘레로 경주 옥석으로 조성한 천불상과 석조 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물 제607호, 직지사 비로전 앞 삼층석탑이다. 전체적인 양식과 조성시기는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과 동일하다.
약사는 말 그대로 병을 치료해주는 사람으로 대중들에게 질병은 큰 고통이었다. 따라서 부처님이 병을 치료해주시기를 기원하면서 약사부처님이 등장하였으며,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인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약사불은 다른 불상과는 달리 손에 약합이나 보주를 들고 있다.
황악(黃嶽)은 직지사가 위치하고 있는 산의 이름으로 해동의 중심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청황적백흑, 5색 중 중심색이 황을 이름으로 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불교 전문 강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지금은 불교 성보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개조된 성보박물관이다.
청풍료 앞 삼층석탑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강창(江倉) 부락의 강락사지(江洛寺址)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68년 당시 선산 군청 앞뜰에 옮겨 복원하였고, 1980년 10월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촬영된 사진을 보면 1917년만 하더라도 완전한 상태였으나, 그 뒤 일제강점기 말에 도굴범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통일신라 9세기경의 석탑으로, 1993년 보물 제1186호로 지정되었다.
설법전의 모습
남월료는 장경(藏經)을 강론하는 곳입니다. 편액은 중국의 조박초(趙樸初)라는 분이 썼다. 1층은 공사(供司)의 대중이 거쳐토록 한 일종의 후원(後院) 형식 건물이고, 2층은 강월 학인들을 위한 강당이다. 정면 11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외에 사진에는 없지만, 사명각(四溟閣)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지휘하여 호국에 앞장섰던 사명 대사(1544∼1610)를 기리는 전각이다. 사명대사는 명종 14년(1559년) 15세에 직지사로 출가, 신묵대사의 제자가 되었고,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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