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97 - 우리나라 최대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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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97 - 우리나라 최대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

徐白(서백) 2012. 12. 19. 17:45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254번지 반야산 기슭에 있는 관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석조(石造) 미륵보살입상(立像)과 석등(石燈)이 있으며, 고려시대 968(광종 19)년에 혜명(慧明)이 창건하였다.

 

관촉사가 자리잡은 논산에는 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그중 염라대왕의 설화는 유명하여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왔다. 예로부터 전해오길 염라대왕은 저승에 논산 사람들이 오면 물어보는 말이 있다고 한다. 개태사의 가마솥과 강경의 미내다리 그리고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보았느냐고 물어 본다고 한다. 그만큼 논산의 유명한 보물이기에 전해오는 말이다. 그중 단연 논산 제1경에 꼽히는 것이 은진미륵 부처님이다. 대표적으로 석가모니는 석굴암이고, 비로자나불은 경주 기림사이다. 미래에 오실 미륵불은 관촉사 은진미륵불이다.

 

관촉사의 미륵부처님을 은진미륵이라 부르는 것은 예전 논산지역은 은진과 노성으로 크게 행정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바로 관촉사 미륵부처님께서 계신 지명이 은진이었기 때문이다.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恩津彌勒) 부처님은 서기968년 고려 광종때 모셔진 것으로 전해 온다.

 

38년간에 걸친 불사가 완성되고 1006년(목종)에 드디어 높이 18.1m 둘레 11m 귀의 길이만 해도 3.3m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불상이 968년 모셔졌다. 그때 미륵부처님의 미간의 백호 수정(水晶)에서 찬란한 빛이 발하여, 중국 宋나라에 까지 이어졌으며, 그곳의 지안(智安)이라는 고승이 빛을 따라 찾아와 배례한 뒤 "마치 촛불을 보는 것 같이 미륵이 빛난다"라고 하면서 사찰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비는 관촉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비이며, 6.25전쟁에 참전하여 항거하다 장렬하게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거룩한 희생과 위국, 헌신정신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세들이 애국심을 함양하여 자유수호의 초석이 되어 다시는 이 땅에 이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고 자유와 평화가 영원하기를 기원하여 논산시와 뜻있는 인사들의 정성을 모아 자유총연맹 논산시지회가 1990년 5월에 건립하였다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일주문이다.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 문은 사찰로 들어 가는 첫 번째 문으로, 맞배지붕이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고,공포는 다포식 공포이며 "盤若山灌燭寺(반야산관촉사)"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있다.

 

관촉사의 천왕문으로 사천왕문이라고도 한다. 사찰로 들어가는 2번째 문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한 건물이다. 천왕문은 佛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천왕들이다.

 

동방의 지국천왕은 음악의 신 건달바들의 왕임을 상징하는 비파를 손에 들고 있으며, 선한 자에게는 복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린다. 남방의 증장천왕은 손에 칼을 들고 있으며,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푼다.

 

서방의 광목천왕은 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구도심을 일으키게 한다. 북방의 다문천왕은 손에 보탑(사리기)을 들고 있으며, 어둠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한다. 그리고 사천왕 중의 가장 우두머리 천왕이고,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잘 듣는다하여 多聞이라한다.

 

특이한 형태의 문으로 돌을 방형으로 깍아 양쪽에 지주를 세웠다. 앞면의 기둥에는 '관촉사'와 '解脫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옛날에 관촉사의 경내로 들어가는 해탈문으로 사용된 석문이다. 뒷면에는 장대석을 연결하여 쌓아 터널을 이루고 있으며 천정석은 긴 장대석 5개를 걸쳐 얹어 덮고 있다. 문 양 옆으로는 높이 86cm, 길이 240cm 정도의 석벽을 연결하여 쌓아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석조미륵보살을 세운후 참배객들이 모여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담장을 쌓고 석문을 축조하였으나 담장은 없어지고 석문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근래에 건립된 정면 5칸, 측면 2칸에 측면에 풍판을 단 맞배지붕의 2층 건물로 경내 쪽에 "明谷樓(명곡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명곡루(明谷樓)와 석문(石門) 사이에 있는 윤장대로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윤장대로는 보물 제684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북 예천 용문사 윤장대가 으뜸이다.

 

대광명전은 2층으로 된 중층의 건물로, 건물양식은 1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에 다포식 공포이며 네 귀퉁이에 활주를 세워 지탱하고 있다.  

 

불교에서 연화장 세계(蓮華藏 世界)란 연꽃에서 출생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있는(含藏,함장된) 세계라는 뜻으로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연화장 세계의 교주이신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셔놓은 법당을 대광명전이라고 하며 부속 전각에 봉안될 때는 비로전이라고 한다. 그 사찰의 주존불로 모셔질 때는 좌우협시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 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고 대적광전 혹은 대광명전이라는 편액을 쓰며 선종사찰에서 주로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 세상에 출현하실 미륵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미륵전(彌勒殿), 또는 용화전(龍華殿)이라고 하지만 이곳 관촉사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미륵전 안에는 별도의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미륵전(彌勒殿)'이라고 적은 현판 글씨는 연제(蓮齊) 이용현(李鎔泫)이 쓴 것이다.

 

미륵전 안에서 바라본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모습이다.

 

 

 

명부전( 또는 지장전)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전각으로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신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시왕상, 판관, 인왕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세 분의 성인(聖人)을 모시고 있는 전각을 삼성각이라고 하며, 관촉사 삼성각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이 모셔져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등, 그리고 석탑과 배례석, 미륵전이 일직선상에 늘어서 있는 모습이다.

 

이 석탑은 4층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단층기단이고 면석에는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기단부와 탑신부 사이에 연꽃 문양을 조각한 별석을 두어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체감비로 보아서는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없어진 5층석탑으로 보인다. 상륜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고, 맨 윗층의 옥개와 하단의 갑석(甲石)에 약간 결실이 있지만 비교적 원상을 잘 유지하고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관촉사배례석 (灌燭寺拜禮石)"이다. 배례석이란 "절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그런데 절하기엔 너무나 부담스런 모양이다. 장방형의 직사각형에 중앙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전면과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특히 중앙에는 활짝 핀 연꽃이 새겨져 있는데,불교에서 활짝 핀 연꽃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불보살은 연꽃이 활짝 핀 연화좌대 위에 모셔진다. 이러한 연꽃에 미혹한 중생이 머리를 댄다는 것은 이치적으로 맞지 않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보면 이 받침대가 배례석이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는 배례석을 봉로대(奉爐臺)로 설명한다. 봉로대란 향로를 올려놓는 돈대(墩臺)라는 의미다. 지금은 불전 안에만 향로가 있지만 과거에는 불전 밖에도 향로가 있었다. 옛날에는 신도들이 함부로 법당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향을 밖에서 피우고 이곳에서 기원을 올리고 참배를 하였던 것이다. 앞으로 빠른 수정이 있어야할 잘못된 이름이다.

 

어두운 중생들의 마음을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로 비추어 불성(佛性)을 밝혀 주는 등이 석등으로 표현된 것이다. 보물 제232호로 지정된 관촉사 석등은 석조미륵보살 앞에 세워져 있는데 석등의 높이가 5.45m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하대석은 각 면에 3개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8잎의 복연문(伏蓮紋)이 조각되어 있다. 간주석(竿柱石)은 둥근 기둥에 마디를 장식하였으며 중앙 마디에는 꽃이 새겨져 있다.

 

상대석은 앙련(仰蓮)을 새기고 그 위에 판석을 올렸다. 이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워 화사석(火舍石)을 구성하고 있다. 옥개(屋蓋)는 이층으로 귀꽃이 장식되어 있으며, 옥개석 정상에는 보주가 올려졌다. 석등을 중앙에 배치한다는 것은 부처의 자비광명을 상징하는 동시에 부처의 전면을 밝힌다는 이중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적비에 의하면 불상이 968년(고려 광종 19년)에 조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시대 석등의 대표작이다.

 

석등의 화사석 사이로 보이는 석조미륵보살의 눈과 코 부분이다.

 

전해오는 창건 설화에 의하면 한 여인이 관촉사가 자리잡은 반야산(盤若山)에 고사리를 꺾으러 갔다가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산속에서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가 이상하여 가보니 아이는 없고 큰바위에서 아이 울음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이 소문은 고려 조정에까지 퍼졌고, 광종(光宗)은 당시 최고의 고승이었던 혜명(慧明)을 불러, 그 바위로 불상(佛像)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은진미륵 부처님께서 자리잡게 되었으며 관촉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해 온다.

 

관촉사의 상징이라할 만큼 매우 중요한 불상으로 전체높이가 18m에 달하는 거대한 고려 초의 불상이다. 보통 '은진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었다. 조성 시기는 '관촉사비명'에 따르면 970년(광종 21)에 시작하여 1006년(목종 9)에 이르기까지 37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의 백호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묵기(墨記)에는 968년(광종 19)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관촉사사적비명'이 조성당시와 거리가 먼 조선후기의 기록임을 감안하고, 묵기가 불상의 조성과 함께 봉안되었을 것이므로 불상의 조성시기는 968년 설이 보다 믿을만하다.

 

얼굴의 표현이 이마가 좁고 턱이 넓으며 코와 귀, 입을 다소 크게 표현하였다. 눈은 양옆으로 길게 새기고, 귀 역시 어깨에까지 닿을 만큼 길다. 머리에는 간략하게 보발을 나타냈고, 그 위에 방형의 2중 보관을 올렸다. 아래 보관에는 8엽의 연꽃으로 장식하였고, 네 귀퉁이에는 청동방울을 매달았다.

 

목은 무척 굵다. 거대한 불두를 지탱하기 위한 배려이다. 삼도의 표현이 뚜렷하고,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를 걸쳤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근처까지 올려 금속으로 만든 연꽃가지를 들었고, 왼손은 가슴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여래의 하품중생의 수인이다. 신체는 별다른 굴곡없이 직선적으로 표현하였고, 법의가 길게 내려와 U자 모양의 주름을 이룬다.

 

불상은 자연암반을 대좌삼아 딛고 서 있다. 투박한 솜씨로 암반위에 불족을 조각하였다. 불상에 사용된 화강암 석재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즉 암반대좌, 다리에서 허리까지, 그 위에서 불두까지, 그리고 2매의 보관으로 구분된다. 불상 뒷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조성 당시에는 뒤까지 입체적으로 조각하려 했는지 정으로 쪼은 자국만 남아있다.

 

미륵보살입상이 완성된 후 많은 영험담이 있었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가 21일 동안 머물렀다. 미간의 옥호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는데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쫓아와 예배하였으며, 그 광명의 빛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절이름을 관촉사라고 하였다.

 

중국에 난이 일어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삿갓을 쓴 스님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물이 얕은 줄 알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중국의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내리쳤고, 후에 이 흔적은 불상에 나타났다. 현재 한쪽 기퉁이가 깨진 채 남아있는 것은 바로 이 때의 상처라고 한다.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 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