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98 - 영조 임금이 쓴 약사전 편액이 남아있는 흥국사 본문
흥국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203번지에 자리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흥국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직전인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 대사가 흥서암(興瑞庵)으로 창건하였으며, 그 뒤 현재까지 계속해서 법등을 이어온 아름다운 천년고찰이다.
지금 흥국사 경내에 세워져 있는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기(漢美山興國寺萬日會碑記)」라는 비문은 1929년 한영 정호(漢永 鼎鎬, 1870~1948) 스님이 썼는데, 흥국사 창건에 관련된 이야기 역시 이 비문에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을 보면, 661년 양주(지금의 양산시) 천성산에서 수행하던 원효 스님께서 북한산으로 옮겨 원효암을 짓고 수도 정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원효봉에서 서쪽 산기슭을 내다보니 지금의 흥국사 터에서 며칠 동안 계속해서 서기(瑞氣)가 비추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원효 스님은 빛이 나는 곳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 자리에 석조 약사여래좌상이 있어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에 원효 스님은 이곳에 절을 지어야 할 자리임을 알고 창건하였는데,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흥서암(興瑞庵)이라 했다.
흥국사는 창건할 당시부터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 도량이며, 금당인 약사전에는 현재 조선시대 후기에 봉안한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조선 후기인 1707년(영조 46) 영조 임금이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묘인 파주 광탄면에 있는 소령원(昭寧園)에 다녀오는 길에 이곳에서 묵었으며, 이때 절 이름을 흥국사(興國寺)로 바꾸게 하고 직접 약사전(藥師殿) 편액 글씨도 써서 내려주었다. 그리고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조선 후기에는 만일염불회를 맺고 많은 사람의 동참을 구하여 염불 불교운동을 펴기도 하였다.
일주문에 걸려 있는 "興國寺"란 편액은 구한말 의정부참정과 탁지부대신을 지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선생(1835~1919)의 필적이다. 낙관(落觀)를 살펴보면, 왼편에 “八十二翁 海로堂”이라고 적혀 있다. 즉 해로당이 1916년(82세)에 적었다는 뜻이다. 서재필박사의 외숙이기도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선생은 국권을 침탈당한 1910년 이후로는 해로당(海로堂)으로 낙관(落款)한듯 하다. 여기서 로(土+鹵 혹은 鹵+土. 짠땅로)는 염전, 척박한 땅, 포로의 땅을 뜻하는 글자로, 김성근 선생은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는 "한미산 흥국사 약사전"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내부 천정은 우물천정에 사분합(四分閤)을 하고 있는 건물로 1876년(고종 13)에 중건된 전각이다. 조선 후기인 1707년(영조 46) 영조 임금이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묘인 파주 광탄면에 있는 소령원(昭寧園)에 다녀오는 길에 이곳에서 묵었으며, 이때 절 이름을 흥국사(興國寺)로 바꾸게 하고 직접 약사전(藥師殿) 편액 글씨도 써서 내려주었다.
주련의 내용은 "석문의범'의 약사청(藥師請)에 나오는 말이다.
東方世界名滿月(동방세계명만월) 동방세계의 이름은 만월이요
佛號琉璃光皎潔(불호유리광교결) 부처님의 명호는 맑고 깨끗한 유리광이라
頭上旋螺靑似山(두상선나청사산) 머리 위 나발은 푸르기 마치 산 같고
眉間毫相白如雪(미간호상백여설) 미간의 백호상은 희기가 눈과 같네.
약사전에는 주존불로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여래는 약사유리광여래, 혹은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부른다. 약사여래는 과거세에 12대원을 세워 이 세계 중생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앙을 소멸시키고 의복과 음식을 풍족케 하며, 또한 부처님의 행을 닦아 위없는 깨달음을 얻겠다고 서원한 부처님이다. 그리고 이 약사불좌상은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성 양식으로 보아서는 조선시대 후기, 특히 약사탱 조성과 같은 시기인 1792년(정조 16)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왼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약병(藥病)이 약사여래의 명호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준다.
약사전 약사불좌상 옆에는 근래에 조성하여 봉안한 천수천안 관음좌상이 있다.
약사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자리하고 있는 명부전 건물과 내부에 봉안되 있는 지장보살좌상이다.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의 나한전(羅漢殿)이다. 나한전은 현재 향토유적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삼성각이다. 안에는 일광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치성광여래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산신탱이 걸려 있고 우측에는 독성탱이 걸려 있다.
금당인 약사전과 마주하고 있는 근래에 지은 설법전 건물이다. 이 건물 안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된 "고양 흥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지정된 "고양 흥국사 극락구품도"가 봉안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설법전 앞에서 답사팀에게 해설을 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이다.
설법전 안에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제작된 아미타불좌상이 있다. 이 목조아미타불좌상은, 약사전 약사후불탱의 화기에 약사후불탱과 함께 1792년에 개금(改金)되었다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 또는 보다 앞선 시기에 봉안된 것으로 생각된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작품으로는 국내에 5점 이내 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는 아미타극락구품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 구품도는 염불수행의 단계를 아홉 장면으로 나타낸 그림으로서 현재 설법전에 봉안되어 있다. 수행의 아홉 장면은 상품상생(上品上生), 상품중생(上品中生), 상품하생(上品下生), 중품상생, 중품중생, 중품하생, 하품상생, 하품중생, 하품하생으로 분류한다.
예를 들면 상품중생에 해당되는 화면 상단 가운데 그림에는 아미타부처님과 권속들이 그려졌고, 나머지 그림에는 주로 전각이나 건물을 배경으로 인간들의 여러 가지 행태가 묘사되었다. 그림에 화기가 없어 정확한 조성연도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조선시대 후기로 추측된다.
만일회(萬日會)라는 것은 아미타불을 믿고 극락왕생을 위해 조직되는 신행(信行) 모임으로서, 보통 1만일을 기한으로 행해지므로 그렇게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건봉사(乾鳳寺)에서 처음 개최된 이래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크게 성행되었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많은 사찰에서 만일회를 설하여 극락왕생을 빌었다.
이 비에 따르면 당시 만일회를 이끈 회주(會主)는 완해(玩海) 스님으로 스님은 상궁 김씨 등의 힘을 얻어 회를 만든 뒤 이듬해 진관사의 해송(海松) 스님을 새로운 화주로 모셔 이후 1929년에 이르기까지의 법회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비석에는 여러 스님의 이름과 불사 내용이 들어 있어, 근대의 흥국사 연혁에 참고가 될 뿐만 아니라 근대 불교사의 한 단면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은 정호 한영(漢永鼎鎬, 1870~1948) 스님이 지었고 글씨는 근대의 서예가 김돈희(金敦熙, 1871~1936)가 썼다.
흥국사에서 본 북한산의 능선이다.
칠불산악회 회원들 단체로 인증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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