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본문

불상,마애불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徐白(서백) 2012. 11. 26. 23:24

충남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관촉동)에 위치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論山 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은 관촉사의 상징이라할 만큼 매우 중요한 불상으로 전체높이가 18m에 달하는 거대한 고려 초의 불상이다. 보통 '은진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었다. 조성 시기는 '관촉사비명'에 따르면 970년(광종 21)에 시작하여 1006년(목종 9)에 이르기까지 37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의 백호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묵기(墨記)에는 968년(광종 19)이라는 기록이 있다. '관촉사사적비명'이 조성당시와 거리가 먼 조선후기의 기록임을 감안하고, 묵기가 불상의 조성과 함께 봉안되었을 것이므로 불상의 조성시기는 968년 설이 보다 믿을만하다.

 

눈은 양옆으로 길게 새기고, 귀 역시 어깨에까지 닿을 만큼 길다. 미간사이의 백호에는 근래에 가공한 수정을 넣었다. 머리에는 간략하게 보발을 나타냈고, 그 위에 방형의 2중 보관을 올렸다. 아래 보관에는 8엽의 연꽃으로 장식하였고, 네 귀퉁이에는 청동방울을 매달았다. 목은 무척 굵다. 거대한 불두(佛頭)를 지탱하기 위한 배려이다. 삼도의 표현이 뚜렷하고,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를 걸쳤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 근처까지 올려 금속으로 만든 연꽃가지를 들었고, 왼손은 가슴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여래의 중품하생인이다. 신체는 별다른 굴곡없이 직선적으로 표현하였고, 법의가 길게 내려와 U자 모양의 주름을 이룬다.

 

불상은 자연암반을 대좌 삼아 딛고 서 있다. 투박한 솜씨로 암반 위에 불족(佛足)을 조각하였다. 불상에 사용된 화강암 석재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즉 암반대좌, 다리에서 허리까지, 그 위에서 불두까지, 그리고 2매의 보관으로 구분된다. 불상 뒷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조성 당시에는 뒤까지 입체적으로 조각하려 했는지 정으로 쪼은 자국만 남아있다.

 

 

 

 

 

 

 

 

 

 

 

미륵보살입상이 완성된 후 많은 영험담이 있었다. '관촉사사적비명'에 몇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가 21일 동안 머물렀다. 미간의 옥호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는데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쫓아와 예배하였으며, 그 광명의 빛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절이름을 관촉사라고 하였다.

 

중국에 난이 일어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삿갓을 쓴 스님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물이 얕은 줄 알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중국의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내리쳤고, 후에 이 흔적은 불상에 나타났다. 현재 한쪽 기퉁이가 깨진 채 남아있는 것은 바로 이 때의 상처라고 한다.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 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도 전한다.

 

이러한 불상의 존명에 대해서는 미륵상이 아니라 관음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한국불교사의 정립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던 이능화선생의 지적이다. '세간에서 불상을 미륵이라 하지만 이는 잘못이고, 명주사사적(明珠寺事蹟)에 고려의 혜명(慧明)과 대주(大珠) 두 대사가 관촉사의 석관음상을 조성하였다고 적혀있다'고 하였다. (『조선불교통사』하, 379면) 그러나 올바른 주장이 아니다.

 

불상의 존재를 처음 언급한 이색의 시에서는 분명히 '대석상미륵존(大石像彌勒尊)'이라 지칭하였고,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석미륵'이라 표현하였다. 사실 불상의 존명은 매우 중요해서 그 이름 여하에 따라 사상과, 신앙 등 전체적인 배경이 달라질 수 있다.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석가여래인가 아미타여래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논란도 이러한 중요성 때문이다.

 

그러나 관촉사의 경우는 논란의 여지없이 미륵임이 확실하다. 문헌에 의해서도 그렇고, 고려시대이후 미륵신앙이 서민의 대중적 신앙으로 유지되면서 서민적 삶을 그대로 닮은 투박하고 인간적인 돌미륵이 곳곳에 조성되었다. 그래서 미륵불하면 세련된 장식이나 고귀함보다는 거친 듯하면서도 친근한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관촉사의 불상은 가장 미륵불답다. 많은 대중들에게 차별없는 지혜와 자비를 주기 위해 소박하지만 커다란 모습으로 늘 거기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