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93 - 차(茶)의 달인 함허대사가 중건한 정수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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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93 - 차(茶)의 달인 함허대사가 중건한 정수사

徐白(서백) 2012. 11. 14. 21:58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467-3번지에 위치한 정수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활교구 조게사의 말사이다.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 회정대사가 마니산의 참성단을 참배한 뒤 동쪽 기슭의 앞이 훤히 트인 밝은 땅을 보고 불제자가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정수(精修)할 곳이라하여 절을 창건하고 정수사(精修寺)라 했다고 한다. 그 후 조선시대 세종 8년(1426년) 함허대사(涵虛大師)가 절을 새롭게 중건할 당시 사찰 동편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해서 정수사(淨水寺)로 바꿨다고 한다.

 

정수사는 강화도 내의 보문사나 전등사에 비해 규모는 작은 가람이지만, 대웅전 어간문에 꽃병을 아로새긴 꽃창살과 약수가 유명하다. 통나무를 이용해 연꽃, 모란, 장미가 활짝 핀 모습을 목각으로 깎아 만든 대웅전 문창살은 우리나라에서 꽃병을 새긴 문창살로는 유일한 창살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차의 달인이었던 함허대사께서 경내에서 솟는 물로 차를 달여 마셨다 해서 정수사 약수는 유명하다.

 

(사진-1) 정수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세워진 해병상륙공작대 비(碑)

 

(사진-2) 1946년 부여 출신, 서예가 인전 신덕선(仁田 申德善)이 쓴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扁額)

 

(사진-3) '보물 제161호 정수사 법당(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집의 조선 초기의 주심포식 건물로, 정면 툇마루 부분은 후대에 붙여 건축한 것으로 보여지므로 당초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1957년 보수공사 때 숙종 15년(1689)에 수리한 내용을 적은 기록을 찾아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 5년(1423)에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사진-4) 대웅전 어간문 창살은 꽃병에 연꽃, 모란, 장미가 활짝 핀 모습의 목각이다. 보물 제161호 정수사 대웅전 어간문은 우리나라에서 꽃병을 새긴 문창살로는 유일한 창살로 손꼽힌다.

 

(사진-5) 본존불인 석가모니불를 중심으로 입상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바깥쪽으로는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사진-6) 오백나한전은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들인 500나한을 봉안한 법당이다. 원래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고승을 지칭하는 말이였으나, 온갖 번뇌를 끊고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의 이치를 터득하고 아라한(阿羅漢)과를 증득하여 마땅히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큰 성인이라는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나한은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인이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이 있으며, 부처님으로부터 미륵불이 출현할때까지 중생을 교화하라는 수기를 받은 분들이다. 한편 500나한은 중생에게 복덕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사진-7) 삼성각

 

(사진-8) 삼성각 내부에는 중앙의 산신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용왕과 독성이 위치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9) 삼성각과 대웅전

 

(사진-10) 대웅전과 오백나한전

 

(사진-11) 언덕 위에 세워진 이중기단 위의 삼층석탑이다. 탑은 탑파(塔婆)의 약칭이며, 인도 고대어로는 스투파(Stupa)라고 한다. 석탑은 하층기단에는 우주(隅柱)와 2개의 탱주(撑柱)를 모각하였고, 상층기단에도 우주를 새겼으며 탱주는 1개이다.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개석은 받침이 5단이다. 초층의 탑신에 비해 2층부터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상륜부는 노반부터 보주와 찰주까지 완벽하게 표현하였으며, 이 석탑은 근래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