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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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90 - 고려가 후백제를 평정한 후 창건한 개태사

徐白(서백) 2012. 9. 12. 22:42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天護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개태사(開泰寺)는 고려 태조 19년(936년) 고려가 후백제를 정복하고 신검의 항복을 받음으로서 후삼국을 통일한 후 왕명으로 창건한 호국 사찰이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과 산신령의 도움이라 생각하고  발원문을 직접지어 부처님께 올리고 모든 부처님과 천신들의 가호로 고려의 태평성대와 국운번창, 민생의 안정을 염원했다. 천호(天護)라는 산명(山名)과 개태(開泰)라는 사명(寺名)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이후 개태사에는 태조의 진영을 모시는 진전(眞殿)을 지어 영정과 유품을 모셨으며, 국가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충신들이 모여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호국도량이 되었다. 전성기에는 천 여명의 대중이 주석하였다고 하며 전국의 사찰을 통괄하기도 하였다. 특히 승통 수기대사가 개태사의 주지로 주석할 당시에는 고종의 명에 의해 팔만대장경을 교정하는 불사를 수행하면서 『고려국 신조대장 교정별록』 30권을 저술하고 이를 대장경에 편입시켜 현재 해인사 장경각에 경판으로 보존되고 있다.그러나 고려 말 우왕 무렵에 잦은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약탈과 방화가 계속되다 폐사가 되었다.

 

폐허가 된 채로 오랜 세월이 흘러 오다가 1930년에 천호리에 거주하던 김대성화 보살(원명 김광영)이 관음보살의 현몽계시를 받고 파괴되어 묻혀있던 미륵삼존석불을 복원하고 개태사지(開泰寺址)로부터 500여m 떨어진 현재의 자리에 건물을 지어 옛 개태사의 맥을 잇게 되었다. 또한 그의 차녀인 천명보살(원명 유진팔)이 개태사지 절터에서 오층석탑을 옮겨왔고. 1978년에는 연산읍에 소재한 공원에 있던 철확(솥)을 이곳 개태사로 옮겨왔다.

 

 

개태사 진입로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수미산 주위의 향수해를 상징하는 냇물과 이를 건너는 개운교(開運橋)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사주문이다. 막돌초석 위에 4개의 원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좌우로 담장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절의 실질적인 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개태사의 극락대보전(極樂大寶殿)과 석탑, 그리고 정법궁(正法宮)이 보이는 앞에서 진지한 자세로 개태사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는 사단법인 미소원 문화유적답사회 회원들의 모습이다.

 

 

개태사의 요사채에 해당하는 건물로 2003년에 신축한 ㅌ자형 건물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쌓아 낮게 만들었고,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다. 지붕은 겹처마로 팔작지붕이다.

 

 

극락대보전 좌측에는 1930년 개태사를 중창한 김대성화 보살의 공덕을 기록한 ‘開泰寺重創主金大成華功德碑(개태사중창주김대성화공덕비)’가 있고, 앞쪽 마당 가운데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문화재자료 제274호 개태사 오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이 석탑은 개태사지에 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라 한다. 기단과 1층 탑신, 상륜부의 보주는 최근의 수리로 보충한 것이다. 탑신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네 모서리에 우주(隅柱)만 양각했다. 각층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모두 네 단으로 각 단의 높이는 낮은 편이다.

 

처마는 아래면과 윗면 모두 반곡된 곡선이며, 탑신석은 2층에 비해 3층이 비교적 많이 줄어든 편이다. 반면에 옥개석은 1층과 2층 옥개석 사이, 3층과 4층 옥개석 사이가 다른 층에 비해 체감이 약간 큰 것으로 보아 5층석탑이 아닌 그 이상의 석탑이였지 않을까 추측된다. 원래의 기단부가 없어서 정확한 판단은 어렵지만 신라계 탑의 기본 형식을 따르면서도 전체 비례는 백제계 탑의 형식을 약간 반영한 듯한 양식이다.

 

 

1992년 창건된 극락대보전(極樂大寶殿)은 개태사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공포의 짜임에서 전체적인 구조와 각 부재들의 세부 형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부석사 무량수전을 모방하였다. 이것은 개태사가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석불입상이 고려시대에 조성되었기에 고려 우왕 2년(1376)에 중건된 부석사 무량수전 건물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국토를 지난 곳에 있는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극락전, 극락보전, 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 하는데, 이곳 개태사에는 '極樂大寶殿(극락대보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극락대보전에 봉안된 "보물 제219호 개태사지 석불입상"은 고려시대 초기(10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삼존석불이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가 후백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태조 19년(936) 격전지에다 세운 사찰이다. 삼존석불입상으로서는 거작(巨作)에 속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불상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본존불 높이 4.15m, 우협시 높이 3.21m, 좌협시 높이 3.21m, 1930년 폐허가 되었던 개태사를 중창하면서 파괴되어 묻혀있던 석불 2구를 복원하였으며, 1987년12월 20일 배수로 확장공사를 하던 도중 좌협시불의 불두(佛頭)를 발견하여 복원하였다.

 

본존은 복련을 새긴 방형대좌 위에 서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에 육계(肉繫)가 큼직한 편이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올렸고, 왼손은 배에 대고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듯하다 양손은 모두 신체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법의 아래로 노출된 양 발도 큰 편이며 발가락의 표현도 매우 소박하다. 좌우협시는 모두 복련을 새긴 팔각대좌 위에 서있다. 두 협시상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수법으로 조각되었으며, 본존과도 비슷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정법궁

 

 

가구식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에서 본 정법궁

 

 

아미타불이 봉안된 정법궁 건물의 좌우에는 ‘正法宮(정법궁)’이라는 현판과 ‘創運閣(창운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전면 기둥에는 ‘南北統一世界平和祈願大道場(남북통일세계평화기원대도량)’이라는 글을 쓴 주련이 걸려 있다.

 

 

 

정면 어간에 ‘正法宮(정법궁)’이라는 현판(懸板)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의 관지(款誌)를 보면 ‘甲寅五月五日造成(갑인오월오일조성)’이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74년에 신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면 협간에는 ‘創運閣(창운각)’이라 쓴 또 하나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정법궁(正法宮)의 주존불인 아미타부처님으로 하품중생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태초의 임금인 단군 왕검의 진영이 정법궁의 본존불인 아미타불의 좌측에 모셔져 있다. 단군 신화에 따르면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나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워 약 2천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관성제군(關聖帝君)의 진영 위에 걸려있는 大忠義殿(대충의전) 현판이다.

 

 

중국 삼국시대(삼한시대) 촉한나라의 명장인 관우(關羽)가 신격화된 도교계통의 전쟁신이다. 관우는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桃園結義, 의형제를 맺음)를 맺고 끝까지 신의를 지킨 충신의 전형으로 평가되면서 지금도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그를 제후에서 시작해 왕(王)과 제(帝)로 봉하다 마지막에는 성인(聖人)을 뜻하는 '성(聖)'으로 책봉했다. 송(宋)나라 때부터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그를 무신(武神)이나 재신(財神)으로 섬겼으며 지금도 그를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받드는 민간 신앙인 '관공신속(關公信俗)'이 존속되고 있다. 관성제군은 관우를 사후(死後)에 높여 부르는 말로 특히 무속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 나타나 왜군을 무찔렀다는 전설 이후로 무(武)에서 신령으로 모셔지게 되고, 관성제군에게 소원을 빌면 성취된다고 하는 믿음이 퍼져 있다. 그런데 사찰에서는 보기드문 관성제군의 진영이 개태사 정법궁(正法宮)의 본존불인 아미타불의 우측에 봉안되어 있다. 이는 불교에서 민간신앙을 포용하면서 절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 추측된다.(도원결의 :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은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화강석의 방형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모지붕이다. 정면에만 4분합문을 달았고, 나머지 모든 칸에는 두 짝의 여닫이문을 달았다. 내부의 중앙에는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하였다.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진 물의 외부 정면에 걸려 있는 “三一老上正天花(屯?)”라고 쓴 현판이다

 

 

 

우주정(宇宙井)은 충남 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의 철확(鐵鑊)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보호각으로, 정면에는 ‘宇宙井(우주정)’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의 양식은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겹처마에 사모지붕이다.

 

 

우주정 내부에는 개태사 우주정 복원불사 유공자 명단을 적은 글이 걸려있다.

 

 

1973년 12월 24일 충남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개태사(開泰寺) 철확(鐵鑊)”은 개태사에서 사용하던 철솥으로 고려의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개국사찰로 창건한 개태사 주방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가마솥으로 태조 왕건이 승려 500여 명이 밥을 지어먹는 솥으로 내려 준 것이라고 한다.

 

즉 승려들의 밥과 된장 또는 국을 끓이던 대형 철재 솥이다. 논산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개태사의 가마솥(철확)과 관촉사의 은진미륵과 강경의 미내다리(미내교)를 보았느냐?”고 물어 본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개태사 철확은 논산지역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