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89 - 정갈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내원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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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89 - 정갈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내원사

徐白(서백) 2012. 8. 27. 22:03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愚者)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린다고 한다. 지리산 품안에 자리한 내원사(內院寺)는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586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말사이다. 특히 장당골과 내원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에 내원사 전체가 꼭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신라  태종무열왕 4년(657) 창건되어 덕산사(德山寺)라 이름하였으며, 신라 진성여왕 2년(888)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상주하면서 수많은 대중들의 수행정진하는 사찰로 유지되어 오다가 1609년(광해군 원년, 만력 37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큰 화재로 모든 당우가 소실되어 그대로 방치되어 폐사지로 있다가 1959년에 원경스님에 의해 다시 내원사가 중창되었으며, 정갈하고 그윽한 분위기의 조용한 사찰이다.

 

당시 화재 이후 이곳의 스님들은 덕산사를 버리고 수선암이라는 곳으로 올라가 수행을 했다고 한다. 현재 옛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1950년대에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되어 있던 것을 1961년에 복원하여  보물 제1113호로 지정된 “내원사 삼층석탑”과 1,2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1021호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또한 불상 대좌 속에서 발견된 영태2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 사리함은 국보 제233호 “전 산청 석남암사지 납석사리호(傳 山淸 石南巖寺址 蠟石舍利壺)”라는 명칭으로 현재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내원사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것으로 사라진 덕산사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기도 하다.

 

 

근래에 새로 만들어진 내원사 경내로 들어가는 반야교이다. 우리는 흔히 사찰의 진입로에 들어서면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과 이를 건너는 다리를 만나게 된다. 이 냇물은 불교의 수미산 우주론에서는 수미산 주위의 향수해를 상징한다. 이 향수해(냇물)를 통해서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된다. 또 한편으로 냇물이 있는 것은 발을 씻고 들어오라는 의미도 있다. 고대 인도나 남방불교권에서는 신발을 신지 않는 문화가 있다. 우리는 맨발로 법당에 들어가는 것이 결례이지만 인도나 동남아에서는 맨발로 들어가는 것이 예의이다. 그래서 발에 이물질이 묻은 것을 씻고 들어가려면 불전 앞에 냇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찰 앞의 계곡에 다리가 놓여 있는 것은 우리가 신발을 벗는 문화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다리의 명칭은 해탈교(解脫橋), 피안교(彼岸橋)가 일반적인데, 이곳 내원사는 반야교이다. 즉, 이 다리를 건너게 됨은 해탈과 피안이라는 성(聖)의 세계로 건너간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이를 건너기 위해서는 무언가 불필요한 것은 벗어 던져야 하는 것이다. 해탈은 번뇌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이 반야교를 중심으로 이쪽 언덕이라는 차안(此岸)에서 저쪽 언덕이라는 피안(彼岸)으로 간다는 것은 참으로 단순하면서 의미심장하다.

 

 

 

반야교 아래의 너럭바위에는 명옹대(明翁臺)라는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설화에 의하면 내원사의 옛 이름인 덕산사의 수맥이 더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위하여 어떤 장수가 들어다 막아 놓았다 하여 장수바위라고 하기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익공계 팔작지붕이다. 외벽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창호는 빗살창으로 어칸은 3분합이며 협칸은 2분합에 좌우 측면은 1분합문을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을 쌓았고 주초석 또한 자연석으로 놓고 원주 기둥을 세웠다.

 

대웅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은 다음과 같다

摩訶大法王 無長亦无短(마하대법왕 무장역무단)    거룩하고 위대하신 법왕은 짧지도 길지도 않으며

本來非皀白 隨處現靑黃(본래비조백 수처현청황)    본래 희거나 검지도 않고 곳에 따라 푸르게도 누르게도 

나투시네.

 

 

대웅전 안에는 중앙에 불단을 조성하고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좌상이 협시하고 있다. 삼존불 뒤로 후불탱인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고, 그 오른쪽에 지장탱이, 좌측 벽면에 신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중인도 마가다국의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를 표현한 그림으로 석가모니와 관련된 가까운 분들이 모두 등장한다. 그래서 요즘 우스갯말로 석가모니의 가족사진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보물 제1113호 내원사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때 세워진 3층 석탑으로 1950년경 도굴꾼에 의하여 파손된 것을 1961년 내원사가 세워지면서 복원되었다. 이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놓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으로 높이는 4.8m이다. 탑의 위쪽 옥개석(屋蓋石)이 많이 부서지고 상륜부는 상실하였다.

 

 

얇고 평평한 지붕돌(옥개석)은 밑면의 받침을 4단씩 두었으며,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크게 반전되어 있다. 지대석과 하층기단 면석은 같은 돌 4매로 구성하였으며, 하층 기단 각 면에는 두 개의 우주(隅柱)와 두 개의 탱주(撑柱)가 모각되어 있다. 2층기단은 기단 각 면에 우주(隅柱)가 있고 탱주(撑柱)는 한 개로 줄어 들어 있다. 옥개석 윗면에 2단의 받침으로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치고 있는 점과 특히 기단부의 구성, 지붕돌 및 각부의 양식 수법으로 보아 신라시대 하대의 석탑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에 익공계 맞배지붕이다. 창호는 띠살무늬를 하고 있으며, 정면 어칸과 협칸은 3분합문에 좌우 측면은 1분합문이 달렸다. 기단은 자연석 기단에, 주초석도 자연석을 놓고 원주 기둥을 세워놓았다. 비로전 안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비로자나불만 봉안되어 있고 다른 장엄물은 없다.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의 중심불이다. 화엄경은 석가모니가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 3·7일인 21일 동안 설한 경전이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통해 진리의 당체인 비로자나불과 합일한다 이때 설해지는 것이 바로 화엄경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와 비로자나불은 개별적이지만 하나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좌우보처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비로자나불의 좌우협시가 되기도 한다.

 

내원사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지리산 중턱에 있던 석남암수(石南巖藪)에 있던 것을 1970년 후반에 옮겨온 것으로, 현재 보물 제1021호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山淸 石南巖寺址 石造毘盧遮那佛坐像)으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대좌 속에서 사리기가 발견 되었는데 사리함에 적힌 명문에 따르면, 776년 신라 혜공왕 2년에 비로자나불을 조성하여 석남암사에 모신다는 내용이 있다.

 

 

 

비로자나불의 상체는 건장한 모습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법의〔가사 혹은 납의(衲衣, 衲은 기웠다는 뜻)〕주름은 촘촘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있다. 대좌는 8각의 하대에 연꽃무늬를 새기고, 중대는 8각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상대에는 2겹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위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하단까지 깨져 약 3분의 1정도가 없어져 버렸다.

 

대좌의 가운데 받침돌 안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때의 거무스름한 곱돌(납석)로 만들어진 작은 사리기(舍利器)가 나왔다. 영태2년(永泰二年)이라는 명문이 있는 이 항아리는 총 높이 14.5㎝, 병 높이 12㎝, 아가리 지름 9㎝, 밑 지름 8㎝이다. 영태2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는 국보 제233호 전 산청 석남암사지 납석사리호(傳 山淸 石南巖寺址 蠟石舍利壺)라는 이름으로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태 2년(永泰二年)은 신라 혜공왕 2년(766)임을 나타내고 있어 신라 비로자나불 좌상의 제작 연대를 8세기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또한 불상 대좌의 중대석에 사리를 봉안한 것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있는 사례로 복장물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흔적이다.

 

 

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건물의 전면에는 칠성각, 천왕전(天王殿), 산신각이라는 편액이 함께 걸려 있다. 산신각의 편액이 걸려 있는 곳의 창호는 빗살무늬 3분합문이 달려 있고, 칠성각은 빗살무늬 4분합문이, 중앙의 천왕전은 빗살무늬 3분합문이 달려있다. 천왕전 칸에는 보살상 3구가 봉안되어 있는데, 하나는 정병을 든 청동불입상이며 나머지 2구는 석조천왕보살상과 석조독성좌상이다. 삼성각 앞에는 작은 3층 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 석탑은 불기2522년(1978년)에 건립한 것이다.

 

 

천왕전에 모셔진 천왕보살에 관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왕비로 가게 된 한 여인이 지리산으로 도망을 와서 수행을 하면서 신통력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의 이야기에서 누군가 천왕보살로 모셨고, 한 노보살이 보살상을 만들어 자기 집에 보관하다가 산청 내원사에 기증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보살상은 옛날 왕비들이 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종무소를 겸한 내원사 요사채 건물

 

 

내원사에 전해오는 설화 - 지리산 품안에 자리한 내원사는 옛날 덕산사(德山寺)가 있던 곳으로 풍수지리로 볼 때 명당 자리로 알려졌다. 그래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으로 큰 혼잡을 이루게 되었는데, 수행하는 스님들이 불편해 하여 주지스님이 이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노승이 찾아와 “남쪽의 산봉우리 밑까지 길을 내고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다리를 놓으면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날부터 스님들은 개울에 통나무로 다리를 놓고 봉우리 밑까지 길을 내었다. 그러자 그렇게 많이 찾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어 스님들이 조용히 수행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돌연히 고양이 울음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고 하다. 이상히 여긴 사람들은 무슨 징조인지 궁금하게 생각하여 풍수설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봉우리는 고양이 혈이고, 절 뒤에 있는 봉우리는 쥐의 혈인데 여기 길을 내고 다리를 놓으니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조금 지나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다. 스님들이 개울에서 커다란 통나무에 물을 길어 불을 끄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왼쪽에서 길어 쏟는 물은 오른편 개울에 떨어지고, 오른편에서 쏟는 물은 왼편 개울에 떨어지며, 앞에서 쏟는 물은 뒷산 봉우리에 떨어져 결국 불길을 잡지 못하고 절이 모두 전소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