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87 - 낙영산 채운사(채운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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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87 - 낙영산 채운사(채운암)

徐白(서백) 2012. 7. 23. 12:13

 

빼어난 경치로 인해 신선들이 노닌다는 선경(仙境)으로 이름난 화양9곡이 있는 속리산 국립공원 내의 낙영산 자락에 숨어 있는 고찰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412번지에 자리하고 있고,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계곡이 너무나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 선생이 말년에 이곳에 머물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구곡”이라고 명명하였다.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 등 구곡(九曲)은 이름조차 예사롭지 않다. 이 계곡에는 오래전 창건된 두 사찰이 있어왔다. 한 사찰은 1277년(고려 충렬왕 3) 창건된 채운암(彩雲庵)이고, 또 다른 사찰은 1670년(현종 11) 창건된 환장사(煥章寺) 이다. 그러나 환장사는 1896년(고종 33) 일본의 조선 침략에 항거하여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의병의 본거지라 해서 일본군대에 의해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또한 채운암은 1948년(무자년)에 큰 홍수가 나서 산사태로 인해 사찰이 매몰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 해에 대웅전만 남은 환장사로 채운암의 목재를 옮겨 건물을 지으면서 두 사찰은 합쳐지게 되었는데, 현재의 채운암이다.

 

원래의 채운암은 1277년(고려 충렬왕 3)에 도일선사(道一禪師)에 의해 수도암(修道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때 암자는 지금의 채운암에서 바라다 보이는 첨성대 안쪽 계곡에 자리하였다고 한다. 그 후 1619년(광해군 2) 혜식선사(慧識禪師)가 중건(重建)하고 채운암(彩雲庵)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환장사는 1655년(효종4년) 혜일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799년(정조 23) 편찬된 범우고(梵宇攷)나 1836년(헌종 2) 기록되어 현재 채운암 대웅전에 걸려있는「충청도청주청천면화양동환희산환장사법당초창기(忠淸道淸州靑川面華陽洞歡喜山煥章寺法堂初創記)」와 민진원(閔鎭遠)의『단암만록(丹巖慢錄)』등에서는 모두 송시열의 노력으로 1670년(현종 11)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1826년(순조 26)에 대웅전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1975년에 대웅전을 중수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1981년에는 문정암 스님이 삼성각에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새로 봉안하였다. 그리고 근래에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요사를 새로 짓고 사명(寺名)도 채운사(彩雲寺)로 고쳐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바위는 화양구곡(華陽九曲) 중 제5곡으로 "큰 바위가 첩첩이 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 하여 '처다볼 瞻, 별 星자의 첨성대(瞻星臺)라고 하는 바위이다. 원래의 채운암은 수도암(修道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는데, 이때 암자는 지금의 채운암에서 바라다 보이는 첨성대 안쪽 계곡에 자리하였다고 한다. 그 후 1619년(광해군 2) 혜식선사(慧識禪師)가 중건(重建)하고 채운암(彩雲庵)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채운암 가는 길목에 있는 능운대(凌雲臺)이다. 하늘을 우러러 치솟아 있는 장대한 바위 모습이 마치 구름을 맞잡을 수 있다고 전해지며, 또 오래전에 장군의 능을 닯았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오른쪽으로 튀어나온 바위의 모습이 의 눈에는 맷퇘지의 형상으로 보이는데, 내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채운암으로 들어가는 길목. 능운대(凌雲臺)와 마주하고 서 있는 자연친화적인 안내 푯말이 정감이 간다.

 

 

종무소 출입문 위에 걸려 있는 채운암(彩雲庵) 편액(扁額)이다. 절 입구에 푯말에 적힌 글처럼 '구름에 물든 절' 혹은 '구름으로 채색된 암자'라는 뜻이다. 

 

 

근래에 지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요사채로 종무소가 있는 건물이다. 뒷쪽에 보이는 또 다른 요사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웅전은 6.25전쟁 때 인민군이 3번이나 불태우려 했지만 타지 않자 겁을 먹고 물러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현재 충북 문화재자료 제30호 대웅전은 채운암 목조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있는 법당으로 우리 고유의 전통 건축기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양식 팔작기와지붕으로 추녀곡이 심하며, 어칸 양측 기둥 상부에  어칸의 기둥위 바깥에는 용머리를 안쪽으로는 용꼬리를 조각하였다. 창호는 빗살문으로 좌우 협칸은 각각 2분합문, 어칸은 4분합문이다.

 

중수시에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道光六年丙戍(도광6년병술)"의 상량(上梁) 기록이 발견되었다. 도광(道光)은 청나라 선종 도광제의 연호로 1821부터 1850년까지 30년간 쓰였다. 도광 6년은 (1821+6)-1=1826년을 뜻한다. 그리고 대웅전에는 1836년(헌종 2) 기록된「충청도청주청천면화양동환희산환장사법당초창기」현판이 걸려 있는데, 나무의 재질로 보아 원래의 것이 훼손되어 근래에 복원한 듯하다. 내용은1826년(순조 26)에 대웅전을 창건한 연유와 시주자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대웅전의 문살에는 매화나무, 봉황을 비롯해 황룡과 청룡, 소나무와 학 등을 조각하여 대웅전의 아름다움이 한층 더 돋보인다

 

 

내부에는 목조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근래에 조성한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좌상 및 석조여래좌상, 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불화로는 석가모니후불탱, 칠성탱, 신중탱, 지장탱이 있으며, 근래에 조성한 범종도 있다.

 

본존불인 목조여래좌상은 충북 유형문화재 제191호 채운암 목조여래좌상(彩雲庵 木造如來坐像)이다. 이 불상은 대웅전의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는데, 복장기((服藏記)에 의하면 옹정원년계묘(雍正元年癸卯) 5월에 길쌍계사에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옹정(雍正)은 청나라 세종 옹정제의 연호로 1723년에서 1735년까지 13년간 쓰였다. '옹' 자는 옹정제가 아버지 강희제 때 받았던 작위인 '옹친왕'(雍親王)에서 비롯되었다. 옹정원년은 1723년(경종 3년)이다. 언제부터 채운암에 봉안되어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의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머리는 나발이며 그 위에는 육계가 있다. 상호는 대체적으로 원만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귀는 길고 크며 콧날이 뚜렷한 편이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인데 가슴은 드러났으며, 허리에 군의(裙衣)의 띠가 보인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게 하고 왼손은 무릎 위에 들어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하품중생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대웅전 천정에는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가 조각되어 있다. 불교 경전에서는 법당을 ‘지혜를 실어 나르는 배’ 또는 ‘중생을 고통 없이 극락세계로 건너 가게 해주는 배’로 비유하는데, 이것은 곧 반야용선이다. 대웅전의 어칸 좌우 기둥 위에 바깥으로는 용의 머리 부분을, 내부에는 용의 꼬리 부분을 조각해 놓고, 천정에는 유영(遊泳)하는 물고기를 조각해 놓아서 대웅전이 곧 반야용선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에는 삼성각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으며, 내부에는 1981년 조성한 칠성탱을 중심으로 좌우에 산신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