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통도사의 경계를 표시한 "통도사 국장생석표" 본문

석등,부도,비

통도사의 경계를 표시한 "통도사 국장생석표"

徐白(서백) 2012. 8. 25. 01:10

 

영축산(靈鷲山) 통도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대국통(大國統)이 된 뒤, 646년(선덕왕 15) 왕명에 따라 창건한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고 불사리와 부처의 가사 한 벌을 가져와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 모시고, 계율종(戒律宗)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절 이름 ‘통도(通度)’에는 이 절이 자리한 산이 석가모니불의 설법지인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과 함께,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보물 제74호 "통도사 국장생석표(通度寺 國長生石標)"는 통도사의 경내를 표시한 것으로 통도사에서 약 2km 떨어진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 35번국도 도로변에 서 있는 높이 167cm, 너비 60cm의 돌기둥이다. 이 국장생(國長生)은 4만 7천보(步)나 되는 절을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졌다고 하는 장생표(長生標)의 하나이다. 사찰의 경계(境界), 풍수(風水), 방액(防厄)을 위한 용도로서 앞부분에 명문(銘文)이 네 줄로 음각되어 있다. 측면에는 정(釘)으로 거칠게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꼭대기에는 3개의 파여진 홈이 있다. 동쪽면 아래에는 총알 자국이 있고, 서쪽 중앙에는 3개의 깊은 성혈(性穴,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이 새겨져 있다.

 

 

국장생(國長生)이라는 말은 국명에 의해 건립된 장생(長生, 장승)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원래 장생은 절이나 마을 입구 및 길가에 세워진 마을의 수호신으로 벽사(辟邪), 비보(裨補)의 기능과 함께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의 역할을 했으며 마을 사람들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는데, 통도사의 이 장생석표는 주로 사찰의 경계표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사찰의 토지와 일반 촌락과의 경계표시와 함께 사찰 경계 안에서의 사냥, 살생, 시목(柴木)을 금지하던 기록이 있어 이 석표도 신성구역 표시의 구실도 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풍수사상에 의해 액을 막는 구실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와 조선시대에 걸쳐 장생(長生), 장생표주(長生標柱), 목방장생표(木榜長生標), 석적장생표(石磧長生標), 석비장생표(石碑長生標),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황장생(皇長生), 장승(長承), 장생우(長栍偶), 장성(長性 또는 長城)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는 장승이란 명칭이 일반화되었으며 입목(立木), 입석(立石), 입적(立磧) 등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져 크게 유행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의하면 통도사 주변의 산천 비보(裨補)를 위해 12곳에 장생표를 세웠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이정표의 역할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한 도참사상과도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장생은 앞면에 해서체로 새겨진 명문 내용은 "通度寺孫仍川國長生一坐段寺所報尙書戶部乙丑五月日牒前 判兒如改立令是於爲了等以立 太安元年乙丑十二月日記"이라고 음각(陰刻)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통도사 손내천 국장생 일좌(一座)는 절에서 문의한 바 상서호부(尙書戶部)에서 을축년(乙丑年) 5월의 통첩에 있는 이전의 판결과 같이 다시 세우게 하므로 이를 세운다"는 것으로, 제작연대는 1085년(고려 선종 2)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문을 통해서 당시 사찰과 관청 간의 관계를 알 수 있으며 이두문(吏讀文)이 포함되어 있어 금석문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참고 문헌 : 문화재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