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37 - 월출산 도갑사 본문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번지에 위치한 월출산(月出山) 도갑사(道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의 말사이며, 통일신라시대 말 도선국사(道詵國師, 826∼898년)가 헌강왕 6년(880년)에 지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도선국사가 태어난 마을 영암은 풍수지리의 메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도선국사가 태어난 영암군 군서면의 구림(鳩林)마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듯 하다. '비둘기 숲'이란 뜻의 구림(鳩林)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창건이후 고려시대의 모습을 알려주는 문헌자료나 유적이 없어 사세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이후의 모습은 "도갑사사적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도갑사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1456년(세조 2) 수미(守眉)선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부터이다.
도갑사의 중창은 수미선사가 세조로 부터 존경받았던 인물이였기에 세조의 국가적 지원으로 이뤄졌다. 중창 직후의 도갑사는 전각이 966칸에 달하였고, 부속암자만 해도 12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또 1473년(성종 4)에는 해탈문을 새로 지었는데, 이 때에도 시주자(施主者)로 수미대사가 등장하고 있어 그에 의해 1456년에 시작한 절의 중창이 17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중기 1555년(명종 10년)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자행하는 중 도갑사에까지 들어와 불을 질렀으나 저절로 불이 꺼져 화를 면하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전란후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광해군(1608 ~1623년)때에는 낡은 전각을 중수하였는데, 당시 도갑사의 승려는 78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1633년(인조 11년)에는 "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를 건립하였는데, 여기에 스님과 지방의 유력인사들도 동참하였다. 1653년(효종 4년)에는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와 "조계곡석교신창비(曹溪谷石橋新創碑)"를 세웠는데, 두 비문의 건립에도 당시의 영의정, 형조판서 등 최고의 권력자들과 당대의 고승들이 참여하고 있어 당시 도갑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동란 등을 거치면서 도갑사는 사세가 많이 기울게 되었고, 1977년에는 화재로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건물이 소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의 복원을 시작으로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으며, 대대적인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고려시대 석탑과 묘각화상비, 도선수미비, 부도, 1677년(숙종 3년)에 세운 괘불대, 1682년(숙종 8년)에 조성한 석조(石槽) 등이 있다. 건물 중에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해탈문이 가장 오래되었다. 일본 교토 지은원(知恩院)에 있는 관음32응신도는 1550년(명종 5년)에 도갑사에서 조성하여 대웅전에 봉안했던 불화인데 현재 대웅보전 측벽에 사본을 걸어 두었다.
도갑사에는 국보 제50호 해탈문, 보물 제89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1134호 동자상, 보물 제1395호 도선, 수미비, 유형문화재 제150호 석조, 유형문화재 제152호 도선국사 진영, 유형문화재 제177호 수미왕사 진영이 있다. 그리고 근래에 삼존불을 봉안하기 전까지 조계사 대웅전에 모셔졌던 불상도 원래 도갑사에 있던 것을 1938년에 옮겨갔다. 나무로 만든 석가모니불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 126호)으로 대웅전 본존이었으며, 양식적으로 볼 때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일주문이다. 이 문은 사찰로 들어 가는 첫 번째 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고, 공포는 다포식이다.
가운데 어간의 “月出山道岬寺(월출산도갑사)”라는 편액은 산명과 사찰명을 밝힌 것이고, 뒤쪽의 "國中第一禪宗大刹(국중제일선종대찰)“이라는 편액은 도갑사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선종의 큰사찰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德海門(덕해문)"이라는 작은 편액도 걸려있는데, 이 편액들은 운암 조용민의 글씨이다.
일주문을 지나서 바로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해탈문에 이르는 돌계단을 오르면서 느끼는 분위기는 각별하다.
國中第一禪宗大刹月出山道岬寺事積碑(국중제일선종대찰 월출산도갑사 사적비)“
보수하기 전의 해탈문 모습(사진출처 : 문화재청) - 해탈문 너머로 보이는 옛날 대웅전
근래에 새로 보수한 후의 해탈문 모습
해탈문의 앞뒤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도갑사 해탈문 편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에서 원교 이광사의 글씨인 해남 대흥사 해탈문의 글씨를 탁본 모각한 것으로 교체된 것이다.
해탈문으로 오르는 계단과 소맷돌
해탈문 통로 바닥의 중앙에 놓여 있는 자연석이다. 옛날에는 법당 안의 채광을 위해 건물 앞마당에 백토나 자갈을 깔아서 햇볕이 반사되어 은은하게 법당 안을 밝힐 수 있게끔 하였듯이, 이 돌도 건물(해탈문) 내부의 채광을 위해 바닥의 중앙에 깔아 해가 뜨거나 기울 때 햇볕이 반사되어 해탈문 안을 환하게 밝히는 역활을 한 듯하다.
국보 제50호 '도갑사 해탈문(道岬寺解脫門)"은 도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의 해탈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이며, 좌우 칸에는 절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서 있고, 가운데는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위쪽에는 ‘월출산도갑사(月出山道岬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반대편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우리 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산문(山門)건축으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해탈문과 대웅보전 앞마당 사이에 종무소가 있는 광제루(廣濟樓)는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광제(廣濟)는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보물 제1433호로 지정되어 있는 "도갑사오층석탑(道岬寺五層石塔)"은 하층기단을 잃은 채 단층기단 위 5층 탑신부 및 노반석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95년 이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도갑사 경내 발굴조사 중에 하층기단부가 발견되어, 2002년 2월 현 대웅전 앞에 2중기단의 5층석탑으로 복원되었다(현재 높이 5.45m). 기단부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탑의 조각 및 구조수법 등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각 부재도 온전하게 잘 남아있으며 전체적으로 균제된 체감율과 안정된 조형미가 돋보이는 석탑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의 좌측으로는 종무소와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977년 참배객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 아름다운 대웅보전과 건물내에 있던 성보들이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 이후 대웅보전이 중창되기 시작하여 2009년 4월 11일 낙성식을 한 대웅보전의 모습이다.
근래에 중건한 대웅보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협시는 좌상의 약사여래 부처님이고, 우협시는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했다. 후불탱은 목각탱을 봉안해 놓았다.
대웅보전의 주존불을 중심으로 우측면에는 예적금강과 위태천(韋太天 위타천, 동진보살)이 중심인 신중탱이 걸려있다. 사찰을 답사하다 보면 가끔 신중탱의 중앙이나 왼쪽에 갑옷을 입고 깃털로 장식된 모자(투구)를 쓴 분이 있다. 이 분이 바로 위태천인 동진보살이다. 위태천은 사천왕 중 남방의 수호신인 증장천왕이 거느리는 8대 장군 중의 한 분으로, 사천왕천의 32대장을 대표하는 수령이다. 어려서 동진 출가하여 청정한 범행으로 오로지 불법 수호를 위해 정진한 결과 부처님께서 호법선신으로 위촉하였다.
그래서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 부르며, 세계를 보호하고 중생을 제도하며 마군(魔軍 마구니)을 없애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선신이다. 동진보살은 24위(位)나 39위(位) 신중탱화에서 중심축을 하나로 할 경우에는 정면이나 중앙에 위치하며, 두 축으로 할 경우에는 제석천과 함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104위(位)의 신중탱일 경우에는 동진보살은 화면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그리고 위 신중탱에서는 동진보살의 바로 위쪽에 계시는 분이 예적금강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국사전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활동한 승려로 , 중국에 가서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돌아와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 진영과 수미왕사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수미왕사는 조선 세조의 왕사로서 15세기 중엽에 도갑사를 크게 중창한 승려인데, 세조는 그에게 묘각화상이라는 호를 내렸다.
도갑사의 개창조인 도선국사(道詵國師, 826∼898년)의 진영
도갑사 경내에 서 있는 비로, 영암 출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수미는 조선시대 승려로 13세에 출가하였고, 불교를 숭상했던 세조 임금이 그 스승(왕사)으로 모셨던 인물이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형식적으로 조각된 거북받침은 머리가 용의 머리처럼 바뀌었으나, 목이 짧다. 앞발과 뒷발의 발톱이 다섯개씩이다. 거북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이 매우 두껍게 조각되어 있다. 비몸 위에 놓인 머릿돌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구름 위로 중간과 양 모서리에 다투듯 뒤엉킨 두마리의 용을 새겨놓았다.
선조 14년(1581)에 비가 넘어져 새로 세운 것으로, 인조 7년(1629)에 시작하여 인조 11년(1633)에 완성하였다. 전체적으로 조각의 솜씨와 비문의 필치가 섬세하고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 초에 세운 석비로서는 특이하게도 고려시대 유행하였던 양식과 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눈길을 끈다.
대웅보전의 향좌측으로 천불전과 명부전, 산신각의 모습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한 다포식 건물의 천불전(千佛殿)
천불전에 모셔진 삼존불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약사여래불을, 우측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좌우측 기둥에 그려진 청룡(靑龍)과 황룡(黃龍)의 그림이 눈길을 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한 명부전(冥府殿)이다. 시왕전 혹은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는데,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다 구제한 다음 부처님이 될 것을 서원한 보살로서, 아주 큰 서원을 세웠다하여 대원본존이라고도 한다. 지물은 대개 육도를 상징(혹은 육바라밀을 상징)하는 육환장(석장)을 짚고, 보주(寶珠)를 들고 있으며, 도상은 성문비구형 혹은 두건형이다. 부처님 입멸후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육도 중생을 제도할 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부촉받은 보살이다. 좌우협시로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지장경에 보면 지옥을 안내해 주는 지옥의 왕으로 등장하며 재수보살財首菩薩의 전신이다), 열 분의 명부시왕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측면에는 풍판을 단 산신각(山神閣)은 우리나라의 토속신인 산신과 호랑이를 봉안한 곳으로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한다. 불교에 수용되면서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신이 되여 사찰의 제일 위쪽에 위치한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민간에 널리 신앙되었던 토속신이다. 그리고 산신각 안에는 호랑이와 산신상을 봉안하거나 산신탱화를 모시기도 한다. 산신 옆에는 호랑이도 함께 하는데, 보통 호랑이와 산신을 같다고 본다. 즉 호랑이가 의인화된 것이 바로 산신이라는 것이다. 소나무는 하늘과 땅의 뜻을 교통(交通)하는 통로라고 한다. 또 동자가 천도봉숭아를 들고 있기도 한다. 즉 불교 바깥의 하근기 중생들을 불교속으로 끌어 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용화(龍華)는 미륵세계를 뜻하는 말인데, 용화문(龍華門)을 들어서면 미륵부처님이 계시는 용화세계이다. 이곳에는 미륵전이 있고, 미륵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용화전 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모신다고 해서 장륙전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 세상에 출현하실 미륵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다. 미륵부처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후 56억7천만년 뒤 인간의 수명이 점점 늘어나 8만4천세가 될 때에 사바세계에 내려오셔서, 화림원(花林園)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시고, 3회의 설법(용화삼회)를 열어 아직도 제도하지 못한 272억명을 교화한 후 만 6년만에 열반에 든다고 한다.
법당 안에는 도솔천에서 설법중인 미륵보살을 봉안하거나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게 될 미륵불을 봉안하는데, 한국에서는 미륵불을 주로 봉안한다. 그리고 후불탱을 봉안할 경우에는 용화회상도(龍華會上圖)를 봉안하는데, 이는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3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상징하는 것이다.
도갑사 석조여래좌상(道岬寺 石造如來坐像)은 보물 제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상은 몸체와 광배(光背)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어서 마치 바위에 직접 불상을 새긴 마애불과 같은 기법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를 큼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타원형이며 도드라진 눈덩이,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은 강건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넓은 어깨, 평평한 가슴, 단순한 몸의 굴곡 등은 생동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쳐 입고 있으며 몇가닥의 옷주름이 투박하게 표현되었다.
갸름한 타원형 광배의 가운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꼭지와 머리 양 옆에 각각 작은 부처가 표현되었다. 광배에 새겨진 조각은 대체적으로 생략이 강하다.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대좌(臺座)는 밋밋한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본래는 연꽃무늬를 새긴 8각형의 대좌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조성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다소 경직되고 형식화된 수법을 보여주지만 얼굴표정에서 훈훈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돌거북의 두툼한 등에는 가장자리가 말려 올라간 연잎이 새겨져 있는데, 이와 같이 연잎으로 비신을 받치고 있는 모습은 주로 조선시대의 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보물 제1395호 도갑사 도선수미비(道岬寺 道詵守眉碑)의 비신 양 측면의 아름다운 운용문(雲龍紋)이 가득 양각되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있는 쌍룡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인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수미왕사의 행적을 기록한 석비이다.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는 신라말 풍수지리설의 대가인데 도갑사를 비롯해 운주사와 옥룡사 등 수많은 절을 창건한 분이다. 도선국사는 한반도 지형을 항해하는 배에 비유(행주형국)해, 태백산과 금강산은 뱃머리이고, 한라산은 배의 꼬리이며, 지리산은 돛대에 해당되고, 능주(화순 능주면)는 배의 복부가 되며, 월출산은 배를 조종하는 자리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경내엔 도선국사의 행적과 공덕을 기리는 도선수미비가 있다.
1653년에 완성된 이 비(碑)는 귀부와 비신을 포함해 높이 4.8m에 이르는 거대한 석조물이다. 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튼 형태로 고개를 들고 절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 형상인데, 입에는 상·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다. 코는 큼직하며, 반구형의 양 눈은 부리부리하게 표현하였다. 등에는 전형적인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斜線紋)으로 정연하게 음각하였다. 4발 중 앞발은 5조, 뒷발은 3조의 발가락이 표현되었으며, 꼬리는 살짝 돌려 왼쪽 발의 허벅다리에 닿았다. 비신은 귀부와 이수와는 달리 대리석으로 조성했다.
상면에는 전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 썼으며, 비제(碑題)는 횡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서」라 음각했다. 비문에 의하면 본래 이 곳에 있던 도선국사의 비가 훼손되어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전면에 2개, 후면에 1개 등 모두 3개로 다른 석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석비가 1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 도선과 수미선사를 표방하고 있어 이 역시 독특한 예라 생각된다. 한편 건립연대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비문이 각각 독립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쓴 사람과 각자한 사람이 모두 다른 것은 비문의 내용을 볼 때 석비를 다시 세우기로 계획하고 3년의 모금활동과 건립기간 18년을 포함한 21년간에 걸친 건립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진화문(眞化門)을 지나야 고승들이 잠들어 있는 부도밭이다.
크고 작고, 둥글고 모나고, 오래되고 새로 생긴 각양각색의 부도가 들어찬 부도밭에 서 있으면, 고승들이 모여 야단법석을 펼친 것 같기도 하고, 고요히 선정에 든 것 같기도 한 느낌이다.
도갑사 석조(道岬寺 石槽)는 전남 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큰돌의 내부를 파서 물을 담아 쓰거나 곡물을 씻는데 쓰는 일종의 돌그릇이며, 물을 채워 연꽃을 심는 그릇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석조는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만든 작은 통나무배와 같은 모양으로 안쪽 밑바닥에는 물을 뺄 수 있도록 배수구를 갖추었다. 특히 "강희21년 임술(康熙二十一年 壬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석조를 만든 시기가 조선 숙종 8년(1682년)임을 알려주고 있다.
불전사물이 모여있는 도갑사 범종각
도갑사의 역사를 대변하는 각종 석조물의 잔재들
국보 제50호 '도갑사 해탈문(道岬寺解脫門)"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해 놓은 각종 부재들이다.
'사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찰이야기39 - 지리산 화엄사 (0) | 2010.06.26 |
---|---|
사찰이야기38 - 선운산 선운사 (0) | 2010.06.18 |
사찰이야기36 - 청량산 청량사 (0) | 2010.05.05 |
사찰이야기35 - 불광산 장안사 (0) | 2010.04.23 |
사찰이야기34 - 남해 금산 보리암 (0) | 2010.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