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39 - 지리산 화엄사 본문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39 - 지리산 화엄사

徐白(서백) 2010. 6. 26. 08:10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께서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과 해회당(海會堂)을 짓고 화엄사(華嚴寺)를 창건 후, 백제법왕(599년)때 3천여 명의 스님들이 계시면서 화엄사상을 백제 땅에 꽃피웠다.

 

신라시대는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 3층석탑’과 ‘공양탑’을 세웠으며, 원효성사는 해회당(海會堂)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 문무왕 17년(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방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 법당(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경덕왕(742∼764년)때 이르러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고, 신라말기 헌강왕(875년)때 도선국사는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조성과 더불어 화엄사 중흥조가 되면서 화엄사가 대총림으로 승격되었다.

 

고려시대는 고려 태조 26년(943년)에 왕명으로 고려 최초로 화엄사를 중수하였고, 홍경선사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중수하였다. 문종(1047∼1083년)때는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바치도록 허락해 주어 일주문 밖에 큰 창고를 짓기도 하였으며,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인종(1126∼1146년)때 정인왕사가 중수, 명종 2년(1172년)에 도선국사비 건립, 충렬왕(12361∼308년)때 원소암 중건, 충숙왕(131313∼30년)때 조형왕사에 의한 전면적인 보수를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세종 6년(1426)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의 와중에도 설응, 숭인, 부휴, 중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들에 의해 법석의 요람을 이루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년)때는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에서 승병 300여 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 앙갚음으로 왜장 가등청정은 화엄사를 전소시키기에 이른다. 인조(1630∼1636년)때 벽암선사와 문도들이 대웅전 등 몇몇 건물을 중건하고, 숙종(1699∼1703년)때 계파선사와 문도에 의하여 장육전 자리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규모로 웅장한 각황전 건립과 더불어 선교 양종대가람이 되었고, 근세에 와서 도광대종사의 전면적인 중수에 힘입어 지금의 화엄사로 중흥할 수 있었다.

 

대웅전과 누문을 잇는 중심축과 각황전과 석등을 연결하는 동서축이 직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가람배치를 갖추고 있으며, 경내에는 국보 제67호 ‘화엄사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8점 등 중요 문화재가 있어 역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화엄사 매표소 앞에 근래에 새로 세운 일주문이다. 정면 1칸, 겹처마 다포식의 맞배지붕인 일주문에는 "智異山大華嚴寺(지리산 대화엄사)"라는 산명과 사찰명을 함께 표현한 편액이 걸려 있다.

 

 

흰 꽃잎과 가운데의 노란 꽃술을 보고 달걀프라이를 해놓은 것과 같다고 하여 '달걀꽃'이라고도 부르는 개망초가 사당 주변을 포위한 듯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남악사의 모습이다.

 

 

 

화엄사 일주문을 가기 전에 오른쪽에 위치한 남악사가 눈에 들어 온다. 비록 작은 집이지만, 저기 저 장엄한 지리산의 산신에게 해마다 제사를 지내오고 있는 전각이다. 매년 곡우 때가 되면 남악사에서는 지리산신에게 제례를 올리는 장소이다. 다른 사찰에서 보기 힘든 당우로 천년이 넘는 남악제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중요한 사당 건물이다.

 

 

 

화엄사 매표소 근처에 세워진 새로 만든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한참 올라오면 화엄사 본래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에는 산명과 사찰명을 밝힌 "智異山華嚴寺(지리산 화엄사)" 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지리산(智異山)의 명칭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일주문은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문이다.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 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며, 정면 1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한 다포식의 아름다운 건물이다.

 

 

구례 화엄사의 일주문에 걸려있는 "智異山華嚴寺(지리산 화엄사)" 편액(扁額)의 관지(款識)를 보면 "皇明崇禎九年 歲舍丙子仲秋 義昌君 珖書(황명숭정구년 세사병자중추 의천군 광서)"라고 적혀 있다. 우리나라의 연호를 보면 조선시대는 명(明)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썼는데, 여기서 皇明(황명)은 명나라 황제를, 崇禎(숭정)은 명나라의 제17대 의종(재위기간,1627∼1644년)의 연호이다. 숭정(崇禎) 9년은 인조 14년(1636년)이며, 丙子仲秋(병자중추)는 1636년 음력 8월이고, 義昌君珖書(의창군광서)는 조선 14대 선조 임금의 여덟번째 서자였던 義昌君 李珖(의창군 이광)이 쓴 글씨라는 뜻이다. 이광(李珖, 1589~1645년)의 호는 기천(杞泉),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돌항아리를 보존하기 위해 지어진 보호각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돌항아리는 네모난 화강석을 정교하게 다듬어 항아리처럼 만든 것이다. 법주사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용도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풍수지리로 볼 때 화엄사는 전체적인 형국이 항해하는 배의 모양을 닮아 있어 항해 중에 필요한 물을 담는 항아리를 조성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구례 화엄사의 금강문 오른쪽에 있는 "벽암국일도대선사비(碧巖國一都大禪師)"는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년)의 비(碑)이다.(法名은 覺性, 호는 벽암).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서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전란 후에는 화엄사를 비롯하여, 해인사, 법주사 등 여러 사찰의 중수를 주도하여 조선후기 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아 팔도도총섭이 되었고, 공사를 마친 후 보은천교원조 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 國一都大禪師)란 시호를 받았는데, 나라의 제일이라 해서 국일(國一)이고,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도(都)자를 썼고, 大(큰 대)자 까지 사용하였으니 대단한 시호이다. 비의 이수에는 귀면(鬼面; 귀신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고, 이수 꼭대기에는 여의주와 같은 보주(寶珠)가 있다.

 

그리고 비석을 받치고 있는 동물이름이 연으로서 머리는 용(龍), 몸은 거북이에 날개를 달고 있다. 이 충무공의 군사(軍師)이며 부장군으로 활약하신 자운스님이 연기존자께서 타고 오신 연의 모습을 본따 거북선을 만들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이 동물이 바로 연이요, 거북선의 원형이다.

 

 

화엄사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금강문을 갖추고 있다. 그곳에는 어느 절에서도 보지 못했던 금강역사와 문수와 보현동자를 모시고 있다. 흔히 인왕상이라 불리는 두 명의 금강역사는 불법을 훼방하려는 세상의 사악한 세력을 경계하고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잡신과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금강역사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으로 불교의 수호신이다. 금강과 같은 지혜로서 번뇌를  꺽어 없애므로 금강역사라고 한다. 법당쪽에서 볼때, 사찰문의 왼쪽에 있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밀적금강(훔금강)이다.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번개를 상징)라는 무기를 쥐고 있고,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고 있으며,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모두 듣겠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오른쪽에는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와 나라연금강(아금강)이 서있다. 나라연금강은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100만배나 된다고 한다. 대체로 사찰의 금강문에서 나라연금강은 입을 크게 벌려 ‘아’하는 소리를 내면서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아금강역사라하고,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문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훔금강역사라고 한다. 이때의 ‘아’는 범어의 첫글자이고 ‘훔’은 끝글자이다. 두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과 완성을 상징한다. 아금강역사가 공격형 자세를 취하는 것은 출발의 시점에서의 진취적으로 나아감을 뜻하고, 훔금강역사가 방어형 자세를 취하는 것은 소멸의 단계에서 거두어 들이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옷을 입은 금강역사는 무기를 들고 힘을 과시하지만, 나신(躶身)의 금강역사는 힘있는 근육질로 힘을 과시하기도 한다.

 

 

천왕문(天王門)과 천왕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는  부산불교방송산악회 회원들의 모습

 

 

 

 

천왕문 또는 사천왕문이라고도 하며, 사찰로 들어가는 2번째 문으로서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천왕문은 佛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즉 사천왕은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닌 일념(一念)이 숱한 역경에 의해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구도자에게 다시 한번 힘을 내서 해탈의 경지인 수미산 정상까지 오를 것을 독려하는 것이다.

 

 

화엄사 사천왕문의 동방 지국천왕의 모습인데, 지국천왕은 음악의 신(神)인 건달바들의 왕임을 상징하는 비파를 손에 들고 있으며, 인간의 기쁜 감정과 봄을 관장한다. 보통 얼굴색은 푸른색이며 선한 자에게는 복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린다.

 

 

 

 

범종각(梵鐘閣)에 있는 최근에 만든 고래 모양의 당목(撞木)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용생구자설》에 의하면 포뢰는 바다에 사는 경어(고래)를 가장 무서워하며, 그를 만나면 크게 비명을 지른다고 한다. 그래서 포뢰모양을 만들어 종위에 앉히고, 경어모양의 당으로 종을 치면 경어를 만난 포뢰가 놀라 큰소리를 지르게 되어, 크고 우렁찬 종소리가 난다고 믿었다. 범종 소리를 경음이라 한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우리나라 특유의 범종장식이며 순천 선암사와 예산 수덕사에서 경어 모양의 당목을 볼 수 있다.

 

 

상왕문 안쪽에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는 원융료가 보인다.

 

 

 

 

 

 

상왕문(象王門)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공양간이 위치하고 있고, 좌측에는 원융요(圓融寮)를, 우측에는 청풍당을 배치해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화엄사의 당간지주이다. 일주문 밖에 위치해야 하는 당간지주가 왜 이곳에 세워져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성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것은 신성한 수미산 입구임을 알리는 것으로, 사찰 또는 수미산이 시작된다는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 당간지주이다. 당간이란 법회 등 의식을 거행할 때 당(깃발)을 걸기 위해 세운 깃대를 말하고, 당간지주는 당간(깃대)를 고정하기 위해 돌로 만든 지지대를 말한다. 화엄사의 당간지주는 간석과 기단부가 함께 잘 보존되어 있다.

 

 

보제루(普濟樓) 설명을 듣고 있는  부산불교방송산악회 회원들의 모습

 

 

올라가면서 보제루(普濟樓)란 편액이 붙어 있는 보제루인데, 보제(普濟)는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고, 예불과 법요식이 거행되는 장소이다. 그리고 보제루 편액 글씨는 창암 이삼만의 필적이다. 대웅전과 마주보는 쪽에는 "華藏(화장)"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보제루의 앞쪽 평방 위에 걸려 있는 "華藏(화장)"이란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필적이다. 화장세계(華藏世界)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불국토 세계인 연화장 세계이다. 그 곳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이 주제하고 있는 세계이며, 한량 없는 공덕(功德)과 광대장엄(廣大莊嚴)을 갖춘 불국토이다.

 

 

 

보물 제132호, 화엄사 대웅전 앞에는 동서로 쌍탑이 서 있다. 그 중에 동쪽에 서 있는 것이 "화엄사 동오층석탑(華嚴寺東五層石塔)"으로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동탑은 아무런 장식없이 단정하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1층 몸돌이 높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또한 각 층 몸돌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에 비해 높이의 줄어드는 정도가 적어서 늘씬해 보인다. 지붕돌은 매우 평평하고 얇은데 몸돌을 따라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가 큰 편이며, 그 중 1층과 2층의 차이가 한층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있고, 다시 사잇기둥을 두어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올려 놓았다. 이 탑은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의 탑이 2단 기단인데 비해 1단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과 비슷한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경으로 짐작된다.

 

 

화엄사 서오층석탑(華嚴寺西五層石塔)은 보물 제133호이며, 화엄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쌍탑 가운데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향에 따라 배치하였고, 윗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나뉜 두 면에는 8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몸돌에는 각 층 모서리에도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 1층 몸돌 4면에는 4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 배치하였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밑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탑의 상륜부에는 2층의 단이 있는 받침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있다. 석탑의 형태는 높고 가파르면서도 상하의 체감비율이라든지,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수법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특히 아래층 기단의 12지신상 조각은 석탑에서 흔하지 않은 예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1층 몸돌 세 곳에 나타난 조각상은 그 배치에 보다 신중을 기하였고, 특히 12지신, 8부중, 4천왕 모두 불교의 수호신적 기능을 지닌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탑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이나,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 남쪽으로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좌측부터 원통전, 영전, 대웅전이고, 석탑은 화엄사 동오층석탑이다.

 

 

 

 

보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는, 화엄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국보 제67호)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인조 8년(1630)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고,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고, 공포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든 우물 천장이며, 삼존불 위쪽으로 장식적인 성격을 띠는 지붕 모형의 닫집을 놓아 엄숙한 분위기를 한층 높이고 있다. 규모도 크고 아름다우며 건축 형식의 특징과 균형이 잘 잡혀있어 조선 중기 이후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화엄사 대웅전은 특별한 대웅전이다. 대웅전 편액임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불 대신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불이 봉안되면 대적광전이라고 해야 하지만 중건 당시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이 써서 내려준 현판을 그대로 사용해 대웅전 편액이 걸려 있다. "大雄殿(대웅전)"의 편액(扁額)도 일주문의 편액을 쓴 의창군 이광(義昌君 李珖)의 글씨이다. 편액(扁額)의 관지(款識)를 보면 "崇禎九年 歲舍丙子仲秋 義昌君 珖書(숭정구년 세사병자중추 의천군 광서)"라고 적혀 있다. 義昌君 李珖(의창군 이광, 1589~1645년)이 쓴 글씨로는  화엄사 "대웅전"과 "지리산 화엄사" 편액, 그리고 전주 송광사 "대웅전" 편액등이 남아 있으며, 부친인 선조가 즐겨 쓴 석봉 한호(石峯 韓濩)체의 글씨를 잘 쓴 명필가였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신불로서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향우(向右)측에는 노사나불을, 향좌(向左)측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다. 보통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봉안할 때는 건물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는 편액을 붙이는데, 이곳의 화엄사에는 대웅전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대웅전의 본존불인 비로자나 부처님은 법신불인데 법신이란 ‘진리 그자체’라는 뜻이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수인은 지권인이라고 하는데,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말아 쥐고있다. 가끔 왼손이 위로 가고 오른손이 아래로 가는 경우도 있다. 오른손은 부처님의 세계요, 왼손은 중생세계를 표현하는데,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둘이 아님을 나타내며, 진리의 몸으로 중생세계를 감싸고 있음을 뜻한다. 그 사찰의 주존불로 모셔질 때는 좌우협시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 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는데, 선종사찰에서 주로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대웅전에 봉안된 비로자나 부처님의 좌협시 노사나불이다. 원만보신 노사나불은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부처님으로 수행의 결과로 이루어진 몸이란 뜻이다.

 

 

대웅전에 봉안된 비로자나 부처님의 우협시 석가모니불이다.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몸을 바꾸어 중생의 입장에 선 현재의 부처님이다. 

 

 

닫집은 본존불 위에 설치되는 장식물로서 불단과 함께 부처님의 공간을 엄숙하게 만든다. 닫집은 섬세하고 화려한 구조로 꾸며지며 용, 연꽃, 비천, 봉황 등의 장식물에 의해 장식 효과가 더욱 증대된다. 이처럼 닫집을 장식하는 것은 결국 닫집 아래에 있는 불보살을 영성이 충만한 신비스러운 존재로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화려한 누각과 지붕 모양으로 만든 닫집을 보궁형이라고 한다. 보궁형의 경우 적멸보궁, 도솔천, 내원궁 등의 현판이 있는 경우도 있다.

 

 

대웅전의 39위(位) 신중탱이다. 동진보살(童眞菩薩)의 위쪽에 있는 분이 대자재천(大自在天)인데.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 Mahasura)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인도 브라만교 최고의 신인 시바(Siva)로, 불교에 귀의하면서 색계의 색구경천(色究竟天) 주재자이자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 되었다. 신중탱에서 대자재천은 보살형의 모습에 3개의 눈과 8개의 팔을 갖고 있으며, 손은 합장을, 혹은 해와 달, 창, 금강령 등의 지물을 들고 있기도 하다. 대자재천은 때때로 시바가 타고 다니는 흰 소 난디(Nandi)를 탄 모습을 하고 있다.

 

대자재천을 중심으로 좌측에 합장하고 있는 보살이 범천이다. 범천(梵天)은 인도 브라만교의 우주 창조신인 브라흐만(Brahman)으로 제석천과 함께 불교에 귀의하면서 호법신이 되었다. 신중탱에서 제석천과 마찬가지로 꽃을 들거나 합장을 한 보살형의 모습이다. 

 

대자재천을 중심으로 우측에 합장하고 있는 보살이 제석천이다. 제석천은 33천이라고 하는 도리천의 왕이며 수미산 정상에 있는 선견성에 머물면서 세상을 수호한다. 지상에서 보자면 가장 높은 곳 하늘세계로선 아래에서 두번째에 해당하는 곳에 도리천이다. 제석천은 원래 인도의 무용신(武勇神 굳세고 용감한 신)인 인드라 신이었다. 최고의 신격을 지닌 강력한 힘의 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감화를 입어 불교에 귀의하게 되어 범천과 함께 정법을 수호하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옹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좌로부터 각황전과 석등, 사사자탑, 나한전, 원통전과 화엄사 동오층석탑. 

 

 

 

국보 제67호, 화엄사 각황전(華嚴寺 覺皇殿)이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 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공포가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지리산 화엄사  覺皇殿(각황전) 편액(扁額)의 관지(款識)를 보면,  癸未孟夏 刑曺參判李震休書(계미맹하 형조참판이진휴서)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1703년(숙종 29년) 음력 4월에 형조참판 성암(省菴) 이진휴(李震休)가 쓴 글씨이다. 성암(省菴) 이진휴(李震休,1657~1710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백기(伯起), 호는 성재(省齋) 또는 성암(省菴). 아버지는 영(泳)이며, 어머니는 정만화(鄭萬和)의 딸이다. 1677년(숙종 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86년(숙종 12년)에는 정6품 전적(典籍)의 신분으로 중시문과에 병과로 다시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 뒤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 헌납(獻納),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 집의(執義), 필선(弼善), 승지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697년(숙종 23년) 여주목사를 지냈다. 1700년에 도승지,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1701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송사(訟事)를 불공정하게 처리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일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도승지를 거쳐 1703년에는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는데,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 2명을 죽인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705년(숙종 31년)에 다시 도승지로 등용되었으며 그뒤 동지의금부사, 안동부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특히 서예에 능하였으며, 통도사사리탑비(通度寺舍利塔碑)의 비문을 비롯해 많은 글씨를 남겼다.

 

 

각황전(覺皇殿)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문수보살과 다보불, 지적보살을 봉안하였고, 우측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보현보살과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봉안해 3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또한 불단의 후벽 뒤쪽에는 근래에 조성한 아미타불입상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冥府殿)은 지장보살을 봉안한 법당으로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 한다. 명부전은 고려시대 말에서 조선 초에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조선시대 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익공(翼工) 형식이며 맞배지붕이다.

 

 

 

명부전에 모셔진 지장보살과 좌협시의 도명존자, 그리고 우협시의 무독귀왕

 

 

영전(影殿)1632년 벽암(碧巖)스님이 중건하였고, 1836년에 보수된 건물로 막돌기단 위에 정면 5,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다. 원래 이곳에는 역대 조사들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였으나, 현재 승방으로 개조하여 화엄(華嚴) 석경(石經)을 보관해 놓았다. 

 

 

영전(影殿)의 평방 위에는 흑판(黑板)에 흰글씨로 쓴 편액이 걸려 있다. 해운(海雲)이란 관지(款識)가 있으며, 근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원통전 후면 벽은 각 칸에 +자, x자를 합친 모양의 수장재를 두어 외관에 변화를 주었다.

 

 

원통전의 건물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원통전(圓通殿) 내부에는 4개의 고주(高柱)를 세워 그 중간에 독립된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는 불단이 있는데, 이런 형식을 대개 중심형(中心形) 불전(佛殿)이라고 하며, 양산 통도사와 속리산 법주사, 순천 선암사의 원통전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정방형의 불단(佛壇) 위에 유리 감실(監室)을 만들어 목조관세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으며, 상부에는 보개(寶)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원통전(圓通殿) 편액은 영조와 정조 대에 대사간을 지낸 조종현(趙宗鉉, 1731∼1800년)의 글씨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의 나한전에는 소조(塑造)의 석가모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 가섭(迦葉)존자와 아난(阿難)존자 그리고 소조(塑造)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본존불의 석가모니불은 높이 솟은 육계와 넓은 중앙 계주가 있다.

 

 

보물 제300호, "화엄사 원통전전 사자탑(華嚴寺 圓通殿前 獅子塔)"은 원통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이중기단(基壇)의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은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하였는데, 조각수법은 이에 못미처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국보 제12호,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華嚴寺覺皇殿앞石燈)"은 각황전 앞에 세워져 있으며,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의 석등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조성연대(造成年代)는 명확하지 않으나 함통연간(咸通年間)(860∼873)을 전후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 제35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상의 석등 

 

 

 

국보 제35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 四獅子三層石塔)"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탑을 이고있는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전각만 살짝 올라가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 합장한 채 서있는 어머니에게 꿇어앉아 차를 공양하는 효성 지극한 연기조사를 표현해 놓은 석등

 

 

보제루 앞마당에 있는 수조인데, 거북이가 양쪽에서 물을 뿜고 있는 정겨운 수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