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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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덕숭산 산행기

徐白(서백) 2009. 2. 7. 03:29

 

 

왠지 설래이는 이른 새벽! 오늘은 분명 즐거운 날이다. 내 마음이 메마르고 조급할때, 내가 외롭고 힘들때도 항상 도반이 되여 언제나 반가이 맞아주는 칠불산악회의 특별산행날이기 때문이다. 들뜬 마음으로 배낭을 챙겨 메고 집을 나섰다. 파아란 하늘사이로 하얀 뭉게구름이 솜털처럼 흘러가는 모습이 보는 것만으로도 상큼한 가을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주 좋은 날씨이다. 출발지인 범내골에 도착하니 6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 많은 회원들께서는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나를 반가이 맞아준다.

 

어느 단체 어느 조직이든 상대 탓만 하고 내 안에서 모든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 내가 속해 있는 그 단체나 조직은 추락하게 되여 있기 때문에 나는 칠불산악회 구성원으로서 본분을 지키고자 나름대로 마음챙기기 연습을 하면서 칠불가족이 된 것에 만족해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내 자신이 더 즐겁고 행복한 것 같다.

 

1박2일의 특별산행에 한 석의 빈자리도 없이 만차로 가는 보기 좋은 모습도 눈에 보이지 않는 집행부의 수많은 확인 점검과 오랜 시간동안의 수고로움이 뒤따랐기에 가능했으리란 생각을 한다. 차는 어느새 출발지를 떠나 남해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사이에 집행부의 바쁜 손놀림속에 아침예불과 생일축하, 회장님의 인사말씀과 산행대장님의 산행안내가 있고, 문산휴게소에서의 아침공양을 하고, 바쁘게 가건만 우리들의 목적지가 왠지 만만찮은 거리이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한국고건축박물관에 맨 먼저 도착하였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점심식사후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이 곳 출신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보유자인 거암(巨巖) 전흥수 대목장이 필생의 신념으로 만든 박물관이란 걸 보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다양한 우리의 전통 목조건물들이 축소된 모습으로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는 아름다운 고건축 모형들이다. 불교건축에 관심이 있어 간단한 명칭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내가 알고 있는 얄팎한 알음알이는 부끄러울 뿐이다.

 

나무를 정교하게 짜맞추어 나간 대목장의 손길을 제대로 느껴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다시 찾을 것을 다짐하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덕숭총림 수덕사(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본사)에 도착하였다. 늣은 시간 관계로 대웅전 참배는 하산하면서 하기로 하고 바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산행 초입에 있는 견성암은 일엽스님의 출가를 계기로 만공선사께서 견성암이란 비구니선원을 처음 세웠으며 ‘수덕사의 여승’이란 송춘희씨의 노래가 발표되면서 수덕사는 본의 아니게 비구니 사찰이라는 오해가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견성암을 참배후 기와불사를 하고, 곧바로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자주 산행을 하지 못한 후유증이 후들거리는 다리에서부터 전해져오는가 했는데, 어느새 나의 몸은 정혜사에 올라와 있었다. 앞마당의 만공탑에는 세계일화(世界一花)란 글귀가 선명하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이튿날에 만공선사께서 땅에 떨어진 무궁화를 먹에 찍어 쓴 글이라고 한다. 기념사진을 한컷 찍고, 바쁜 걸음을 재촉해 정상에 올랐다. ‘산이 절을 만들고, 절이 산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그리 높지도 깊지도 않고 산세가 빼어나지도 않는 너무도 평범한 덕숭산이 천년고찰을 품에 안고 있음은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상(해발 495m)에서 간단한 산상법회 후에 발걸음을 재촉하여 수덕사로 내려오자 제일 먼저 덕숭낭자와 수덕도령의 설화가 깃든 관음바위와 관음보살께서 반겨 주신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597년) 재위시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씨조선 오백년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한국불교의 선맥은 꺼져만 가고 있을때, 이 불씨를 되살린 분이 경허선사이고, 되살린 선맥을 다시 퍼트린 분이 경허의 제자이신 만공스님이고,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선맥이 고스란히 이어져 온 사찰이 바로 수덕사이다. 마을 이름 덕산(德山)과 산이름 덕숭(德崇)에 절 이름 수덕(修德)까지 3德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국보 제49호인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1308년)때 건립된 것으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불인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빛바랜 색깔과 배흘림기둥의 갈라진 자국들이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는 듯 하다. 맛배지붕과 주심포식 목조건물의 뛰어난 조형미가 있었기에 전흥수 대목장과 같은 분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반문해 본다. 특히 측면 맛배지붕의 선과 벽면에 노출되어 있는 목부재가 만들어 내는 구도는 수덕사 대웅전에서만 보여지는 아름다움이다.

 

앞마당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지닌 고려초기의 3층 석탑을 챙겨 보고, 회원들에게 범종각의 범종과 고래모양의 당목에 스며있는 용생구자설과 관련된 간단한 설명을 하고 하루를 마감하면서 덕산온천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저녁에는 회원들과 함께 곡차를 곁들인 화합의 모임도 있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일찍 강행군은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국보 제84호 서산마애삼존불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 형식에 두분의 입상과 한분의 반가사유상의 미륵보살을 조각하였는데, 본존불인 석가여래입상과 좌협시는 미래불인 반가사유상의 미륵보살이며, 우협시는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입상이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달라지며, 빛과의 조화에 의해 삼존불의 자애로운 미소가 달라져 보이도록한 백제인들의 슬기가 놀랍기만 하다. 아뭏튼 우리나라 마애불 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고 한다.

 

백제의 미소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바다위에 한송이 연꽃이 떠있는 듯하다는 간월암을 찾았는데, 마침 바닷물이 빠져나간 시간대라서 걸어서 들어 갈 수 있어 좋았지만 일년전에 찾았을때의 만조시의 아름다운 경관이 아니여서 조금은 아쉬웠다. 고려말 무학대사께서 이 곳에서 수도(修道)하다 하루는 달을 보고 홀연히 도(道)를 깨치시고 난후에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이라 하고 섬 이름도 간월도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암자가 완전히 폐사가 된 것을 만공스님의 지시에 의해  제자인 마벽초스님께서 중창을 하였다고 한다. 불기2968년 신사년(남방불기로 환산하여 서기로 보면 1941년에 쓴 편액임)에 쓰신 만공스님의 편액이 눈길을 끈다.

 

안면도 방포해수욕장에서 잠깐의 휴식을 하고, 창건 연대가 확실치 않는 공주 마곡사(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본사)를 참배하였다.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대광보전에 합장 삼배후에 후불벽화로 모셔진 백의수월관음도를 친견하고 보니 내 마음은 벌써 극락세계에 와 있는듯하다. 또 이곳에는 앉은뱅이 전설이 있는데, 어느날 앉은뱅이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정성을 다해 참나무로 자리를 짜 드리겠으니 다리를 낫게 해주십시오’ 하며 비로자나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참나무 껍질로 정성스럽게 자리를 짜다보니 마침내 백일이 되였고, 그날 앉은뱅이는 자리 짜기를 완성했으며 나갈때는 걸어서 나갔다는 대광보전 바닥의 참자리가 왠지 눈길을 끈다.

 

대웅보전의 부처님(좌우협시는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께 일년만에 다시 찾아 뵈옵는 문안인사를 드린후 바쁘게 빠져나오면서 산신각을 참배하였는데, 정말 특이한 산신탱화에 한참을 쳐다보다 카메라에 담아 미끄러지 듯이 마곡사를 벗어나 지친몸을 차창에 기대고 곡차 몇잔에 잠들었나 싶었는데 눈을 뜨니 부산이다. 빈틈없이 알차게 짜여진 1박2일간의 특별산행과 아름다운 여행이 다시 한켠의 추억으로 영원히 간직되어져야 될 시간이다.

 

회장님이하 집행부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또한 회원님들의 가정과 하시는 일에 부처님의 가호가 늘 함께하시길 기원하면서 두서없는 산행기를 읽어 주실 회원님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하며 끝을 맺는다.

 

                                 2007년 10월 6일∼7일 특별산행 산행기 -〔칠불산악회 십년사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