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27 - 동악산 도림사 본문
도림사는 전남 곡성군 곡성읍 월봉리 327번지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본사 화엄사의 말사이다. 백제가 멸망하던 해인 신라 무열왕 7년(660년)에 원효대사가 화엄사로부터 옮겨와 “도림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이때 풍악소리가 온 산을 진동했다고 해서 산 이름을 동악산(움직일動, 풍류樂)이라 하고, 도인들이 절에 숲처럼 모여들었다고 해서 절 이름을 도림사(道林寺)라 바꾸었다고 한다. 사찰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의 계비였던 신덕황후가 도림사를 후원하였는데 이로 인해 한 때 “신덕사(神德寺)”로 부른 적도 있었다.
삼국통일 뒤에는 876년(헌강왕 2)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고려시대에는 지환스님이 중창했으며, 조선후기에 4창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위의 사실들을 증명해주는 자료는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 사찰 내에는 보물 제1341호인 괘불(掛佛),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1호인 보광전 삼존불 등이 있다. 그리고 도림사가 1984년 지방 문화재자료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후기의 기록인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따르면 전남 순천의 송광사를 중건한 용운 처익(龍雲 處翼 1813~1888)스님이 도림사의 산내 암자인 길상암과 나한전을 창건했으며, 당대 유명한 목수장이던 백련 영해(白蓮 影海)스님도 도림사에서 주석했다고 한다. 이 외에 도림사에 남아있는 상량문이나 기문을 통해서 그 내력을 알 수 있다. 먼저 1677년 송암(松庵)에 의해 쓰여진 「도림사대루상량문(道林寺大樓上樑文)」에 의하면 성민(性敏)스님을 비롯하여 영오(靈悟)스님이 참여하였고, 대루의 건립에는 지배층으로부터 하층민과 비구 등 각계각층 160여명의 군민의 참여로 1677년에 건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다음「동악산도림사대웅전중창기(動樂山道林寺大雄殿重刱記)」에 따르면 도림사는 원효. 의상. 윤필 3성인이 창건 보수하였다는 먼 옛날의 개창사실이 있으나 역시 신라. 고려 때의 일은 그 인연을 알 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1663년에 영오스님이 3창하고, 1821년에 도성(道成)스님에 의해 4창되었으나 이후 사세가 기울어진 당시의 모습도 기록하였다.
도림사에서 간행된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儀 梵音刪補集)』은 수륙재에 대한 의식과 절차를 상세히 기록한 불서로서 우리나라 불교 범패(梵唄)의 귀중한 유산이다. 1723년에는 "범음집(梵音集)"이 지환스님에 의해 간행되는데 소례(小禮)와 대례 등 5가지를 절충하여 재의의 절차와 방법을 적었다."범음산보서(梵音刪補序)"와 "신간범음집산보서"에서는 범패(梵唄)의 유래와 음율을 통한 교화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현재는 보광전, 응진당, 명부전, 칠성각, 궁현당, 반야실, 범종각 등이 있고, 도림사 바로 정면 앞으로 흐르는 계곡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된 청류동계곡이다.
사찰 입구 일주문의 바깥쪽에는 의제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이 쓴 도림사(道林寺) 사액(寺額)이, 안쪽에는 오도문(悟道門)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으나 새로지은 일주문에는 오도문이라는 편액은 보이지 않는다. 도선국사, 사명대사, 서산대사, 척익대사 등 도인(道人)들이 숲같이 많이 모여들었다 하여 도림사(道林寺)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사찰 경내의 전경
근래에 새로 지은 궁현당(窮玄堂)이라는 편액이 붙은 요사채를 겸한 종무소 건물이다.
괘불석주(掛佛石柱)는 사찰에서 행해지는 큰행사에는 많은 불자(佛子)들이 참석하게 되면 비좁은 대웅전 안에서 법회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대웅전 안에 모셔진 부처님을 대신하여 두루말이 그림 형태의 괘불을 대웅전 앞 마당에 두개의 깃대를 세워 걸고, 더 많은 신도들이 부처님을 볼 수 있게 하였던 깃대를 고정하는 석주(石柱)이다. 외형은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즉 야외에 부처님을 모시는 단을 설치하여 불법(佛法)을 설(說)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 많은 사람이 모임으로 인해 시끄럽고 떠들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야단법석(野檀法席)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보광전 건물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서 반야실(般若室)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범종은 지옥중생를 제도하기 위해 친다. 새벽에는 28번(수미산을 중심으로 수직적 28천을 의미)의 타종을 하는데 천상계인 사천왕천에서(욕계 6천, 색계 18천과 무색계 4천)비상비비상천까지 28천의 모든 하늘나라 중생들을 깨워서, 부처님의 도량으로 모이라는 의미에서 치고, 한편으로는 인도의 가섭존자에서 중국의 달마대사까지 28대 조사를 위하여 친다는 설도 있다. 저녁에는 육신을 가진 현실의 수행자가 수미산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정상이 도리천이다. 즉 현실의 수행자들이 사는 곳이 도리천을 상징함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의미로 33천(도리천을 중심으로 수평적 33천을 의미)을 상징하는 33번의 종을 친다. 그리고 28천+욕계천 아래의 5계(지옥, 아귀, 축생, 인간,아수라)라는 설도 있다.
도림사의 주불전으로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형식으로 1658년에 건축되었다. 보광전은 지형적 조건을 고려하여 높은 막돌허튼층 쌓기의 돌기단 위에 세웠다.
보광전이란 당호를 가진 법당은 우리나라에서 그 예가 드물다.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보광전(普光殿)은 원래 고대 중인도 마가다국 보리도량에 있었다고 하는 불전의 이름이다. 부처님께서 지상과 천상을 오가며 화엄경을 설하는 아홉 번의 법회(7처9회) 가운데 2회, 7회, 8회가 보광법당회로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보광전이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보광전에는 문화재자료 제271호로 지정된 목조삼존불(普光殿 木造三尊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 17세기에 조성한 목조불로 1664년에 봉안하였고, 반달형의 중앙계주와 원통형의 정상계주를 표현하였다. 얼굴은 사각형으로 굴곡 없는 상호에 꼭 다문 입술과 반개한 눈에서 선정에 잠긴 부처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귀는 크고 두툼하며 목에는 삼도가 굵은 선으로 그려져 있다. 법의는 변형우견편단으로 오른쪽 어깨를 살짝 걸친 모습이고, 결가부좌한 자세이다.
양 손은 따로 만들어 끼웠으며 수인은 오른 손은 가슴 높이 정도로 들어 중지와 엄지를 맞대고 약지를 약간 구부리고 있다. 왼 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왼쪽 무릎 위에서 엄지와 중지를 가볍게 맞대고 약지를 구부린 하품중생(下品中生)의 수인이다. 그리고 아미타불상의 복장물에서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발원문에는 조성동기, 불상명칭, 시주자(施主者), 조성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다. 발원문에는 불상을 조성하는데 참여한 모든 시주자들이 일체의 복락을 누리고, 모든 중생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또한 불상의 명칭인 아미타불을 ‘극락도사(極樂道士)’라고 지칭하고 있다고 한다.
관음보살은 왼손에 지물인 보병을 들고 있고, 대세지보살은 연꽃가지 만을 들고 있다. 두 보살상의 복장에서 모두 발원문이 발견되었는데, 관세음보살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하면 1680년(숙종 6)에 두 보살상을 조성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고자 무차대회를 열었음을 밝혀 당시 큰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광전 아미타극락회상탱(普光殿 阿彌陀極樂會想幀)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상태가 양호하며 도상의 형식이나 그림의 필력, 채색에 있어서 매우 견실한 면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두광 위쪽으로 넓어지는 키형 광배를 배경으로 삼베 바탕에 붉은 색 가사를 걸친 단아한 표정으로 중품중생인을 맺고 있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과 대세지를 비롯한 10대 보살을 배치하였으며, 좌우하단에는 사천왕을, 우측상단에는 제석천왕을 배치하였다.
보광전 불단의 양옆에 선유사명(仙遊寺銘)소대 2기가 있다. 높이는 각각 95cm이다. 이 소대들은 아래의 받침 부분과 위의 통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대 바닥의 묵서명에는 제작시기와 조성에 소요된 비용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일명 소통으로도 불리우며, 불교의식을 행할 때 발원문을 읽고나서 그것을 넣어두는 통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쌍으로 2개가 제작되어 불단 좌우에 놓여진다.
선유사명(仙遊寺銘)소대는 순치 18년(현종 2년, 1661년)에 천인(天印)스님에 의해 조성되었고, 1669년(현종 10)에 다시 채색하였다고 밝혔다. 이 소대는 곡성 동악산 선유사에 전해지는 것이라고 적고 있는데 어떤 연유에서 이곳에 봉안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선유사에 관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소대는 1672년(현종 13)에 천인스님에 의해 조성되었다. 당시 스님의 나이가 66세가 되어 눈이 어둡고 재주가 다하여 이 소대를 조성하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소대는 조선시대 목공예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위태천을 중심으로 범천과 제석천, 무장한 신중들이 에워싸고 있는 불화이다. 제석천은 외호신중 가운데 인도의 토속신 인드라가 불교에 수용되면서 승격된 신이다.
응진당(應眞堂)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주심포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주불로 안치하고 좌우 협시는 가섭과 아난, 제화갈라보살좌상과 미륵보살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목조와 석조로 조성된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칠성각이란 편액이 붙어 있지만 내부에는 삼성각에 모셔지는 칠성과 독성, 산신이 함께 모셔져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내부에는 지장보살,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상, 판관, 녹사, 사자, 장군상, 금강역사 등 모두 21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1690년에 조성되었다.
범종에 길상암(吉祥庵)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길상암에서 만들어진 범종이다. 길상암은 도림사에서 서북 방향으로 2키로미터 쯤에 있었으나 1960년대에 페찰되고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하대에 새겨진 명문에는 "康熙 45年 四月日 雲興寺"라는 글이 있다. 즉 1706년(숙종 32) 에 운흥사(雲興寺)에서 만들었음을 나타내는데, 이 범종도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옮겨졌는지 알 수 없다.
운흥사명 범종(雲興寺銘 梵鐘)에는 음통은 보이지 않고 용뉴는 쌍용의 형태로 몸체를 서로 틀어 고리를 대신하고 있다. 천판과 종신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는 융기된 1조의 굵은 선을 가로로 돌려 구분하였다. 이 굵은 선 바로 밑에는 상대 대신 원형 안에 범자를 넣은 원형 범자문 14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장식하였다.
범자문 밑으로 4개의 마름모꼴의 유곽을 두었는데 유곽의 문양은 당초문이고 그 안의 유두는 꽃받침 위에 자방이 돌출된 9개의 유두를 구비하고 있다. 유곽의 사이에는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 4구를 배치하였는데 조선시대 범종에서 흔히 보이는 것으로 두광과 보관을 갖추고 합장한 입상으로 표현하였다. 이종의 특징은 4구의 보살상 중 1곳의 보살상 아래에 연꽃가지 2개를 선(線)으로 조각한 것이다.
도림사 입구 왼쪽 산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대개 삼존도의 괘불은 입상인데 반해 도림사 괘불은 좌상이며 협시는 입상인 특이한 예이다. 주존은 석가모니불로, 협시는 문수·보현을 그렸다. 항마촉지인을 취한 석가모니불은 길상좌 형태의 결가부좌(結跏趺坐)이다. 이 괘불은 비록 삼존도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영산회상(靈山會上)을 그린 것이다. 두광 위쪽의 넓어지는 키형 광배를 배경으로 삼베바탕의 가사는 붉은 색이며 그 외에는 녹색을 잘 조화한 전남지역의 괘불 가운데 채색상태가 매우 뛰어나다.
도림사 괘불은 보물 제1341호로 지정되었다.(가로 708cm, 세로 775cm). 괘불지주는 법당 좌우에 12미터가 넘게 넓은 간격으로 자리한다. 괘불 자체의 너비(708cm)와 많은 차이가 나서 의아스럽다. 괘불함은 법당 후불벽 뒤편에 놓여 있고 괘불의 출입을 쉽게 하기 위해 법당의 왼쪽 뒷부분에 문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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