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25 - 수도산 수도암 본문
수도암은 수도산(해발 1,317m)의 상부에 위치한 도량이며, 본래 이곳의 산이름은 修道山이라고 불려져 왔는데 100여 년 전부터 부처님의 영험과 이적이 많다하여 佛靈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이곳 석불 이마에서 자주 방광이 있었으므로 불영산이라 불리워졌으며, 수행자가 모여 수도하고 마음 밝히는 곳이라 하여 수도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도암 창건 연대는 따로 전하는 것이 없으나 청암사 사적비에 쌍계사(현 증산면 소재지), 청암사, 수도암은 같이 창건했다고 하였다. 수도암은 통일신라 헌안왕 3년 (859)에 도선국사 창건했다. 도선국사는 청암사를 창건한 뒤에 수도처로서 이 터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해 7일 동안 춤을 추었다는 옥녀직금형(옥녀직금형 :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의 터로 도선국사의 비보사찰로 전해오고 있다. 그 뒤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도암에는 현재 본당인 대적광전,약광전,관음전,나한전,조사전 그리고 부속건물 몇동이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합천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년)에 순응과 이정의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시조인 도선국사께서 해인사 주변의 산(지금의 상왕봉)을 보니, 산이 세어 산살(山殺)이 생기는 터이므로 산의 나쁜 기운을 잠재우고자, 해인사 주변의 여러 산들을 살펴보다 지금의 수도암(859년에 창건)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해인사를 기리기리 보전하고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수도암을 창건하고, 또한 탑을 세웠는데, 탑의 자리에서 가야산 상왕봉을 쳐다보면 연꽃이 반쯤 핀 연꽃반개형의 모습임을 볼 수 있는데, 반쯤 핀 연꽃에서 활짝 피어난 연꽃으로 변해간다는 것은 불교(해인사)를 더욱 더 승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진취적인 영원함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도선국사는 산을 풍수적으로 인테리어를 해서, 산의 나쁜 기운을 좋은 기운으로 바꾸어 놓은 비보사찰인데, 해인사로서는 수도암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수도리에서 수도암으로 오르는 길에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가을 단풍들과 수도암 초입에서 바라본 고즈넉한 산사 전경
불교의 자비사상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진 관음전
상기의 사진은 서탑의 전체 모습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석탑이고, 옥개석의 받침은 1층과 2층은 5단이며 3층은 4단이다.
서탑의 1층 탑신에는 양쪽에 우주(隅柱,모퉁이기둥)가 있고, 각 면에는 신중상이 돋을새김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해 정확히 알아볼 수 없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쪽에 서 있는 두 개의 탑도 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온다. 이중 기단에 3층석탑이다. 1층 몸돌에 비해 2층과 3층 탑신이 줄었으나. 3층 몸돌은 2층과 비슷하여 안정감이 결여된 듯 하지만. 1층 탑신을 높게 하여 탑을 높게 보이게 하기 위한 수법이다. 1층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우주만 새겨져 있고, 신중상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지붕돌)은 동탑보다 얇고 넓으며 옥개받침은 1층과 2층은 5단이고, 3층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탑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옛탑은 약 1500여기가 있으며, 또한 국보와 보물의 25%가 탑이 차지하고 있다.
야외에서 불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석조물이다. 지대석 위에 복련(覆蓮)의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웠는데, 이는 8정도를 의미한다. 그 위에 앙련(仰蓮)의 상대석을 놓아 화사석을 받치고, 화사석 위에 옥개석을 덮었으며, 옥개석의 정상에는 연꽃 봉우리 모양의 보주가 있고, 화사석과 옥개석은 8각으로 되어 있다. 이런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불교적인 교리로 보면 화창(火窓)의 4방은 고,집,멸,도 사성제의 법문을 뜻하기도 한다. 정확한 조성년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상의 특징으로 보아서는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탑과 서탑의 사이에 석등과 함께 ‘刱主道詵國師(창주도선국사)’라는 글이 새겨진 돌기둥이 있다. 이는 도선국사가 수도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석주이다.
동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 석탑이며,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각형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두고 그 안에 마애불을 봉안하였는데, 석가모니불로 추정되는 2구의 불상과 왼손에 약함을 든 약사여래불, 수인이 지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이 조각되어 있다. 2층과 3층의 몸돌에는 각 모서리 마다 우주를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옥개석의 받침은 1층과 2층은 4단이며 3층은 3단이다.
동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 석탑이며,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각형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두고 그 안에 마애불을 봉안하였는데, 동쪽 면석과 서쪽 면석에는 수인으로 볼 때, 석가모니불로 추정되고 동쪽면의 불상 입술에는 채색 흔적이 남아 있다. 남쪽 면석에는 왼손에 약함을 든 약사여래불이고 이 불상의 입술에도 채색 흔적이 있다. 그리고 북쪽 면석에는 수인이 지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이 조각되어 있다. 2층과 3층의 몸돌에는 각 모서리 마다 우주를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옥개받침은 1층과 2층은 4단이고 3층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양식은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그 위에 공포를 얹은 다포식의 건물이다.
연화장 세계의 교주이신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그 사찰의 주존불로 모셔 놓은 중심 법당을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하고, 부속전각에 모실 경우에는 화엄전 혹은 비로전이라고 한다.
대적광전의 창살 꽃문양
대적광전에는 높이 2.51m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307호)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불상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말기로 추정되는 석조불상이며, 민머리에 육계는 작지만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네모나며 풍만하고, 가사는 양 어깨에 걸쳐 입은 통견이고, 옷주름은 느슨하고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큰 불상이면서도 불안정한 모습이다. 연화대좌는 복련(연꽃을 엎어놓은 모양)의 하대석으로 8각형을 이루고 있다. 앙련의 상대석에는 연꽃이 2줄로 교차되어 있고, 앞면에 3마리의 사자상과 용머리 같은 것이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불상을 불당골이라는 거창의 한 마을에서 만들어 옮겨올 때 그 크기가 너무커서 쩔쩔매고 있는데, 한 노승이 나타나더니 등에 업고 마구 달리더란다. 그런데 그만 수도암 입구에 다다른 노승은 칡넝쿨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노승이 불상을 내려놓은 뒤 산신을 불러 “부처님을 모셔 가는데 칡넝쿨이 웬말이냐? 앞으로는 절 주위에 일체 칡이 자리지 못하도록 하거라.”하고 크게 호통을 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로 지금까지 수도암 근처에는 칡이 일체 자라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창살 꽃 무늬와 화려한 불단도 눈여겨 볼만하다.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은 단독상으로 봉안되어 있는 듯하지만, 눈 여겨보면 본존불의 뒷 벽면 좌우 기둥에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을 표현한 동자상이 걸려 있다.
도선국사께서 해인사 주변의 산(지금의 상왕봉)을 보니, 산이 세어 산살(山殺)이 생기는 터이므로 산의 나쁜 기운을 잠재우고자, 해인사 주변의 여러 산들을 살펴보다 지금의 수도암(859년에 창건)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해인사를 기리기리 보전하고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수도암을 창건하고, 또한 탑을 세웠는데, 탑의 자리에서 가야산 상왕봉을 쳐다보면 연꽃이 반쯤 핀 연꽃반개형의 모습임을 볼 수 있는데, 반쯤 핀 연꽃에서 활짝 피어난 연꽃으로 변해간다는 것은 불교(해인사)를 더욱 더 승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진취적인 영원함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도선국사는 산을 풍수적으로 인테리어를 해서, 산의 나쁜 기운을 좋은 기운으로 바꾸어 놓은 비보사찰인데, 해인사로서는 수도암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약광전의 건물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공포는 주심포식이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약광전에는 높이 1.54m의 고려시대 석불좌상(보물 296호)이 모셔져 있다. 머리에 원통형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처럼 보이지만, 광배와 대좌가 있고 신체 각 부분의 표현으로 보아 여래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단아한 모습인데 마모가 심해 세부수법을 자세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통견의 옷 주름은 도식적이고, 손모양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나란히 모아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선정인 모습이다. 보주를 들고 있다는 설명이 일반적인 설명이나 자세히 보면 보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불상이라고 한다.
아귀발우, 아귀구(餓鬼口) 혹은 귀구(鬼口)라고 하는 이것은 사찰의 법당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형물이다. 육도 중생 가운데, 아귀 중생에게 감로수를 주는 곳이다. 또는 다기물이나 발우 씻은 물을 주기 때문에 천수통(天水筒), 청수통(淸水筒),퇴수대라고도 한다. 아귀 중생은 일반적으로 배는 남산만 한데 목구멍이 바늘 구멍보다 작은 아귀가 많이 알려져 있다. 배가 고파 끊임없이 먹을 것을 구하지만, 목구멍이 작아 티끌만한 음식이라도 목에 닿는 순간에 불길로 변해 버리는 고통을 당한다고 한다. 이에 불단에 올린 다기물이나 공양을 한뒤 발우를 닦은 곡기가 남아있는 물을 먹고 산다고 한다. 이는 아귀의 삶을 통해서 욕심 많은 인간의 모습을 보게끔하는 가르침이다.
나한전은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들인 16나한(아라한의 줄인 말)을 봉안한 법당이다. 부처님 제자중 아라한(阿羅漢)과를 증득하여 마땅히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큰 성인이라는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와 16나한상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하며, 석가삼존불과 500나한(제1차 경전 결집시 모인 500명)을 모신 전각은 나한전이라고 한다. 나한은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인이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이 있으며, 부처님으로부터 미륵불이 출현할때까지 중생을 교화하라는 수기를 받은 분들이다.
한편 500나한은 중생에게 복덕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후불탱화로는 석가모니후불탱화, 16나한도, 500나한도 등을 모신다. 우리나라의 나한전 가운데 500나한을 모신 곳으로는 경주 기림사 응진전, 영천 거조암의 영산전, 완주 송광사 나한전 등이 유명하다.
나한전 양쪽의 대들보 위에 황용과 청용이 익살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용이 물을 관장하며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목조건물에서 자주 일어날 수 있는 화재(火災)로 부터 대웅전을 보호하기 위한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나한전 천장에 그려진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관음보살과 지장보살도
나한전에서 바라본 수도암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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