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14 - 수덕사 산내암자, 견성암을 가다. 본문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14 - 수덕사 산내암자, 견성암을 가다.

徐白(서백) 2009. 7. 11. 09:38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자리하고 있고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본사 수덕사의 산내암자이며, 수덕사 서편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견성암(見性菴)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원래는 정혜사 동쪽에 초가로 지어져 있었으나 만공스님의 뜻에 따라 1930년 도흡스님이 창건한 이래 개축을 거듭했다고 전한다. 1965년 벽초스님에 의해 법당을 인도식 2층 석조 건물로 조성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서선당 동선당 요사 등의 전각을 건립하여 오늘날에 이르는 가람을 자랑하고 있다.

 

비구니 수행정진 제일선원으로 널리 알려진 이곳 선방에서는 일백여명이 넘는 비구니스님들이 깨달음의 세계를 향해 정진하고 있다. 2층 법당으로 들어가는 복도에는 만공스님의 친필인 칠근루(七斤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칠근루는 우리가 먹는 쌀 한 톨에는 일곱 근의 농부땀이 베여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지녔다.

 

개화기의 여류시인 김일엽 스님이 수도정진한 곳으로도 유명세를 가하고 있다. 견성암은 일엽스님의 출가를 계기로 만공선사께서 견성암이란 비구니선원을 처음 세웠으며, 송춘희씨의 "수덕사의 여승"이란 대중가요가 발표되면서 수덕사는 본의 아니게 비구니 사찰이라는 오해가 생겨나기도 하였는데, 시인이며 수필가였던 김일엽 스님의 본명은 원주(元周). 평안남도 용강(龍岡) 출생으로 서울의 이화학당(梨花學堂) 졸업 뒤 일본에 유학하였다. 신문학운동과 여성운동을 하였으며 기독교신자였으나 불교로 개종, 수덕사(修德寺)에 입산(入山)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불단에는 본존으로 석가모니불을 봉안했고 양협시로 관음보살좌상을 조성했다. 관음보살좌상은 정혜사 관음전의 관음보살상과 조각형태에서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으나 조각가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후불탱화는 수덕사 산내암자 곳곳에서 보이는 금어 정연스님 작으로 보이며, 또 법당안에는 산신탱과 현왕탱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견성암의 편액은 2층의 인도식 전각 앞에 걸려있는데, 암자의 한자가 암자암(庵)자가 아닌 맑은 풀을 상징하는 풀암자암(菴)를 써넣었다.

 

 

 

견성암 이정표와 암자 입구

 

 

견성암의 주법당이다. 2층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좌상과 관세음보살좌상이 좌우에 모셔져있다.

 

 

2층의 인도식 전각 앞에 걸려있는 견성암 사액에는 견성암의 한자가 암자암(庵)자가 아닌 맑은 풀을 상징하는 풀암자암(菴)을 써놓은 것이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2층 법당으로 들어가는 복도에는 만공스님의 친필인 칠근루(七斤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칠근루(七斤樓)는 우리가 먹는 쌀 한 톨에는 일곱 근의 농부땀이 베여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대중들이 시주한 쌀 한톨에도 온갖 정성이 깃들어 있으니 수행함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경책의 뜻이 담겨있는 듯하다.

 

 

법당에 모셔진 삼존불

 

 

석가모니불좌상

 

 

좌협시 관세음보살

 

  

우협시 관세음보살

 

☞참고 - 관세음보살

불교의 자비사상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을 부속전각에 모셔놓은 법당을 관음전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을 주존불로 봉안한 경우에는 원통전 또는 원통보전이라한다.(속리산 법주사의 경우, 중심 법당이 대웅보전이고, 관음보살을 모신 법당은 원통보전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관세음보살의 좌우보처로 남순동자(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동자 : 53인의 선지식을 찾아나선 선재동자가 진리의 법을 구하고자 여행을 하면서 그들과 만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와 해상용왕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고, 후불탱화로는 성관음도, 42수 관음도, 천수관음도, 백의관음도, 11면관음도 등을 모신다.

 

아미타불의 좌협시로 모셔지기도 한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관자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하여 보살핀다는 뜻),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즉 관음보살이 현세의 이익을 살핀다면 대세지보살은 내세의 안락을 기원한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법화경에는 33응신을 말하고 능엄경에는 32응신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32 또는 33의 수는 한정된 숫자가 아닌 무수한 수를 나타낸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보관의 정수리에는 아미타불을 근본 스승으로 삼고 항상 모신다는 뜻으로 아미타불의 화불을 모시고 있다. 왼손에는 연꽃봉우리를 들고, 오른손에는 감로병을 들고 있다. 왼손에 든 연꽃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을 상징한다. 그 꽃이 활짝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하였다는 뜻을, 꽃봉우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피어나 성불할 것을 상징한다.

 

관세음보살은 일반적으로 성(聖), 천수천안(千手天眼), 마두(馬頭), 십일면(十一面), 여의륜(如意輪), 준제(准提) 혹은 불공견색의 6관음을 말하며, 그 중에 성관음이 본신이고, 다른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탱화로 모실때에는 1천개의 눈과 1천개의 손을 모두 묘사하지만, 조각상으로 모실땐 보통 42수(手)만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42수 중 합장한 두 손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외의 40수는 각각의 손이 25유의 중생을 제도하므로 40×25=1,000手가 된다. 여기서 25유는 지옥부터 천상까지의 육도중생을 25계층으로 나타낸 것이다.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은 항상 인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 보타락가산에 거주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이곳의 맑고 깨끗한 연못가 금강보석위에는 관세음보살이 앉아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있으며, 때때로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모습을 묘사한 것이 수월관음도이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복을 주고 고통과 재난에서 구제해주며 나아가 극락세계로 이끌어줄 뿐 아니라 불법을 구하는 수행의 방법까지도 암시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모습이 물에 비친 달처럼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하여'수월관음도'란 이름이 붙여졌다.관세음보살이 바위 위에 책상다리[半跏] 자세로 앉아 있고 그 앞에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淨甁)이, 등 뒤에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흰옷을 입은 백의관음, 버들가지를 든 양류(楊柳)관음, 밀교의 영향을 받은 천수관음 등의 탱화도 있다. 양류관음 외에도 대부분 관음상에는 대부분 한손에는 정병, 나머지 한손에는 버들가지를 들고 있거나, 버들가지를 꽂은 정병이 곁에 있는데, 여기엔 ‘정병에 있는 물을 버들가지로 뿌려서 모든 중생의 번뇌를 없애주고 병을 낮게 해준다’는 뜻이 담겨 있다.

 

 

 

관음전에 봉안된 관세음보살

 

 

서선당

 

 

동선당

 

 

일엽스님과 속가의 아들인 일당 김태신(日堂 金泰伸) 화백

1921년 한국의 지성 김일엽은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난다. 도쿄에 가는 도중 당시 도쿄대학 법학부에 다니고 있던 일본인 오타세이조(太田淸藏)를 만난다. 이때 이미 시인이었으며 문학여성이었던 김일엽의 지성 넘치는 아름다움, 품위 있는 자세를 대한 오타세이조는 한눈에 반하고 만다. 한편, 일엽은 세이조의 성실한 모습 그리고 순진한 마음에 끌려, 두 사람은 열렬한 사랑의 굴레에 싸인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하여 세이조의 부모를 찾아간다.

그런데 오타 집안은 일본에서도 역사적으로 굴지의 양반 집안이었다. 14대 할아버지가 ‘오타도깡(太田道灌)’이란 분으로, 약 600년 전에 오늘의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궁성을 구축한(지은) 대단한 무장(武將)이었던 것이다. 세이조는 그의 14대 적손(嫡孫)이고, 세이조의 아버지는 당시 은행 총재, 생명보험회사의 회장 등 큰 재벌이었다.

따라서 세이조의 아버지는 “전통 있는 오타 집안에 조선여자를 며느리로 들이다니 절대 허락 못 한다”고 두 사람의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세이조는 ‘오타 가를 이을 것인가’, ‘조선 여성을 택할 것인가’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이조(淸藏)는 끝내 일엽을 택하여 두 사람은 사랑을 관철할 것을 고하고 집을 나오고 만다. 그 후 두 사람은 결혼하여 사랑의 결정체인 아들 태신(泰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이조의 집에서는 일엽에게 세이조와 헤어지게 하기 위하여 회유책이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압력을 가해 왔다. 그런 사이 일엽은 ‘나 하나 양보하면 남편인 세이조와 아들 태신은 오타 가(太田家)에 돌아갈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세이조와 아들 태신은 행복할 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이조의 친구인 신도(進藤) 부부에게 태신을 맡기고, 남편인 세이조에게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는, 몸이 찢기는 아픔과 눈물 속에 외로이 한국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일엽이 써 놓고 간 편지를 본 세이조는 일엽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책하였으며, 태신이 세 살이 됐을 때 친구 집에서 아들을 찾아 데리고 일엽을 찾아 한국에 나오게 된다. 그리고 아들 태신을 역시 친구 집에 맡겨 양육을 부탁하고, 세이조 자신은 당시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일본과 조선의 우호·이해·친선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다. 그런 중에 일엽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비구승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아연실색하였다. 

세이조는 일엽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아들과 셋이서 다시 시작하자고 일엽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일엽은 나의 생명을 구해준 부처님을 배반할 수가 없다면서 돌아갈 것을 거절하였다. 일엽의 굳은 결의를 알고 세이조 자신도 일엽에게 맹세한 사랑을 관철하기 위하여 그 후 독신으로 지낼 결심을 했던 것이다.

태신이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린 그림이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 세이조는 크게 기뻐하면서 태신을 당시 국보적인 화가 이당 김은호(以堂/金殷鎬) 화백에게 사사시켜 그림 공부를 하게 하였다. 태신이 이당에게 그림 공부를 하러 갔을 때 김은호 화백은 태신을 낳아준 엄마 얘기를 하게 된다. 자기를 낳아준 엄마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안 태신은 그날부터 친엄마가 보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태신은 출가한 친엄마 일엽이 있다는 절을 찾아간다. 엄마가 있는 절 수덕사(修德寺)는 역에서도 50리 길이나 되어 돌가닥 다리의 덕숭산(德崇山) 산길을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늘같은 엄마가 보고 싶어 점심도 굶은 채 발에서 피가 나도 모르고 산을 올라갔다.

이미 시간은 밤이었다. 아무도 안 보이는 캄캄한 절간, 지나가는 여승에게 일엽 스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드디어 나타난 일엽 스님에게 태신은 “엄마!” 하고 매달렸다. 일엽 스님은 크게 자란 아들의 졸지 방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먹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 아들 태신의 머리·볼·귀·어깨·등을 떨리는 손으로 부드럽게 매만지며 껴안아주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일엽 스님은 (아니, 태신의 엄마는) 갑자기 근엄한 표정으로 태신에게 “앞으로 너는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마라” 하면서 만공(漫空) 스님에게 데리고 가서 태신의 식사와 숙박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사정을 들은 만공 스님은 일엽 스님에게 “태신은 라훌라다”라고 말한다. 라훌라(羅喉羅)란 석가모니가 출가 전에 낳았던 아들의 이름이다.

일엽 스님은 태신을 떠나보내고 나서 ‘내 아들에게 엄마라 부르지 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깊은 죄, 속세를 떠났으나 자식에 대한 피어린 사랑에 젖어 부처님 앞에 필사적으로 ‘나무관세음보살’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아버지 세이조는 그 후에 태신을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공부시켰고, 미국에서도 최근까지 뉴욕 화단에서 활약한 바 있다.

 

 

만공선사(滿空禪師)

만공 월면(滿空月面, 1871~1946)은 근대 한국선의 자리매김을 한 대선사로 법명은 월면, 법호는 만공이다. 경허성우의 제자이다. 1871년 전북 태인군에서 출생하였고, 13세 때 김제 금산사에서 들어가 14세 때 계룡산 동학사 진암노사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그해 동학사의 경허스님의 인도에 따라 천장사에서 경허의 속가 형님이었던 태허스님을 은사, 경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법명을 월면이라 하였다.
 
천장암에서 서너 살 아랫사람에게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혀 봉곡사로 자리를 옮겨 이를 화두로 정진하였다. 어느 날 서쪽 벽이 소리없이 무너지고 일체의 현상이 사라지더니 허공 중에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순간 2년이 넘도록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온갖 의심의 덩어리가 사라졌다.
 
다시 통도사에서 무자 화두를 참구하던 만공은 어느 날 새벽 통도사에서 예불 시간을 알리는 범종 소리를 듣고 순간 홀연 아무것도 막힘없고 걸림 없는 큰 깨달음의 희열을 맛보았다.
 
천장암으로 돌아온 만공은 경허로부터 “구름 달 골짜기 산 곳곳이 같으니, 산중 선자의 대가풍일세, 은밀히 무문인을 부촉하노니, 한 가닥 군세 기틀이 안중에 살아있네”라는 전법게(법을 전하는 게송)를 받았다.
 
만공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를 짓고 수년간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수행하는 스님)들을 지도하는 한편, 수덕사정혜사견성암 등을 중창하고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선학원을 설립하고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총독 미나미(南次朗)에 일본의 한국불교정책을 힐책하였다. 다음은 당시의 그에 관한 일화이다.
 
미나미 : “조선의 불교란 것이 과거에는 아무리 고유한 역사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오늘에 와서는 부패한 종교가 되었으므로 본관의 전임인 데라우찌 마사다께(寺內正懿) 총독이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를 통합하려고 했던 정책은 백번 지당한 것이있다. 이제 일본불교와 조선불교는 더 이상 둘이 아니므로 마땅히 하나로 합쳐야 할 것이다”
 
만공 : “청정본연 하거늘 어찌 문득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지난번 데라우찌 총독은 우리 조선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숱하게 많은 승려에게 일본불교를 본받아 대처, 음주, 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만들어 부처님의 계율을 파계토록 하여 불교계에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마땅히 지금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우리 조선불교는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그 수행 정법과 교화방편이 법에 어긋남이 없건만 일본불교와 합쳐 잘될 이유가 없으므로 총독부에서는 종교에 간섭하지 말라. 오는 말하는 불교진흥책이란 것도 총독부가 간섭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책이니라”
 
스님은 격식과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숫한 일화가 있다.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안와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잤다고 해서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란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스님의 이런 기이한 무애행(無碍行: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호방하게 하는 행동)은 범상한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겠으나 제대로 갖춘 눈으로 보면 세상을 깨우치는 풍우요 암시였던 것이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있는 전월사(轉月寺)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1946년 입적하니 세수 75세, 법랍 62세였다. 그 뒤 제자들이 정혜사 아래에 만공탑을 세우고 진영을 경허혜월 스님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하였다. 저서로 문도들이 편찬한 「만공어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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