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71 - 백제의 미소가 있는 용현계곡의 보원사지 본문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백제시대 절터로 화엄십찰의 한 곳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보원사지(普願寺址)보다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이 더 알려져 있다. 보원사지는 마애삼존불이 있는 곳으로부터 용현계곡 안쪽으로 약 2키로미터 들어가면 길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상왕산 서남쪽 계곡인 이곳은 보원마을이 있었으나, 1970년대 일대의 대대적 목장경영으로 인하여 마을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고 현재는 산속에 절터만 남아 있다.
백제 말기에 창건되어 고려 초에 이르러 주변에 백여 개의 암자와 천여 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제 멸망 직전까지 크게 융성했으리라 짐작되나, 그 후 어떤 시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분명치 않다. 약 삼만여 평에 이르는 거대한 사찰이 고려 시기까지 존재하다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과거의 보원사는 마애삼존불의 본사였으며, 한때는 '고란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보원사가 화엄 10찰의 하나로 꼽힌 것은 탄문의 영향력과 관계가 깊은데, 이에 관련하여 975년 탄문이 보원사에 돌아올 때 교종과 선종 승려 1,000여 명이 그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석조를 비롯하여 당간지주, 오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 법인국사보승탑비 등의 유물과 초석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에는 꽤 번창했던 절이었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특히 1968년 절터에서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9.5㎝)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7.5㎝)이 발견되었다. 보원사는 조선 중기 때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폐사된 듯하다. 그리고 이 일대에 99개의 절이 있었는데 백암사라는 절이 들어서자 모두 불이 나 소실되었다는 이야기만 전설처럼 전할 뿐이다.
삼만여 평에 이르는 광활한 보원사지 전경.
보원사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석조(보물 제102호)가 눈에 들어 온다. 거대한 화강암 통돌을 파서 만든 돌그릇으로,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일종의 물통이다. 보원사지 석조는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인 직사각형 모양을 따랐다. 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8cm 정도의 원형 구멍을 뚫어 배수구를 만들었다. 안쪽과 윗쪽은 정교하게 다듬어졌으나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조각수법이나 양식으로 미루어 10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작업을 할때 나온 각종 석조물들을 한 곳에 모아둔 모습이다. 여기저기 건물의 주춧돌, 석등의 하대석,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조물이 즐비하다.
절의 위치를 알려주는 동시에 절의 입구임을 증명하는 유물이다. 비록 단순한 구조를 하고 있지만 하늘로 쭉쭉 뻗은 당간지주의 소박한 미(美)가 오히러 마음을 사로잡는다. 당간지주의 아랫면에는 당간을 받치는 간대(竿臺)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반갑다.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는 높이 4.2m. 당간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걸어두는 당이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를 말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지주가 서 있는 곳은 옛 절터로, 그 자리에서 천년을 변함없이 지켜온 의미있는 당간지주이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가 새겨져 있다.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놓은 형태이며,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조금씩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켰다. 위쪽 가운데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 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조각수법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당간지주 아랫 부분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간대와 당간지주 사이로 보이는 오층석탑의 모습을 담아 보았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지의 초창기 건축이나 석탑의 건립 배경을 추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탑의 규모 및 형태로 보았을 때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사찰의 주 탑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서산 보원사지의 창건 연대와 탑의 건립 시기는 동일할 것으로 판단된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높이가 9미터로, 이중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지만, 부분적으로 통일 신라 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판석으로 짜인 지대석 위에 이중으로 조성되었는데, 하층 기단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고, 우주와 탱주 사이에는 사자상을 양각하였다. 사자상은 방향과 형상이 각기 달라 사실적인 양식을 보이며, 통일 신라 시대의 수법을 잘 계승하고 있다.
하대 갑석 상면에는 호형(활의 모양), 각형(각진 모양)의 낮은 2단의 굄대가 있어 상대석을 받치고 있다. 상대석에는 우주 및 1개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탱주를 중심으로 그 좌우엔 각각 2구씩 8구의 팔부중상이 양각되어 있다.
상대 갑석은 평평하며 하면에는 얕은 갑석 부연이 표시되어 있다. 갑석 상면에는 굄대를 각출하지 않고 넓은 1단의 판석을 끼워 탑신부의 옥신을 받치고 있어 고려 시대 굄석 삽입의 양식임을 말해 주고 있다.
탑신부에는 초층 탑신만 4매의 판석으로 짜여 있고, 각 층은 양 우주가 정연하게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각기 4단씩을 조각하였으며, 꼭대기에는 얕은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층의 옥신석을 받치고 있다. 각 층의 옥개석은 얇고 넓게 퍼져서 백제 탑 양식을 모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수면은 완만한 곡선을 보이고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도 뚜렷하여 전제적으로 경쾌하고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상하 기단의 조각에 비하여 별다른 조식은 없으나 초층 탑신(옥신) 각 면에 문비형 모각이 보인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고, 그 위에 철제로 된 찰간(刹竿)이 솟아 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의 탑신과 옥개석 부분.
오층석탑의 하층기단과 상층기단, 그리고 초층기단의 모습이다. 특히 탑신부 1층 밑에 받침돌 한 개를 끼워 넣은 것은 고려시대 석탑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이다.
상층기단 한 면석에 새겨진 아수라의 모습을 담았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아수라장'이라는 용어의 주인공인 아수라상은 인도 신화에 나타난다. 얼굴과 팔이 여러 개인 악신(惡神)으로 간주되나, 불교에서는 선신(善神)의 역활을 한다.
석탑과 금당터, 그리고 멀리 보이는 법인국사보승탑과 탑비의 모습.
▣ 서산 보원사지오층석탑 요약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통일 신라부터 고려 전기 사이에 발견되는 전형적인 양식의 석탑이다. 아래층 기단에 사자상을, 위층 기단에 팔부중상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특히 서쪽면에 새겨진 아수라상은 인체 비례가 매우 현실적이며 조각 솜씨도 뛰어나다. 이런 아름다움으로 인해 보물로 지정되었다. 기단부에는 우주와 탱주를 세웠고 탑신부 1층 밑에 받침돌 한 장을 끼워 넣었다. 또한 옥개석의 물매가 평활하며 끝이 살짝 들어 올린 것 등은 백제계 양식이다.
또한 옥개석 받침을 4층으로 한 것은 신라계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백제 지역에 통일 신라 이후 세워지는 석탑의 공통된 양식이다. 갑석 상면에는 굄대를 각출하지 않고 넓은 1단의 판석을 끼워 탑신부의 옥신을 받치고 있어 고려 시대 굄석 삽입의 양식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백제, 통일신라, 고려의 석탑 양식이 모두 표현된 석탑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폐사된 금당터는 지금도 복원되지 않고 옛 영화를 꿈꾸며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과거 보원사는 고려 왕실의 절대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으며 성장했던 사찰이다. 그러다가 조선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사찰 존립의 근거가 위협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요즘의 기업이든 그 시절의 종교든 정권의 시녀로 변할 때는 결국 정권의 희생양이 되어 언젠가는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된다는 교훈을 준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보물 제106호)
탄문(坦文, 900~975)은 법호이고 신라말과 고려초의 명승으로 고씨(高氏)이며, 968년(광종 19)에 왕사, 974년에 국사가 되었고 이듬해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왕이 ‘법인(法印)’이라 추시(追諡 : 죽은 뒤에 시호를 추증함)하고 ‘보승(寶乘)’이라는 탑명을 내려지고, 978년에 건립되었다.
탑비는 대석 위에 거북 모양의 비좌를 놓고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형태이다. 이수는 상부에 용연(龍淵)을 파고 용이 사방에서 모이도록 한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국사의 비인 만큼 통일 신라 시대의 발달된 조각 예술이 반영되어 귀부와 이수 모두 예술적 섬세함을 보여 준다.
비 머리에는 ‘가야산 보원사 고국사 제증시 법인삼중대사지비(伽耶山 普願寺 故國師 制贈諡 法印三重大師之碑)’라고 제액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김정언이 짓고, 한윤이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로 비문을 쓴 뒤 김승렴이 글씨를 새겼다. 이 탑비는 보원사의 불교적 성격과 위치, 중창 시기 등을 밝혀 주는 자료로서, 이곳에 남겨진 부도, 석탑, 당간 지주 등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탑비이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기단부의 하대석은 8각이며 안상 안에 다양한 자세의 사자상이 양각되어 있다. 중대석의 받침은 원형으로 구름에 싸여 있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도식적인 표현이 보인다. 중대석은 장식이 없는 8각기둥이며, 상대석에는 앙련이 양각되어 있다.
8각의 탑신석은 중대석처럼 좁고 높으며, 사천왕상, 문비, 인물상이 돌아가며 얕은 부조로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큰 편으로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법인국사는 975년(광종 26)에 입적한 화엄종 계통의 승려이다. 부도는 탑비(보물 제106호)의 건립이 978년인 것으로 보아 법인국사가 입적한 975~978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의 상층부를 밑에서 본 모습.
부도의 하단부 모습.
보원사지 한켠에 근래에 지어진 법당 내부의 모습.
법당의 불단에는 우견편단의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결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있다.
법당에 모셔진 삼장탱의 모습이다. 삼장탱화는 지장신앙이 한층 확대되어 나타난 것이 삼장탱이다. 삼장은 천장, 지지, 지장을 말하며,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지보살(허공장)과 지장보살이다. 천장보살의 협시는 진주와 대진주보살, 지지보살의 협시는 용수와 다라니보살, 지장은 본래대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다. 세 보살의 성격을 보면 천장은 大悲力보살이고, 지지는 智行力보살, 지장은 誓願力(서원력)보살이다.
법인국사 출생 설화
법인국사 탄문의 출생 설화를 보면, 그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귀신과 깊은 관계를 하는데 한 스님이 나타나서 금빛의 과자를 주고 갔는데, 그날로 임신이 되어 태어난 사람이 바로 법인국사이다. 화엄종의 승려로 수행정진하던 중 925년에 고려 태조의 왕후 유씨가 임신을 하자 왕명을 받고 아들을 낳도록 기도를 드려 왕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그 아이가 4대 광종이 되었으니 탄문과 고려 왕실, 그리고 왕권과의 밀접한 관계는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국보와 보물이 있는 옛 절터 이야기(일진사), 한국의 사찰(대한불교진흥원),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허균), 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사진 및 글 : 서백(徐白) 김춘식(金春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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