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55 - 천 명의 성인이 나온 산, 천성산에 위치한 원효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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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155 - 천 명의 성인이 나온 산, 천성산에 위치한 원효암

徐白(서백) 2016. 6. 23. 09:11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천성산(千聖山, 해발 922m)은 산 이름에서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성산 운흥사사적기에 따르면, 원효대사가 중국 당나라 법운사에서 공부하는 1,000명의 승려가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될 운명에 놓인 것을 알고, ‘曉擲盤而救衆(효척반이구중)’이라고 쓴 큰 판자를 하늘로 날려보내어 그 절 상공에 뜨게 하였는데, 이것을 보고 놀란 대중이 일제히 법당에서 나와 쳐다보는 순간에 뒷산이 무너져서 절이 매몰되었다.(혹은 종남산 운제사로 기록된 곳도 있으며, 척판암 안내문에는 泰和寺로 기록되어 있다.)

 

1천여명의 대중을 구제한 이른바 척반구중(擲盤救衆) 행을 통해 스님의 도력을 중국 땅에 과시한 큰 사건이 되었으며, 이를 이름하여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球衆)’이라고 하여 세상에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은 후에 1,000명의 승려들이 우리나라로 원효를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다.

 

원효로부터 화엄경의 가르침을 받은 1,000명의 대중들은 훗날 성인(聖人)이 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천성산(千聖山)이다. 원효가 대중들에게 화엄경을 가르쳤던 산 정상의 사자봉에는 방석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곳 일대를 화엄벌이라 한다. 천성산 조계암상량문에는 당나라에서 온 1,000명의 제자를 머물게 하기 위해 89암자를 창건했다고 한다.

 

1,000명의 제자들 가운데 이곳에서 988명이 도()를 깨쳐 득도하였고, 8명의 제자가 도를 이룬 산은 팔공산이다. 나머지 4명이 가서 부처가 된 곳이 사불산인데, 원효의 제자 1,000명이 득도하여 성인이 되었다고 하여 원적산에서 천성산(千聖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참고 : 원효는 귀족 출신의 의상과 달리 신라 육두품 출신이다.)

 

그리고 천성산 이름과 원효 스님의 관련 내용이 기록된 가장 오랜 문헌은송고승전이다. 중국 송나라의 승려 찬녕(贊寧·919~1002)988년에 찬술한 송고승전의 <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唐新羅國元曉傳)>에 원효가 행한 이적(異蹟)들이 간략히 언급된다. 그 가운데 혹은 소반을 던져 많은 사람을 구했다(或擲盤而求衆, 혹척반이구중)’는 내용이 나온다. 어디서 어떤 사람을 구했는지 그 구체적 내용은 없다.

 

원효암은 마애아미타삼존불과 석조약사여래좌상을 통해 이 지역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아미타신앙과 약사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다. 원효암이 위치한 곳은 바위가 주위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청명한 날에는 바다는 물론 멀리 대마도까지 보이는 천혜의 경관을 간직하고 있는 성스런 장소이다.

 

천성산에 위치한 원효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본사 통도사의 말사인 내원사(內院寺)의 부속암자로, 천성산 정상 가까운 해발 900m에 위치한다. 원효암이 위치한 천성산은 양산의 진산으로서 옛 이름은 원적산이었다.

 

646(선덕여왕 15)에 원효가 창건하였으며, 1905년에 효은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전국에는 원효암(元曉庵)이라는 이름을 가진 암자가 10여 개소 있으나 가장 으뜸 되는 원효암으로 꼽힌다.

 

 

원효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수도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고승 대덕들이 수행처로 삼아 머물렀으며, 최근에 안치한 종각에는 '護國獅子吼鍾閣(호국사자후종각)'이라 적은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다. 또한 범종의 종명(鐘銘)은 경봉스님이 썼다.

 

약사전 전경

 

1991년 여름밤에 비도 오지 않는 마른 하늘에서 사자봉을 향해 천둥번개가 내리쳤다고 한다. 그러한 일이 있은 뒤 바위에는 장삼을 걸친 부처님 형상이 뚜렷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천광(天光)이란 이름을 붙여 천광약사여래불이라고 한다. 약사전 불단에는 산 위의 약사불을 조성하여 안치한 모습이다.

 

번개를 맞아 바위에 만들어진 부처님 형상

 

원효암의 중심 법당은 공포가 없고 둥글게 깎은 도리를 얹은 굴도리식으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고 소박하다. 좌우 퇴칸은 심우실(尋牛室) 등 생활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어칸과 좌우 협칸 3칸은 예배 공간으로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근래에 발견된 불상조성기에 의해 1648(인조 26)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법당 동편의 석벽에는 마애아미타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원효암 중심 법당 우측에 있는 '尋牛室'

 

중심 법당에 걸린 '元曉庵(원효암)' 편액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원효암의 중심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으로, 불상조성기(佛像造成記)에 따르면 원래는 통도사 약사전에 봉안되었으나 말사인 원효암으로 옮겨졌다. 복장 유물로 불상조성기를 비롯하여 인쇄본 다라니경(陀羅尼經), 오곡과 오색실 등을 넣은 동()으로 만든 후령통이 있다. 이 불상은 불상조성기에 의해 1648(인조 26)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원효암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사람 크기에 가까울 만큼 규모가 큰 석재 불상이다. 머리를 앞으로 약간 숙이고 등을 구부린 자세이며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왼손은 자연스러운 반면 오른손은 엄지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비하여 짧고 옆이 다소 두꺼워 보이는데, 이는 석조 불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법당에 봉안된 신중탱

 

우측의 암석을 평평하게 깎아 면을 만들고 중앙에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본존을 향하여 몸을 약간 틀어 합장하고 연꽃을 밟고 서 있는 삼존불입상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1양산원효암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1. 원효암 주법당의 동쪽 석벽에 새겨진 3구의 마애삼존불로, 1906년에 조성되었다. 삼존불의 상단에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이라고 음각되어 있어 본존의 존명이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고, “世尊應化二千九百三十三年四月日(세존응화이천구백삼십삼년사월일)”이라는 명문을 통해 1906년이라는 조성 연대가 확인된다.

 

 

좌로부터 용왕단, 독성각, 칠성전, 산신각의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로, 원효암의 중심법당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각 안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

 

공양간과 다실이 자리하고 있는 건물

 

 위에 기술한 글의 내용 중에는 한국의 사찰, 문화유산 상식여행, 사찰의 상징세계, 우리불교 문화유산 읽기, 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언론기사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