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현판의 경연장이 된 해남 대흥사의 주요 편액들 본문
전남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는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과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믿을 수 없는 설화이다. 대흥사는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 가사와 발우)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고, 한국불교의 종가집으로 그 역활을 다해온 도량이다.
특히 대흥사에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과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 대한제국의 관료 겸 일제 강점기의 서예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 ~ 1936),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년~1856년), 정조대왕의 사액 편액 등이 있어서 각종 편액과 현판의 경연장이라 해야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대흥사의 주요 편액들을 따로 모았다.
사찰의 첫 관문인 일주문의 어칸에 걸린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 편액
조선 후기의 서예가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 편액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하고 동국진체를 이룩한 조선시대 대표적 서예가 중에 한 사람인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해탈문(解脫門)’ 편액
정조대왕이 1789년에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
범종루(梵鐘樓) 편액
전주 출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쓴 ‘가허루(駕虛褸)’ 편액이다. 창암 선생은 19세기 호남 서예계를 평정하며, 추사 김정희(서울), 눌인 조광진(평양)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대 조선의 3대 명필이다.
성당(惺堂) 김돈희의 글씨인 ‘龍華堂(용화당)’ 편액이다. 성당 김돈희의 글씨도 국내 여러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창건한 동아일보의 제호가 성당 김돈희의 글씨로, 조선일보의 제호는 위창 오세창의 글씨로 제호를 삼았는데, 두 신문의 제호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奉香閣(봉향각)’ 편액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천불전(千佛殿)’ 편액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침계루(枕溪樓)’ 편액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應眞堂(응진당)' 편액
산신각(山神閣) 편액
명부전(冥府殿) 편액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白雪堂(백설당)' 편액
제주도 유배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려 초의선사에게 써주고 간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이다. 또한 동국선원에 걸린 ‘一爐香室(일로향실)’과 ‘東國禪院(동국선원)’ 편액도 추사의 글씨이지만 출입이 제한 된 곳이라 담지 못했다.
대웅전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은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이다. 이 편액에는 추사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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