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임고서원 본문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번지 일대에 자리 잡고있는 임고서원(臨皐書院)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또한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는 평천1리는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추억이 있는 영원한 고향이기도 하다.
정몽주(음1337∼1392년)의 본관은 연일, 자는 달가, 호는 포은, 시호는 문충으로 경북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문(시와 글), 서화(그림)에도 뛰어났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고려 삼은의 한사람으로 기울어가는 고려의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공양왕 4년(1392년) 선죽교에서 이방원(후일 태종)에 의해 피살되었다. 조선 태종 원년(1401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임고서원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충절을 기리며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 8년(1553)에 노수, 김응생, 정윤량, 정거 등이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 아래에 창건을 시작하여 1554년에 준공하였다. 1554년(명종 9년)에 ‘임고’라 사액되었으며, 명종 임금으로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으로,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례를 봉행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였으며, 이 때 선조 임금으로부터 다시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재사액)이 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으나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복원하였다. 1979년 정부 보조금으로 구강당 뒤에 묘우를 신축하여 문충사(文忠祠)라 현액하고 이안(移安)하였다. 1990년대에 와 시비와 도비를 지원받아 여러 건물을 건립하는 등 성역화사업을 하였고, 2001년 지봉(芝峯) 황보인(皇甫仁)을 추향하고, 제2차 성역화사업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530년 국가에서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 22권 경상도 영천군조 인물편과 1584년 서애 유성룡이 지은 「연보고이(年譜攷異)」의 기록된 내용을 참고하면,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 충숙왕 6년(1337년) 12월 22일 경상도 영천의 동쪽 마을 우항리에서 우렁찬 울음을 터트리며 하늘의 별에서 땅으로 내려 앉았다. 어머니 영천 이씨는 임신 중에 난초화분을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다가 놀라 깨어나 포은 선생을 낳았기에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지었다.
선생은 태어났을 때 어깨에 검은 점 7개가 북두칠성의 모양으로 있어 훗날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암시가 되었다. 9세 되던 해에는 어머니께서 물레질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을 때 검은 용이 뜰 가운데 있는 배나무를 기어 올라 황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배를 따먹기에 유심히 쳐다보니, 용 또한 머리를 쳐들고 빙그레 웃는 모습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뒤뜰로 가니 포은 선생이 배나무에 올라 앉아 배를 따먹다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 모습이 흡사 꿈속에서 본 용의 모습이었기에 이름을 몽룡(夢龍)이라 고쳤다고 한다.
포은 선생은 관례를 치를 즈음에 또 한번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꿈을 꾸게 되는데,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기에 무릎을 꿇고 ‘어디서 오신 어른이십니까?’ 하고 물으니, 신선이 빙그레 웃으며 ‘나는 주공(周公, 중국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다. 그대 아들 몽룡은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길 소중한 사람이니 잘 길러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깬 선생의 아버지는 곧 관례를 치를 것이니 아명을 버리고 꿈속에서 주공을 만났다 하여 몽주(夢周)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또한 포은 선생은 열아홉에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벼슬길에 나아가 있던 스물아홉에 모친상을 당해 벼슬을 내어놓고 다시 3년 간 시묘살이를 실천한 그 효행이 바로 충(忠)을 실천하는 근간이 되고, 나아가서 천추만세 만인의 사표로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다.
※ 1. 고려삼은(高麗三隱) 또는 여말삼은(麗末三隱)은 고려의 세 충신을 말하며,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 세 사람을 이른데, 세 사람의 호에 각각 ‘은(隱)’자가 들어 있는데서 유래한다. 이들은 중국 원(元)나라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벼슬도 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끝까지 지조를 지켰으며 살아 남은 사람들도 후진( 後進) 육성에 일생을 보냈다.
2. 위전(位田) - 제사 따위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경작하는 밭을 이른다.
3. 중정(中丁) - 음력으로 그달 중순에 드는 천간(天干) 정(丁)이 되는 날(참고 : 상정(上丁), 하정(下丁)
포은 정몽주는 특히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蓍祖)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그래서 서원 입구에는 퇴계선생의 유묵에서 집자(遺墨集字)한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 새겨진 송탑비(頌塔碑)가 세워져 있다. 송탑비 뒤로 보이는 육각정은 조옹대이다.
송탑비(頌塔碑) 뒷면에는 조선시대의 숙종과 영조, 고종황제의 어제어필(御製御筆) 시(詩)를 새겼다.
조옹대에서 본 임고서원 전경(구서원 쪽)
조옹대에서 본 임고서원 전경(구서원과 신서원)
포은 유물관 모습
조옹대(釣翁臺)와 용연(龍淵)이다. 포은 선생은 호수의 물고기를 보며 연비어약(鳶飛魚躍)을 말씀하셨으며, 여헌 장현광 선생은 임고서원 중건 상량문에서 '조옹(釣翁)이라는 대(臺)가 시냇가에 있는 것은 아마도 은거하신 초지(初志, 처음에 품은 뜻이나 의지)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은 포은 선생께서 낚시를 즐겼다하여 조옹대라 부르고, 또 선생이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용(龍)이라고 하여 조룡대(釣龍臺)라 부르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연못은 용연이라 불렀는데 성역화사업 때 복원을 하였다.
※ 연비어약(鳶飛魚躍)이란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온갖 동물이 생(生)을 즐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조옹대(釣翁臺) 정면에 걸린 무괴정(無愧亭) 편액
서원 뒷편 산 중턱에서 본 임고서원 전경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 선죽교(善竹橋)는 고려 태조 왕건이 919년 송도(지금의 개성)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널다리이다. 이곳 임고서원에도 개성의 선죽교를 실측하여 그 규모대로 이곳에 가설하고 한석봉이 쓴 선죽교 돌비석 역시 탁본하여 세우게 되었다.
고려 말기의 충신 포은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다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후일 태종)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철퇴를 맞고 죽은 곳이다. 원래는 선지교(善地橋)라 불렀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에 다리 옆에서 송죽이 솟아났다고 하여 선죽교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정몽주가 타살을 당한 그 자리에는 아직도 그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정몽주는 선죽교의 이슬이 되었지만 그 지조와 절의는 오늘날까지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경북 기념물 제63호 임고서원 은행나무(臨皐書院 銀杏나무)는 수령이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0m, 둘레는 5.95m에 이른다. 가지는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나무가 자라나는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본래 이 나무는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을 당시 그곳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없어진 임고서원을 1600년경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은행나무도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포은 정몽주는 어려서부터 기억력과 암기력이 뛰어났으며, 항상 책을 가까이 하였다. 어머니 영천이씨는 아들이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예상하고 '백로가'라는 시(詩) 한 수를 지어 교계(敎誡, 가르치고 훈계함)하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
포은 정몽주 선생은 성리학이 고려와 조선에 뿌리 내리는데 큰 역할을 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존경받는 학자이다. 고려말 국운이 기울어 가는 고려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한 이성계, 정도전 등의 개국세력을 상대로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개성의 선죽교에서 피살된 인물로, 후세의 불사이군(不事二君, 한사람이 드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는 것)을 지킨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포은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방원이 잔치날 정몽주를 불러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하여가'를 하게 되고,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변을 대신하였는데, 이 시조는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고려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전한 것이다. 그 뒤에 정몽주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후일 태종)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철퇴를 맞고 죽게 된다.
▶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의 뜻
공양왕이면 어떠하고 이성계면 어떠하리
고려가 조선이 된 들 어떠하리
정몽주 자네와 내가 서로 어우러져
이성계를 모셔 백년동안 권세를 누려보자.
이 시조는 이방원이 정몽주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지어 부른 ‘하여가’에 대한 화답시로 ‘단심가(丹心歌)’라 한다. 정몽주는 이 단심가로 굳은 절의(節義)를 보임으로써, 끝내 이방원의 무리에게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만다.
▶ 정몽주의 '단심가'
이몸이 죽고죽어 골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단심가'의 뜻
내가 죽고죽고 백만번을 죽는다고 해도
내몸이 땅속에서 흰 뼈가 되어 넋이 없어도
공민왕을 향한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포은 선생 숭모기념비
구서원의 전경
통정대부 공조참의로 추증된 최선매(崔善梅, 1554∼1626년)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최선매의 자는 의수, 호는 궁와이며, 부래산 아래에 살던 포은 선생의 원우(구 임고서원)의 유생(儒生)이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원이 소실될 위기에 있을 때, 선생의 영정과 위판을 받들어 기룡산 석굴 속에 피안시켰으며, 난리가 평정된 뒤에 서원을 중건하여 다시 안치한 공을 인정받아 유림의 상소로 고종 신묘년(1891년)에 공조참의로 추증되었다. 그 공을 가상히 여겨 기적비를 서원의 영당 앞에 세우니 봉한이 글을 쓰고, 포은 선생의 후손인 정희규가 비문을 지었다.
신서원의 전경
신서원의 외삼문에 해당하는 영광루(永光樓)이며, 루(樓) 아래 출입구 판문 위에는 경앙문(景仰門)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영광루(永光樓)의 창방 위에 도리 밑에 놓인 받침부재인 장혀를 받치고 있는 화반에는 귀면상(鬼面像)을 그려 사악한 무리들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다. 주로 귀면은 물고기나 연꽃 등을 입에 문 형태로 화반이나 문 청판, 보머리, 닫집 조각장식 등으로 나타난다. 인도 힌두교 및 불교신전에 조각된 '영광의 얼굴'이란 뜻의 키르티무카에서 기인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건축에 사용하는 귀면은 귀신이 아니라 용(龍) 얼굴이다. 부릅뜬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며 어느 곳에서 들어올지 모르는 사악한 무리들을 막는다는 벽사의 의미를 갖고 있다.
영광루(永光樓)의 또 다른 화반의 모습이다. 익공식이나 주심포형식 건물에서 포와 포 사이에 놓여 도리 밑에 놓인 받침부재인 장혀를 받치고 있는 부재이다. 도리나 장혀가 중간에서 처지는 것을 방지해 주는 역활을 한다.
영광루의 천정에 만들어진 눈썹천정이다. 건물의 양쪽 측면 칸의 외기에 구성되는 작은 천장을 눈썹천장이라고 한다. 천장을 하지 않으면 측면 외기에 걸린 추녀와 측면 서까래 말구 등이 안쪽에서 보여 깔끔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장을 하지 않는 건물일지라도 이 부분 만큼은 천장을 한다. 천장 면적이 매우 작기 때문에 눈썹천장이라고 한다.
영광루를 통과하면 좌측에 포은 선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위치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교육공간은 앞에, 제사공간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사당인 문충사와 유생들의 모임 및 학문을 닦는 곳인 강당(흥문당), 생활공간인 함육재와 수성재, 그리고 전사청, 심진각 등의 건물로 배치되어 있다.임고서원(臨皐書院)이라는 편액이 걸린 이 건물은 서원의 강당인 흥문당(興文堂)이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동쪽 협실은 경의협(敬義夾), 서쪽 협실은 명성협(明誠夾)이다.
강당 중앙 마루에 걸린 흥문당(興文堂) 편액
강당 흥문당 중앙 마루의 동쪽 협실에 걸린 경의협(敬義夾) 편액
강당 흥문당 중앙 마루의 서쪽 협실에 걸린 명성협(明誠夾) 편액
강당인 흥문당(興文堂) 건물에 걸린 임고서원(臨皐書院) 편액이다. 편액의 관지에는 '崇禎再壬戌後學坡平尹鳳五書(숭정재임술후학파평윤봉오서)'라고 적혀 있는데, 숭정(崇禎)은 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장렬제(莊烈帝) 때의 연호로 서기로는 1628년에서 1644년까지이다. 이 편액은 1742년(영조 18년) 학문에 늦게 종사한 후진의 학자인 파평윤씨 봉오라는 분이 쓴 것이다.
흥문당 대청에는 임고서원 상량문을 비롯한 여러 현판이 걸려있다.
서재인 함육재(涵育齋)와 전사청(典祀廳)의 모습
동재인 수성재(修省齋)와 심진각(尋眞閣)의 모습
유물을 보존하는 심진각(尋眞閣) 건물
흥문당 뒷편에 위치한 사우인 문충사(文忠祠)로 들어가는 내삼문으로 유정문(由正門)이다.
사우인 문충사(文忠祠)에는 포은 정몽주와 지봉(芝峯) 황보인(皇甫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임고서원을 관리하는 사택이다.
숙경문(肅敬門) 편액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계현재(啓賢齋)이다. 이곳은 포은 선생의 부친인 정운관(鄭云瓘)의 재향을 모시는 재실이다.
충효관으로 들어가는 협문에 걸린 사숙문(私淑門) 편액
충효관 정문에 걸린 진수문(進修門) 편액
충효관(忠孝館)의 모습
포은 유물관 전경
보물 제1110 - 1호 정몽주 초상(1629년), 임고서원 소장 - 초상 출처 : 문화재청
보물 제1110 - 2호 정몽주 초상 - 초상 출처 : 문화재청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 ‘숭정기사모본’이라 쓰여 있는 임고서원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1110-1호이고, 화면 왼쪽에 ‘가정 000고본’이라고 쓰인 경기도박물관의 것은 보물 제1110-2호이다.
포은 유물관에 전시된 임고서원 관련 전적으로 포은 선생의 연보가 기록된 "포은선생연보고이(1585년)"이다. 포은 선생의 연보가 서로 다른 것이 많아 조선 선조가 서애(西厓) 류성용에게 명하여 편찬케 하였다. 보물 제1109호로 지정된 '임고서원 전적(典籍)'은 임고서원에 소장(소유 : 임고서원, 관리 : 영천시립도서관)되어 있는 전적들로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것이다. 임고서원은 명종 8년(1553)에 창건되어, 선조 36년(1603)에 중건되었다.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은 약 200여 책이 있는데, 이 중에서 지정된 것은 10종 25책이다. 지정된 책을 보면,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논어언해』·『심원록』·『임고서원고왕록』·『임고서원장학계안』등의 책으로 모두가 임고서원에 관련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임고서원의 창건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서원의 운영과 구성 등 서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옹대에서 북쪽 방향으로 본 전경. 멀리 평천교회 종탑 앞쪽이 필자의 시골 고향집이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272호 포은정몽주유허비 (圃隱鄭夢周遺墟碑) - 포은 정몽주는 고려 공민왕 5년(1355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에서 3년상을 지내고 그후 고려 공민왕 14년(1365년) 11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역시 묘소에서 3년을 지냈다. 포은 선생의 효성을 느낄 수 있는 정몽주 유허비는 그의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 보고되어 공양왕 원년(1389년) 그의 출생지인 임고면 우항리에 효행을 행한 마을이란 뜻의 '효자리(孝子理)'라고 적힌 비를 세우게 하였다. 그후 조선 성종 18년(1487년) 경상감사 손순효의 현몽에 의하여 잃었던 비를 땅속에서 찾아내어 다시 세우고 비각도 함께 건립하였다.
정몽주 관련 설화
1. 부래산 설화
포은 선생의 출생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천동 부래산 아래에 조선 명종 8년(1553)에 임고서원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에 준공되어 ‘임고’라 사액되었고, 명종 임금으로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으로, 매년 향례를 봉행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하였다.소실되기 전까지 임고서원이 있었던 부래산은 주변경관이 매우 아름다운데, 전설에 의하면 어느 해 여름날 붕어처럼 생긴 작은 산이 운주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뇌성벽력이 치고 소나기가 내려 홍수가 나면서 작은 산이 떠내려 오는 것을 마을 아낙네가 발견하고 놀라서 "아! 저기 산이 떠내려 온다."라는 고함을 지르자 떠내려 오던 산이 멈추어 섰다고 한다. 그래서 산이름이 부래산(浮來山)이 되었다고 한다.
2. 정몽주의 무덤을 경기도 용인에 쓰게된 이유
포은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용인군 모현면의 지명은 이 명현을 흠모한다는 뜻에서 뒷날 그 지방민에 의해서 지어진 지명이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정몽주가 조영규(?~1395)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된 후 그의 시체가 선죽교 아래에 버려져 있는 것을 개성 중들이 수습하여 처음에는 풍덕(덕수)에 묻었는데, 그로부터 15년 뒤에 용인으로 이장한 것이며, 본래는 그의 고향인 영천에 묻고자 유골을 운구해 가는 도중에 용인의 죽재에 이르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몹시 불어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무덤이 있는 산중턱에 꽂혔다.
한동안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상여를 옮기려 했으나, 상여가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 때 어떤 지관이 나타나 이것은 하늘의 계시가 틀림없으니 명정이 꽂힌 저곳에 시신을 묻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상여가 움직이게 되어 결국 영정이 꽂힌 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인해 포은 정몽주는 고향인 영천 임고에 묻히지 못하고 용인 땅에 묻히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조선 태종 재위 때, 정몽주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선조의 가장 높은 벼슬인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하고,
영의정을 새긴 비석을 그의 무덤 앞에 세웠는데, 이상하게도 그 비석을 세운 후 며칠 안된 어느 날 밤에 뇌성벽력이 치고, 비가 억수 같이 쏟아졌는데, 이튿날 아침에 정몽주의 자손이 그 무덤에 가보니까, 그 무덤 앞에 세운 비석이 부서져 있었다. 이것을 본 그 자손은 직감적으로 이것은 선조께서 조선의 관직을 받은 것에 대한 분노라고 생각 했다.
그리하여 정몽주의 자손은 비석을 다시 세우면서 조선조에서 준 추증 관직명을 쓰지 않고, 생전에 고려 때 벼슬인 '고려 문하시중'이라고 하는 관직명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 뒤로부터는 아무리 뇌성벽력과 비바람이 몰아쳐도비석은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정몽주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비석이 바로 그 당시 정몽주의 자손이 다시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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