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윤선도가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감동해 머물게 되었다는 원림과 세연정 본문
보길도(甫吉島)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8세 때 큰집에 양자로 가게 되어 해남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해남윤씨 집안 대종(大宗)을 이었다.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도계서원)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윤선도는 30세 되던 1616년(광해군 8)에 성균관유생으로서 집권세력인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 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31세(1617년)에 첫 유배를 당해, 함경도 경원(慶源)에서 1년 만에 부산 기장(機張)으로 옮겨져 6년 4개월을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 봉림(뒷날 효종), 인평(麟坪) 두 대군의 스승이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 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온 후에는 조상이 물려준 엄청난 재산으로 정치와는 관계없이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인조대왕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났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무민거(無憫居), 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山陵)문제와 조대비복제(趙大妃服制)문제가 대두되었다. 남인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윤선도는 송시열, 송준길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로써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고산은 73세인 1660년(현종 1년) 세 번째로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를 당했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현종 12)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다. 한국 문학사에서 불멸의 위치에 올라 있는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는 그의 생애에 모두 세번의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첫번째는 31살 때 함북 경원과 부산 기장, 두번째는 경북 영덕(52), 세번째는 함경남도 삼수갑산의 삼수(79)로 귀양을 가야 했다. 14년 4개월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 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의 하별집(下別集)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 夢天謠〉 5수, 〈우후요 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
〈산중신곡〉 18수 가운데 〈오우가 五友歌〉는 물, 돌, 나무, 대나무, 달을 읊은 시조로 널리 애송되었다. 〈어부사시사〉는 효종 때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자료출처 :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보길도로 가기 위해서는 땅끝마을(土末)에서 배를 타고 노화도 산양진항까지 가야한다. 땅끝마을 여객선터미널에 있는 형제바위이다.
땅끝마을에 있는 두 개의 바위섬
땅끝마을 전망대
땅끝마을의 노거수
땅끝마을에서 노화도 산양진항까지 타고 간 뉴장보고호 여객선
뉴장보고호에 승선해 바라 본 땅끝마을 전망대
노화도로 이동하는 중에 만나는 또 다른 섬
노화도에서 보길도로 넘어가는 보길대교
명승 제34호 보길도 윤선도 원림이다.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병자호란 때 왕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甫吉島)의 산세와 자연경관의 수려함에 매혹되어 머물게 되었다 하는 윤선도원림이다.
보길도는 그가 인조 15년(1631) 51세 때부터 13년간 글과 마음을 다듬으며, ‘어부사시사’와 같은 훌륭한 시가문학을 이루어 낸 곳이다. 또한 조선시대 사대부나 양반계급들이 꾸민 3대 별서정원으로 보길도 세연정(부용동 정원), 강진 다산초당(정약용), 담양 소쇄원(양산보)을 꼽기도 한다.
혹약암(惑躍巖) - 세연지 계담에 있는 칠암 중의 하나이다. 이 바위는 역경(易經)의 건(乾)에 나오는 혹약재연(惑躍在淵)이란 효사(爻辭)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사투암(射投巖) -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七巖)이라 불렀는데, 그 중 하나인 사투암(쏠 射, 던질 投)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활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쪽이 들려진 모습이다.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비홍교(飛虹橋) - 「보길도지」의 기록에 의하면 세연정이 못의 중앙에 있고 세연정과 못둑의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다.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루(樓)에 오른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다리를 비홍교(날 飛, 무지개 虹)라 불렀다. 지금은 그자리에 잡석을 쌓아 호안과 방단(方檀)이 연결되어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세연정(洗然亭) -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芙蓉洞)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라고 한다.
세연정 뒤의 방지(方池)
고산 윤선도가 이곳을 부용동이라 한 연유는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하여 부용(芙蓉)이라 하였다고 한다.
세연정에는 각방향별로 다른 이름의 편액을 달았다고 '보길도지'는 전한다. 고산이 1637년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에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인 '세연정'은 원래 한 간 정자로, 용도는 유희의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편액도 정자의 각 방향에 각기 다른 이름의 편액을 걸었는데, 중앙에는 세연정 ,남쪽에는 낙기란, 서쪽에는 동하각, 동쪽에는 호광루 라고 편액을 걸었고, 서쪽에는 칠암헌 이란 편액을 따로 걸었다고 한다.
세연지 중앙에 앉힌 세연정은 일반 누각과는 달리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사방으로 창호와 마루를 돌렸다. 창호는 분합문(分閤門)으로 문을 모두 들어 걸면 사방이 개방된 정자가 되어 주변의 풍경을 병풍처럼 두르게 된다. 앞쪽으로는 자연적인 연못을, 뒤로는 인공적인 연못을, 북 측면으로는 기암괴석의 정원을,남 측면으로는 동대와 서대에서 춤추는 무희들을 볼 수 있도록 사방이 트여 있다.
흘러내리는 물에 돌둑을 쌓고, 연못을 만들고, 그 물길을 인위적으로 돌려 회수담을 만들고, 그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만든 것이 '세연정'이다. 세연지는 ‘心’의 형태로 못을 만들었다.
남자 어린이들에게 채 색 옷을 입혀 어부사시사에 맞춰 춤을 추게 하곤 세연정이나 옥소대에 올라 연못에 비친 춤사위를 즐겼다. 세연정 앞 동대와 서대, 서쪽 산 중턱의 옥소대까지 끌어들여 거대하고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낸 고산의 섬세하고 기발한 조원 기법이 드러나는 곳이다. 고산은 이곳에서 예악(禮樂, 예절과 풍류)으로 성정을 다스리며 자연과의 합일에 이르고자 하였다. 이곳이야말로 조선시대 별서정원의 아름다운 조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동대(東臺) - 세연정에서 바라보아 오른쪽 판석보 옆에 위치해 있고, 자연석으로 쌓아 올렸다. 어부사시사가 불리어지면 여러 사람이 어울려 군무(群舞)를 즐겼던 곳이다.
서대(西臺) - 현재는 나선형으로 계단이 남아 있는 서대이다. 동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동대에서 행했던 군무 행위를 했던 곳으로 춤을 추며 돌면 정상에 오르도록 나선형 계단을 이루었다.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계담과 방지(方池) 사이에 판석보를 막아 조성된 세연지는 물과 바위와 송죽과 정자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다. 계곡물을 담은 계담과 인공으로 만든 회수담을 두고 S자형 제방과 칠암의 배치 및 오입삼출(五入三出), 고입저출(高入低出)의 수구로 물 흐름을 조절한 과학적 지헤가 돋보이는 공간이다.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石造洑)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사진1-동천석실)
정작 윤선도가 글을 즐긴 곳은 낙서재와 마주보고 있는 동천석실(洞天石室)이다. 이곳에 올라가 부용동을 내려다보며 학문의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동천’은 ‘하늘과 통한다’라는 뜻이다. 아득히 먼 인간세상을 굽어보듯 신묘한 바위절벽에 자리한 동천석실은 초월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
(사진2-동천석실)
(사진3-동천석실)
(사진4-동천석실)
(사진5-동천석실)
(사진6-동천석실)
(사진7-동천석실)
고산 윤선도는 자연에 묻혀 자연과 대화하며 별서(別墅)를 경영(經營)하였다. 또 낙서재의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곡수당(曲水堂)이라 하고, 낙서재 건너 산 중턱 절벽 위에 한칸 집을 짓고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하여 독서하며 선경(仙境)에 노닐었다.
곡수당은 고산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기거했던 곳으로, 옛 모습은 사라지고 논밭으로 변해 있었으나 근래에 새로 지었다. 곡수당 터를 뒤로하고 약 100m 더 올라가면 고산 거처지인 낙서재(樂書齋)에 닿는다.
고산 윤선도 거처지인 낙서재(樂書齋) 터에 근래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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